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권 문화 연수를 듣고

by 청블리쌤

난 연수 듣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필요한 건 내가 알아서 책이나 내 체험을 통해서 충족할 수 있다는 착각과 교만함으로 가득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갑자기 교사와 학부모 대상으로 강연할 기회가 계속 이어졌고, 난 연수에 참여하시는 분들의 겸손한 배움의 자세와 열정에 늘 압도되었다.

그래서 오히려 강연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자발적으로 연수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 같다.

드디어 작년부터 궁금했던 타 지역 영어선생님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작년과 올해 대구 에듀마켓 연수와 올여름과 내년 겨울 타 지역 1정연수 강사진에 함께 포함되어 있어서 늘 그 존재감에 대해서는 인식하고 있었다.


이번 연수는 대구 중등 E.T(English Teacher) Talk & Share라는 행사의 선택강의였다.

행사장에서 만난 동기와 후배의 "강사로 와 있어야 할 분이 연수를 들으러 오셨냐"라는 말에 머쓱해졌다. 그리고 연수를 듣고 나니 난 그야말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쩌다 보니 운 좋게 강의할 기회를 가졌을 뿐이라는 확신만 들었다.


‘영어권 문화의 실제’라는 강의에서 강사 선생님은 실제로 한 학기 동안 진행했던 수업 사례를 아낌없이 다 풀어 놓으셨다. 그대로 따라 해도 한 학기 커리큘럼이 거의 그대로 완성될 정도의 퀄리티였다.

그 강의에서 느낀 점을 몇 가지 정리해 보려 한다. 많은 것을 배웠지만, 많은 고민과 생각에 잠기게 했던 강의였다.



가르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교사의 전문성은 수업 준비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더 큰 확신을 얻었다.


영어권 문화 과목은 새 교육과정에서 선택과목인 진로과목으로 진행된다. 9등급 상대평가가 아니라 A/B/C 절대평가이기 때문에 소수의 인원 수강에도 불리함이 없다. 그 대신 교사들은 같은 내용을 여러 번 수업하는 것이 아니라 수강인원에 따라서는 반복되지 않는 차시를 진행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평가와 생기부 교과세특 정리도 교사의 몫이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오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교과서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교과서에 얽매이지 않으며 한 학기 전체 과정을 자신만의 커리큘럼으로 전면 재구성했다.

영어는 진도교과가 아니기 때문에 수준과 단계에 따라 전체 교육과정 재구성이 타 교과에 비해 다소 자유롭긴 하다. 강사 선생님이 제시한 방법이라면 교과서가 없어도 수업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며, 이는 교사의 전문성과 자율성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선생님은 교과 재구성 원칙을 아래와 같이 소개했다.

교과서와 자료집의 연결고리

내가 꼭 다루고 싶은 가치

실생활에 유용한 것

조화로운 스토리텔링

그러면서 이 수업구성 과정이 제일 오래 걸리고 가장 고통스럽지만 너무나 재미있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선생님의 열정의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디테일한 부분까지도 의미 있는 작업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난 교육은 맥락의 연결이라고 믿고 있다. 교과 내용의 맥락은 물론, 타인에 대한 맥락을 연결하는 것도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배우는 과정이라고 믿고 있는데 이 분은 그걸 삶으로 교과에 녹여냈다. 교과서를 기본으로 하되 참고하는 자료집과의 맥락을 연결하고, 이왕이면 학생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인생의 소중한 가치를 녹여 내고, 실용적인 내용을 담아 학생들의 흥미와 관심을 극대화하고, 그 모든 걸 하나의 이야기처럼 서사를 만들어 갔다. 그래서 한 학기 수업진행이 한 편의 드라마나 소설이 완결되는 한 편의 예술 작품 같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경이롭고 감탄스러웠다. 수업 매시간 진행되는 차시가 단편적인 것들의 나열이 아니라, 스토리처럼 연결되며 유기적으로 확장되고 있었고, 아이들이 궁금해할 만한 호기심의 흐름도 놓치지 않았으며, 그 과정 중에 학생들이 진짜 언어와 영어문화를 직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을 그냥 그대로 수행평가와 교과목세특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래서 진정성의 힘이 드러났다.

많은 선생님들이 감동하고 감탄을 이어가는 그 진정성의 힘을 생각하니 계속 연수 강사로 초청받으시는 게 당연했다. 단, 먼 거리를 이동하셔야 하는 부담은 당연하지 않을 것인데 그건 선생님의 열정페이와 사명감으로 채우고 있는 듯했다.

