나는 절대자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 딱 그 사람이 견딜 만큼의 고난만 주신다.’
물론 난 아직 살아있다. 이 글을 쓰는 현재까지도. 시련들을 통해 난 홀로 서는 법을 배웠고, 감정을 컨트롤하는 법을 배웠다. 이것들 말고도 얻은 것은 분명 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꼽을 수 있는 것은 이 둘뿐이다. 얻은 것보단 잃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커 더 이상 꼽아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잃어버린 것들이 무엇인지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알아차리고 보니 텅 비어있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내 무지함 때문일까. 아직까지도 내 시험은 끝나지 않았다.
어느 여름날, 나는 졸음과 사투를 하며 강의를 듣고 있었다. 수업 내용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관한 것이었다. 대충 이 세상이 얼마나 감사하고 아름다운지에 대해 깨달음을 주는 내용이었다. 슬슬 졸음에 정복당하려던 참에,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과거의 정의는 뭘까요?”
나는 당연히 ‘지나간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학생들도 나와 같은 의견인 듯 보였다.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라고만 할 수는 없답니다. 현재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죠. 과거의 정확한 정의는 ‘기억 속의 현재’입니다. 이와 같이, 미래에 대한 정의는 기대 속의 현재라고 알 수 있겠죠.”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기억 속의 현재… 나는 이 말을 곱씹어 보다, 어쩌면 내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육체적이나 물질적으로 잃어버린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과거가 ‘기억 속의 현재’라는 것을 알아차린 지금, 잃어버린 감각과 감정만큼은 다시 환기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는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처럼, 과거를 억지로 불러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 과거를 깨워줄 ‘우연’을 기다려야 할 뿐이었다.
하루는 친구들과 계단에 앉아 수다를 떨 때었다. 주제는 ‘살기 싫다’. 보통 이 얘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젊은것들이 왜 그러냐?’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이 말은 틀렸다. 애초에 ‘젊은것’에 대한 정의가 부정확하다. 지금 현재의 우리가 각자의 가장 ‘어른’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간에, 나는 그날도 이젠 습관이 돼버린 “우울하다.”라는 말을 내뱉었다. 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내 친구는,
“그럼 네 인생 중에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젠데?”라고 물었다.
이에 나는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중학교 때.”라고 대답했고, 친구의 “왜?”라는 되물음에
“사람이 좋았어서.”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갑자기 오랜 기억들이 떠올랐다.
나는 참 사람을 좋아했다.
그것을 증명하는 첫 번째 이야기. 내가 초등학교에 다녔던 때이다. 여느 때와 같았던 날, 전학생이 왔다. 눈을 덮는 앞머리에, 침울한 표정. 어딘가 우울해 보였던 그 애는, 전학을 오자마자 따돌림을 당했다. 말투가 어눌하고 음침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 애가 마음에 들었다. 지금도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필사적으로 친해지려 노력했던 기억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렇게 알아낸 것은 그녀에게 가정사가 있었다는 것. 그래서 아마 매일 울고 있을 거라는 것. 나는 매일 그 애의 고민을 들어주었고, 친구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 결과, 그 애는 많이 밝아지게 되었고, 반 친구들이랑도 잘 지내게 되었다.
이에 이어지는 두 번째 이야기. 내가 중학교 때 이야기다. 이때 나의 인류애가 궁극치를 찍었었다. 이 시절의 나는 친구들을 따라 교회에 다녔었다. 주말에도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점도 좋았지만, 교회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참 재미있었다. 그래서 주말마다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녔던 기억이 있다. 늘 찬송가를 부른 뒤에, 각자 기도를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내가 빌었던 기도는 이것이다. ‘제 주위 사람들의 고통을 모두 저에게 주세요.’ 지금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약간 애가 모자랐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저 때 내가 저런 소원을 빈 이유는 단 하나이다. 사람들이 너무 좋아서. 학교 전시회에서 친구들 얼굴을 그려놓은 작품을 내놓았을 정도이니, 저런 발상을 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 혹시 저 기도가 이루어진 건가.
이것들 말고도 무수한 기억들이 떠올랐지만, 모두 적자니 자화자찬하는 기분이라 그만두겠다. 그래서 그 친구들은 어떻게 됐냐고? 대충 모두 뒤통수를 후려치곤 떠났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자, 점차 난 사람을 만나기보단 혼자 있는 것을 즐겼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땐 설렘보단 두려움만 가득 차게 되었던 거 같다. 아무튼 이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참 사람을 잘 믿었고, 좋아했고, 그리고 이 순간만큼은 아주 행복했다.
이 기억들을 떠올리자, 갑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 움찔거림이 느껴졌다. 아주 잠깐이지만, 주변의 색깔들이 아주 또렷하게 보였다. 그제야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너만 생각해.’
‘아무도 믿지 마.’
‘봐봐, 그렇게 함부로 믿다가 그렇게 됐잖아.’
‘무시해. 신경 써줘 봤자 너만 손해야.’
정답인 줄만 알고 새겼던 그 말들이 조금은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난 아직 살아있다. 누군가는 나를 보고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내 인생은 실패했다고. 주위에 휘둘리다가 그렇게 됐다고. 더 좋은 모습일 수 있었다고. 그럴지도 모른다. 나 또한 늘 원망했다. 내 그릇에 비해 하나님이 너무 많은 고난을 주셨다며. 물론 지금도 난, 매일 가슴 졸이며 넘칠 듯 말 듯 한 그릇과 줄타기를 하고 있다. 언제 쏟아질까 무서워 가슴 졸이며 말이다. 하지만 난 나만의 기대 속의 현재를 꿈꾸며 살아가려고 한다. 너와 내가 다르듯이, 서로가 기대하는 현재 또한 다를 것을 이젠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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