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내게 물었다. 새로 옮기는 학교에서 학년부장을 하라면 부담이 되지 않겠냐고.
그래서 대답했다. 부담은 되지만 부담이 되지 않는다고. 부담스럽지만 받아들인다는 의미였다.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는 것만큼 거부하고 싶지만, 나잇값을 해야 한다는 상황적 강제가 있다면 피할 생각은 없다고.
그러나 이제까지 능력을 벗어나는 학년 부장을 세 번 하면서 나 자신에게든 학년 담임쌤들께든 명확하게 해두는 것이 있었다.
난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니 그 이상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
그 대신 나 스스로도 부장으로서 모든 선생님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존중해 드리겠다는 암묵적인 거래 같은 걸 나 홀로 했다.
비사교적인 내가 학년부장이 되었다고 갑자기 사교적인 척 에너지를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교적인 것은 자연스럽게 다른 담임쌤들의 몫으로 두면 될 것이니. 그런 약점과 한계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하고 나니 선생님들의 불만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불평도 없는 것이니.
그래서 약점을 붙들고 고민하고 소모되는 것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도 된다는 암묵적 동의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경우든 내 능력에 관계없이 타협할 수 없었던 것은 우리의 모든 교육 활동은 반드시 아이들을 향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의 부족함으로 인해 선생님들이 겪게 되는 불편함에 책임이 면제되지는 않았지만, 너무 미안해하지는 않기로 했었다. 거기까지가 나의 한계이자 최선인 것이니까.
그것도 담임쌤들을 잘 만나야 통하는 전략이긴 하다. 이제껏 난 운이 좋았다. 좋은 분들을 만나 양해를 얻고 오히려 칭찬과 격려까지 들었다.
학생들에게도 나의 약점을 그대로 각인시킨다. 나의 결정적인 약점 중의 하나는 악필이다.
초임 교사 시절에는 학생들 생활기록부를 수기로 작성했다. 난 아이들에게 의도하지 않게 큰 죄를 저질렀었다.
컴퓨터의 발달은 나의 약점을 메우는 놀라운 지원군이었다.
그럼에도 칠판의 존재는 나의 약점을 늘 드러냈다.
대학교 때도 학과 친구들이 내 노트를 수시로 빌려 가면서 고맙다는 말보다 불평을 많이 했다. 글자를 못 알아보겠다고. 무슨 암호 해독 같다고. 그런데도 꾸준히 내 노트를 빌려 가던 친구들은 이내 내 글자에 익숙해졌다.
학생들에게 학년 초에 이렇게 양해를 구한다.
"이 칠판 글씨가 나의 최선이니 글씨 이쁘게 써달라는 요구는 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계속 보다 보면 알아보게 되는 신기한 순간이 곧 올 것이고, 그 순간이 오기 전에는 못 알아보는 글자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되는 끈기와 추론력이 향상될 것이다."
이건 뻔뻔함의 극치다. 미안해하기는커녕 알아서 적응하라니... 그런데 결국 아이들은 적응한다. 추론력도 향상되면서...
핵심은 이것이다.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내가 할 수 없는 수준의 노력을 하며 소모되지 않을 것.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며 매 순간 나의 최선이면 될 것.
약점보다 강점에 집중할 수 있는 뻔뻔함을 갖출 것.
혹 나의 노력을 쥐어짜서 상대방의 기대에 부응했다면, 한 번 높아지고 나서는 절대로 낮아지지 않을 상대방의 기대에 맞추려고 늘 쥐어짜면서도 성취하지 못하는 좌절과 불평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고통받는 학생들이 너무 많다.
마치 매일 웃어주는 사람이 한 번 인상 쓰면 화를 내지만, 평소에 무표정으로 무섭게 있다가 한 번 웃어주면 감동하는 것과 같은 상황과 비슷하지 않을까.
내 능력 이상으로 뭔가를 강요할 때는 굳이 응답하지 않아도 된다.
큰딸이 석박사 연계를 전제로 대학교에서 학부 랩실에 들어갔다. 이번에 학부생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일본 학회를 따라가기로 했다. 본인이 데려가달라고 요청한 것도 아닌데 생긴 기회였다. 그럼에도 출국 날짜가 다가오자 주변의 여론을 의식하듯 교수님이 일본에 놀러 가는 것 아니라는 걸 명확하게 하시면서, 잘 하자고 격려하셨다고 한다.
딸이 그 부담감의 무게로 내게 전화를 했다.
딸의 답답함과 부담스러운 상황과 심정을 다 들어주고는 이렇게 얘기해 주었다.
아무리 기대하는 바가 있어도 넌 너의 모습으로 가야 한다. 그 랩실을 지원한 건 너지만, 뽑아준 건 교수님이고, 일본에 데려가는 것도 교수님의 선택이었을 뿐이다. 너가 따라가는 것이 납득되도록 증명하려고 억지로 애쓸 필요는 없다.
이번 학회는 너가 기획하는 것이 아니니 단순하게 생각하고 그냥 단순하게 그때그때 주어진 일에만 충실해라. 너만의 역할이 있을 거다. 막내로서 실수도 덤벙거림도 너의 몫이다.
너무 처음부터 잘하면 기대감만 높아져서 너가 계속 힘들게 될 것이니.
자신 없는 분야를 걱정하고 신경 쓰는 에너지를, 너가 잘할 수 있고, 할 수 있는 일에 쏟으면 된다.
부담이 안 될 수 없겠지만, 그래서 오히려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너가 평소에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수 언니와 한 방에 묵으면서 더 친해질 기회에 의미를 부여하고, 관광이 아니라도 처음 가보는 외국의 분위기, 음식, 새로운 만남, 지적인 자극 모든 것을 그냥 설렘으로, 좋은 기회로 누리면 좋겠다.
완벽함을 증명하는 일정이 아니라 배움의 기회이며, 그 배움으로 차차 너의 역할을 더 찾아갈 성장과 도약의 투자일 것이니, 도달점 말고 그냥 매 순간의 사소한 성취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좋겠다.
그냥 너다움으로 그 자리에 서길. 우리 가족 중 처음으로 외국에 다녀오는 온 가족의 설렘의 응원까지 다 담아 다녀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