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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블리쌤 Mar 31. 2023

학생들의 만우절 이벤트

만우절이 토요일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출근했다.

그러나 출근하자마자 학생 한 명이 각 반의 학반 푯말을 바꿔 달겠다고 선생님들께 미리 보고를 했다.

스포를 한 만우절 이벤트라니... 참 착한 아이들이다.


난 반푯말에 신경 쓰지 않고 학반에 들어갔다. 우리 반 학생들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앞 반 담임선생님 한 분이 우리 반에 오셔서 반 학생들을 찾았다. 바로 옆반 학생들과 반을 바꾸었는데 그걸 모르고 먼 반부터 찾으러 오셨던 거였다.

그 외에 특별한 사건은 없었고, 1교시 시작하기 전에 학생들은 푯말을 원위치했다. 만우절 당일은 아니지만 아이들은 작은 추억을 원했던 거였다. 그 시도 끝에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예뻐 보였다.


5교시에 수업을 들어갔는데 학생 한 명이 불 꺼져 있는 상태에서 문 바로 앞에 서있다가 내가 들어가니 깜짝 놀랐다.

난 보통 수업 종 치기 전에 들어가서 준비를 하고 있다가 종이 치면 그제야 들어오는 학생들을 세워둔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의 마지막 몇 분을 포기하고 교실에 앉아서 나를 기다린다.

그런데 종이 치고 두 명의 남학생이 들어왔다.

서 있던 여학생과 남학생들에게 늦은 연유를 물으니, 만우절 이벤트를 준비 중이었는데 내가 너무 일찍 왔다고 대답했다.그래서 내가 나갔다 들어올 테니 이벤트 준비까지 몇 분을 주면 되겠냐고 물었다. 5분이라고 대답한 학생 뒤에 45분이라고 대답한 학생이 있어서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래서 3분 후에 다시 들어올 테니 재미없으면 가만 안 둘 거라고 말하고 교실을 나갔다가 3분 후에 돌아왔고 아래와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나는 아이들의 뿌듯해하는 표정을 발견하고 힘껏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위의 사진에 보이듯 아무 말없이 교탁 앞에 슬며시 누웠다.

아이들은 웃으며 좋아했다. 자신들의 애씀을 무안하지 않게 한 보답 같은 웃음이었다.


원위치하라고 하니 아이들이 반발했다. 사진과 영상으로 남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지켜야 할 초상권도 있고, 난 온라인 스타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추억은 머릿속에 담는 것이지 사진에 굳이 담아둘 필요 없다고 하면서.

그러니까 사진이나 영상에 선생님이 좋아하는 뉴진스가 "좋아요" 해줄 거라며 나를 설득했다. 난 못 이기는 척 설득당했다.

나중에 사진과 영상을 보니 적당히 얼굴이 다 가려져 있어서 초상권 걱정 없이 온라인에 올려도 될 정도였다. 맨 뒤의 학생이 어차피 얼굴도 안 나오니 자신이 사진과 영상을 찍겠다고 자원해서 찍은 사진이고, 아래 영상은 수업 설정 짧은 영상이다.


"milk는 미역이다"

최근 발음 강의하면서 받침으로 쓰이는 "L"의 "dark L" 사운드를 쉽게 설명해 주었다. 우유는 "밀크"보다 "미역"에 가깝다고... 아이들이 최근 수업에서 찝어낸 킬링포인트다.

(영상에 학생얼굴이 노출되어 업로드했다가 바로 내림)


짧은 이벤트 후에 아이들은 더 열심히 수업에 참여했다.


수업 후 사진과 영상을 학년 담임쌤들과 공유하니, 한 선생님이 쓰러져있는 듯한 사진 속의 내모습에 이런 댓글을 남기셨다.


"심폐소생술 시급한 블리쌤~"


종례하러 들어가니 이벤트한 반 학생들이 우리 교실에 앉아 있었다. 우리 반 학생들과 사전에 이야기해서 반을 바꾼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이벤트의 연장선상에서 기대감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난 놀라는 표정을 지은 후, 이내 태연하게 종례를 진행했다.

"오늘 모처럼 대청소하기로 했죠? 모두 열심히 청소합시다."

너무 깨끗하다는 아이들의 아우성에 그저 수긍하고는...

"월요일 아침 단어 시험, 독서 준비, 플래너 챙겨오는 거 잊지 맙시다"라고 하니까 아이들이 꼭 챙겨오겠다고 힘차게 대답했다. 어차피 자신들의 일은 아니니까...

아이들에게 만우절 이벤트 영상 선생님들이 너무 재미있어하셨다고 말해줬다. 아이들도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만우절은 학교에서 학생들이 장난의 선을 어디까지 그어야 할지 고민하는 날이다. 학생들의 이벤트에 어떻게 반응할지 장난의 허용범위가 어디까지인지 경력이 쌓인 교사들도 난감해하기도 한다.

대구여고에서 오늘 이벤트 같은 장난을 했던 반이 있었다. 그때 책상과 의자도 되게 무거웠을 텐데 난 어쩔 줄 몰라 머뭇거리다가 그냥 수업하자고 했었다. 오늘 나의 행동은 그때 학생들의 무안함에 대한 뒤늦은 반응이었다.


만우절을 영어로 April Fools' Day라고 한다. 선을 어느 정도 지킨다면 모두가 함께 잠시 바보가 되어보는 경험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바쁜 일상과 쉼 없는 지적인 활동과 진지한 삶에서 이런 가벼운 멈춤의 시간이 주는 행복은 의외로 너무 컸다. 아이들 추억 속의 한 컷이 되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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