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들이 아직 어릴 때, 졸업 후 나를 찾아오는 제자들에게 밥을 사줄 통장까지 따로 만들어 놓았었다.
제자들은 대개 졸업한 학교에서 과거의 추억을 마주하려는 명분으로 나를 찾았다. 경대사대부고에서는 7년간 근무했기 때문에 졸업생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직전 학교도 여고였고, 남녀공학인 사대부고에서도 7년간 여학생반 담임을 해서 찾아오는 제자들은 모두 여학생들이었다. 그래서 나를 만만하게 보던 후배쌤은 시니컬하게 나의 별명을 "의자왕"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학교를 옮겼어도, 그래서 나를 보러 오는 것은 모교를 찾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나를 보러 오는 학생들도 많았다.
보통 나를 찾아오겠다고 하면 거절하지 않았다. 때로는 10년 이상의 세월을 뛰어넘어 만나주기도 했다.
졸업 후에 은사님을 뵈러 간다고 하니 재수하면서 만난 교육특구 고등학교 출신 친구가 졸업했는데 선생님을 왜 만나러 가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이야기를 찾아온 제자에게 들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교육특구 고등학교를 근무하면서 졸업 후 나를 찾아오는 현상은 이어졌다. 심지어 학교를 옮겼는데도 나를 찾아온 제자들도 꽤 많았다.
졸업 후 선생님을 찾는 것은 지역적인 특성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찾아오려는 제자들에게 우리 반 인원을 미리 알려줬다. 반 학생들에게 나눠 줄 간식을 사 오라는 암묵적인 메시지였다. 물론 무엇을 사 오냐에 따라 내가 사줄 밥의 메뉴가 달라진다고 대놓고 얘기하기도 했다.
그렇게 제자들이 간식을 사들고 오면 내 수업시간의 일부나, 쉬는 시간 등을 활용해서 반 학생들과 인사를 시키고 직접 간식을 나눠주게 했다.
그리고 반 학생들에게도 선언했다. 졸업하고 나를 찾아오려거든 미리 반 인원에 맞게 간식을 사 오도록 하라고. 그러면 내가 밥을 사주겠다고. 조건부로 이야기했는데...
졸업생들의 그 행렬은 재학생 후배들에게 나중에 멋있고 당당하게 후배들에게 간식을 사주면서 베푸는 자리에 서고 싶다는 동기유발 의식이 되었다.
나를 매개로 갖게 된 만남의 소중함이었고, 그 자체로 나눔의 모형이 되었고 기쁨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대를 이어서 자신도 저 자리에 서겠다는 다짐의 기회도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전통처럼 이어져서 이미 나를 통해 대학생이 된 선배들의 간식을 받은 학생들이 그 자리에 섰을 때 명예롭게 간식을 사들고 나를 찾았다. 어느 때부턴가 더 이상 내가 우리 반 간식을 사줘야 밥을 사준다는 설명을 굳이 할 필요가 없어졌다. 나를 찾아올 약속을 잡을 때 아예 우리 반 인원부터 물었다.
그런 전통은 졸업생이라도 학교 출입 자체가 제한되었던 코로나 이후 깨졌다.
이후 제자들은 학교 밖에서 나를 개인적으로 만났다.
졸업생들이 나를 찾을 때 우리 반 학생들 간식을 사 왔지만, 그만큼 내가 밥을 사주었으니 실제로는 내가 반 학생들 간식을 사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쨌거나 나를 개별적으로 찾아온 제자들에게 밥이나 커피를 사주는 것도 비용이 발생하는 일이다.
제자 재회 비용...
이렇게 공식화하기에는 너무 정이 없어 보이지만...
어느 때부턴가 이 비용에 민감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 비용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비용에 대해 민감해졌다.
아내도 딸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전업주부를 벗어나 알바를 하고 있지만 고정수입은 내게서 나온다.
딸들이 초중고등학교 때는 학원을 보내지 않으니 사교육으로 지출되는 비용이 없었다.
누군가는 나의 소신에 박수를 보냈지만, 실은 학원을 보낼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물론 그곳에서 교육적 가치와 투자의 의미를 발견했다면 빚을 내서라도 보냈겠지만, 나의 코칭으로 자기주도학습이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굳이 무리하지 않았다.
지금은 딸들 모두 서울과 수원에서 독립해서 산다.
사립대학교 등록금은 공무원연금 대출로 당장은 해결했지만 딸들이 각각 대학 졸업한 후 2년 후부터 월급에서 매달 상환해야 한다.
따로 자취방을 구해서 월세와 생활비까지 든다.
물론 둘 다 알바를 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한다.
큰딸은 석박사 연계로 랩실에 들어갈 계획이다. 내게 나중에 등록금은 갚겠다고 이야기했다.
부디 안정적인 자리를 잡아서 그러기를 바란다며 선택을 존중해 주었다.
딸들이 집에 없으니 아내와 둘이서 외식하는 것도 재미가 없다.
식비를 줄이는 것 자체가 미션을 이룬 것처럼 기쁘다. 그 덕분에 딸들이 맛있는 걸 더 먹을 수 있을 여유가 생긴 것 같아서.
딸들에게도 선언했다. 아직 시간 여유는 있지만 아빠의 퇴직도 다가오고 있고, 생활 수준이 이 정도이니...
진정한 독립을 이뤄야 한다고...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이제는 제자들과의 재회 비용이 사치처럼 느껴진다.
어차피 한 해가 다르게 나이가 들어가는 교사로서, 맛있는 걸 사줄 테니 찾아오라는 광고를 해도 아이들의 발길은 뜸해지겠지만...
예전처럼 아이들의 연락과 만남에 대한 요청에 대해 반갑게 맞이해줄 자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