그 수업의 진행 과정에는 교사 자신의 삶에서 만나는 원서, 영상, 영화, 시사적 이슈 등이 하나의 삶처럼 다 어우러져 있었다.


나도 늘 주장하고 있는 "삶으로 하는 교재연구"인 셈이다. 영어수업이지만 우리말로 더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다면 제한을 두지 않고 자료를 활용했던 것도 아이들의 접근성 면에서 좋았다.

정말 매시간 제대로 수업을 진행하고 과정평가가 이루어져서 학생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를 법한데도 학생들이 관심을 가질 내용들을 잘 끌어오고, 실생활에 바로 활용할 수 있는 흥미로운 과제를 제시하고, 그다음 편을 자꾸 궁금하게 해주니 아이들은 힘든 것을 잊고 과정에 몰입하는 것처럼 보였다.


과제는 만만하지 않지만 이뤄낼 때의 성취감을 선물로 느끼게 해주는 것 같았다. 결국은 학생들 스스로 해내도록 guide 해주는 것도 교사의 역량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학생들이 해내고 나면 성취감 외에도 진짜 실력이 늘기도 하고, 흥미와 관심이 꾸준한 학습의 동기와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니 수업 몇 시간 이상의 더 큰 의미가 있어 보였다.


에듀테크를 활용하지만, 구글클래스룸, 패들렛, 캔바 외의 다른 도구는 학생들에게 설명하고 익히게 하는 시간이 아까워서 가장 강력한 위의 세 가지 도구만 사용한다는 원칙도 인상적이었다. 선생님에게는 그 정도로 그 교육과정이 긴밀하게 꾹꾹 눌러 채워져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거니까.

교과에서 문화와 삶을 보여주었고, 교사의 가치를 전달하면서도,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고 교사의 개인 취향이나 가치관을 강요하지 않는 기법도 인상적이었다.


배움은 지식을 넘어서 바람직한 가치관 교육도 이뤄져야 하는 것이고, 학교 수업을 통해 학생들은 배려와 이해의 자세를 배우기도 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하는 기회도 되었다.


수업구성의 예를 보면,

지도를 통해 미국 도시 익히기

미국으로 가는 항공권 분석 - 항공 기내 안내 방송 대본을 보고 각자 녹음하여 패들렛에 올리기

입국 수속 실습 - 실제 질문과 답변 연습

미국이 강대국이 된 이유? 총균쇠 등의 자료로 구성하여 순차적으로 탐구하기...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감탄할 정도로 기발한 연결고리로 긴밀하게 구성되었는데, 그 과정 중에 지리, 역사, 문화, 사회학, 통계, 영화, 원서, 영상 자료 등이 동원되었다. 선생님만의 고유 콘텐츠를 무단으로 올릴 수는 없어서 극히 일부분만 소개 드리는 걸 양해해 주시길...

선생님의 교과목 재구성 수업이 진행된 후에는, 학생들 자신만의 스토리를 구성하여 개별 발표하면서, 서로 경청하면서 참여하는 것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한 학기 과정을 다 마친 학생들의 성취감과 뿌듯함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너무 이상적인 수업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증거를 보고 감탄을 넘어선 존경과 뜨거운 열정이 자극되었지만...

난 여전히 현실의 벽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영어성경을 공부한다면 영어와 성경 중 어디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한 쪽에 치우치면 한 쪽은 소홀하게 마련인데... 두 가지를 한 번에 잡는 것이 가능한가? 늘 가져왔던 고민이다.

국어국문학과에서 한국어 말하기, 쓰기를 가르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대학의 영어영문학과는 영어 실력이 늘도록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실용영어 실력은 상경계 학생들이 더 우수할 수도 있다. 영어영문학은 영어를 매개로 문학과 어학을 배우는 것이다. 어학도 실용적인 말하기와 쓰기능력 향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어의 심층구조 이론을 지식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영어권 문화 과목은 영어와 문화 중 어디에 더 초점이 있을 것인가? 영어권 문화 등 선택 진로과목은 수능에 직결되는 과목이 아니지만, 과목의 성격에 맞는 문화보다 수능 대비를 위한 영어실력 향상에 더 초점을 둬야 할 것 같은 나처럼 평범한 현실 속 영어교사의 고민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물론 강사 선생님 같은 기획력과 추진력과 열정이 있다면 고민할 이유는 없을텐데ㅠㅠ


강사 선생님의 말씀대로 영어권 문화는 지리학에 대한 이해가 중요할 수 있다. 영어를 매개로 배우면 더 좋겠지만, 아니라면 영어권 문화를 배우게 되었을 때 영어학습에 대한 동기유발 외에 시험영어 대비 방향에 현실적인 도움이 될 것인가는 내게 주어진 과제와 같은 고민이 될 것 같다.


고등학생들은 내신과 수능 대비만으로도 늘 시간에 쫓기는데... 거기다 학생부종합전형의 경우 생기부에 대한 부담이 큰데... 이렇게 영어권 문화 수업을 하면 개별화된 세특으로 학생부종합전형에 실제적인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고교학점제 정착으로 내신조차 절대평가가 되지 않는 한, 학생부 반영이 갈수록 제한되고 줄어드는 현 상황에서는 내신성적이 수시에는 결정적인 요인인데...


이미 기본기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즐거운 활동이 될 수 있고, 세특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겠지만... 기본기부터 영어실력을 쌓아야 하는 학생들에게는 어떤 실제적인 도움이 필요할지...

결국 내신은 공교육, 영어실력은 사교육이라는 공식 같은 현실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미국에도 English라는 과목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English와는 분명 다르다. 그들은 모국어지만, 우리는 외국어이기 때문이다.


원서 읽고 하는 활동은 어느 정도 원서를 해독할 능력이 전제가 된다. 아이들의 외국어 문해력이 바탕이 된다면 다양한 이상적인 활동은 현실적인 좋은 방안일 수 있지만, 학교 현장은 그렇지 못하다.

물론 수업시간에 그 기본기를 어차피 다 채워줄 수는 없다. 그래서 난 평상시 영어단어시험 및 교실밖 학습코칭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소중한 가치를 심어주기 위해 실력향상에 도움이 될만한 단계별 영어코스에 감동과 감성과 재미를 담은 명문장을 포함시키려는 소심한 노력만 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수업을 하고, 영어멘토링을 하면서도 늘 고민이 멈추지 않는다.


중학교에 와서 더 차분히 기본기부터 할 수 있는 환경임에도 오히려 더 좌절하고 있다. 아이들의 영어 격차가 오히려 고등학교보다 더 크다. 거기다 공부를 꾸준히 해야 한다는 절실함도 의욕도 부족하다. 영어를 포기했어도 다른 과목 절대평가 성적으로 고등학교 진학도 가능하다. 영어 실력이 안 쌓였어도 교과서 암기만으로 어느 정도 성적을 받을 수 있어 자신의 실력 부족에 대한 위기감도 없으니, 내가 하는 이야기는 저세상 잔소리처럼 공허하게 울리기도 한다.


훌륭한 선생님의 강연을 들으면 주눅 들거나 도전 의식을 갖거나 둘 중 하나인데, 내 경우는 전자였다.

교육의 가치와 본질은 분명 존재하지만, 개별적인 만남에서는 그 본질조차 각기 다른 모습이어야 한다. 가치의 상대성이 아니라 방법과 접근 방향의 차별화 면에서 그렇다.

아무리 훌륭한 사례라도 어설프게 흉내 냈다가는 오히려 역효과와 부작용을 겪을 수도 있을 것이니 용기를 내서 도전을 하되 나의 호흡과 속도에 맞춰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교육자의 자리에서는 끝없는 고민이 필연이다. 그리고 교재연구도, 인성교육도, 상담도 그 어떤 영역의 교육활동도 확정된 사실을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은 개별화 과정이기 때문이다.

강사의 자리에 서 보았고, 또 서게 될 나는 강의를 통해 강사의 자질과 노력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적어도 교육분야의 강사는 강의 기교나 언변을 통해 감동과 영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확실히 알았다. 그저 삶의 모습 그대로, 진정성 있는 메시지 전달이 최고의 강의라는 사실...

그리고 이런 훌륭한 강사 선생님들은 힘드셔도 여기저기서 이런 귀한 가치를 널리 전파하셔야 한다는 것...

이런 연수는 각자 고민의 해결이라기보다 고민의 시작점으로서의 중요한 의미일 것이라는 것...

그래서 교사 한 분의 사소한 변화가 교사가 만나는 무수한 학생들의 삶에 미칠 영향을 미칠 게 될 것이라는 것...


이런 생각들로 가슴이 뜨거워졌다.과분하게도 1월에 우리 지역과 다른 지역에서 1정 연수를 하게 되었다. 더 잘하려고 애쓰기 보다... 내 삶의 모습에 더 솔직해지고 있는 모습 그대로 진심이 전달되기를...

keyword
작가의 이전글블로그/ 브런치에 글을 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