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블리쌤 Jul 28. 2023

학부모/학생 민원을 대하는 교사의 자세

나이가 들었다고 민원을 가볍게 받거나, 너끈하게 극복할 수 있는 내공이 쌓인 것이 아니며, 여전히 아프고 두렵고 불안하지만... 극복할 비결은 없지만...

나의 경험으로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결국 나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하다.

물론 악성민원까지 커버할 수 없고, 일반화하기에는 고등학교에만 주로 있었던 개인적인 이야기와 주관적인 의견일 수 있으니 감안하시길...



1. 기다림

교육활동에서의 성과와 열매는 기다림이 필연적 과정이다. 그 기다림이 힘든 것은 그 끝을 앞 수 없기 때문이다. 확실한 기약이 있다면 기다림이 길어도 소망으로 충전하여 참아내기 쉬울 것이지만, 보통은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심지어 어떤 기다림은 그냥 끝이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기다림에는 어느 정도의 포기가 필요하다. 즉,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기다림의 시작은 내가 정할 수 있지만, 그 끝은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대신 확신이 필요하다. 완성과 해결의 단계까지는 아니라도 적어도 지금 같지는 않을 거라는...

괴로울수록 이 지점이 바닥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 물론 더 내려갈 수도 있다. 그래도 바닥은 있다. 바닥을 찍었다면 올라갈 일이 남았다.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오를 수는 없지만, 시간의 흐름에 맡기면 무조건 지금보다는 좋아질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반응하도록 스스로 주문을 외울 필요가 있다. 추락의 지점에서 반등의 희망을 품는 건 생각보다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해뜨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고 한다.

좌절과 아픔을 겪는 학생들에게 자주 인용하는 영어문장이다.


When things become so bad that they cannot become worse, they usually begin to get better.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나빠지면 대개는 나아지기 시작한다.


어쨌거나 시간이 지나봐야 안다.


그 기다림에는 점점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도 포함된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으니 나이가 들었다고 안심할 일은 아니지만 학부모님들도 교사의 나이에 따라 반응이 다소 달라지기도 한다.

젊은 나이에 담임하면서 학부모회의가 제일 부담스러웠다. 그렇지 않아도 쑥스러움이 많아 나보다 한참 연장자인 학부모님들 앞에서 주눅들 수밖에 없던 젊은 시절을 보냈다. 세월이 한참 흘러 학부모와 동년배가 되고 이제는 연장자가 되어가는 지점이 되니 젊을 때의 부담은 이제 겨우 조금 덜게 되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지금보다는 조금씩 더 편해진다.


교사는 학교에서는 학생들만 만나지만, 결국 학부모님들과도 어떻게든 연결된다.

뜻하지 않게 온오프라인에서 학부모 대상 강연의 기회를 갖게 되고, 교육현장에서 느낀 경험을 나누면서... 건강한 학부모와 교사의 관계는 아이에 대해 같은 고민을 공유하며 함께 소통하는 관계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난 운 좋게도 그런 분들을 많이 만났다.


교사가 처하게 되는 환경과 사람들과의 만남은 교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대개 운명처럼 주어지므로... 교사가 겪게 되는 어려움은 교사의 노력이 아닌, 운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일 때가 많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는 것은 금물이다. 혹 실수가 있었다면 회복의 여지는 있다. 회복까지 걸리는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나도 그런 아픔에서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상대적으로 운이 좋았기 때문에, 그래서 힘들어하는 후배교사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든다.



2. 그냥 인정해버리기

교사 자격이 없다고 누군가 말하면 그냥 그렇다고 인정하는 거다.

어차피 자격을 떠나서 완전한 인간은 없고, 완전한 척 위선에 빠져 있을 필요도 없다. 오히려 학생들에게 자신의 부족한 인간적인 모습을 솔직히 드러내면 더 큰 교감이 형성되고 관계가 더 친밀해졌다. 호감은 완벽함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감정이다. 완벽하게 보이는 사람들, 특히 매력을 타고난 사람들에게는 호감보다는 질투를 느낀다고 한다.

어쨌거나 교사도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학생들에게도 큰 힘과 위로가 되기도 한다. 함께 성장하며, 교육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서로가 체험하게 된다.


사실 교사로서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위선이다. 그렇게 본다면 완벽과 거리가 먼 우리는 교사가 될 자격이 없고, 그래서 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아이들 앞에 서야 한다. 그래서 아이들 앞에 서는 매 순간이 감격이고 감동이며 은혜의 무대가 된다. 완벽하지 않는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해 주고 받아주는 학생들 덕분에 교사는 더 노력하고 애쓰게 된다. 그러니까 교사도 성장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서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서서 완성을 지향하며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교사의 자격이 없다고 하거나,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비판을 한다면, 서로 예의를 갖추어 소통하면 더 좋았겠지만, 아니라도 그냥 그렇게 보실 수 있다고 받아들이면 된다. 그리고 이미 치열하게 노력하고 애쓰고 있으니 더 노력하겠다는 걸 있는 모습 그대로 스스로 다짐하면 된다.


그리고 감정이 앞서서 최소한의 소통에 실패했을 때는 누군가 강경한 입장이 되기 쉽다. 학생들도 힘으로 누르려면 더 강하게 반발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교권이 법적으로나 시스템상으로 온전하게 보장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교사로서 강경한 입장이 되어 이기려고 애쓰거나, 교사로서의 자신의 정당성을 끝까지 입증하려 하다 보면 상황이 자꾸 악화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나의 정체성과 감정을 현실적인 사안과 철저하게 분리하도록 애쓰는 것이 우선일 수 있다.

"Why pay more? It's good enough."

"왜 더 비싸게 사는가? 이 정도면 충분한데."

No Brand Burger에서 사용되는 문구다.


교사는 진심을 다해 학생을 대할 때가 아닌, 사적인 감정이나 억울한 일을 당할 때는 자신을 교사가 아닌 그저 No Brand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더 신경 쓰지 말고, 더 애쓰지 말고... 더 좋아질 필요도 없이, 그냥 충분한 거기까지만... 만족을 모르는 지속적인 민원이라면 더 많은 부분을 감수하며 맞서야 하겠지만...


이미 발생한 상황을 마주하게 될  때는, 그저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의 가치에 대한 평가나 판단 없는 No Brand의 느낌이면 좋을 것 같다.

진심이 통하지 않을 땐 진심만 쏙 뺀 다른 페르소나 즉, 다른 자아로 서는 것이다. 평범한 인간으로 지내다가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으로 변신하면 개인적 교감은 배제되고 공적 책임자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학생들을 만나는 교육활동에는 자신의 애정과 진심이 개입될 여지가 충분히 많을수록 좋지만, 이런 사안에 대해서는 오히려 사적인 영역을 배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건 학생들과의 교육활동을 지키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물론 다 수용할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교사도 어느 정도의 선을 지키려고는 해야 하겠지만... Never take it personally.


2-2 모두가 성장하는 과정 중에 있음도 인정하기

학생도, 학부모도, 교사도 입장과 처지는 다르지만 모두가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교육에 교사가 필요한 것이고, 교사의 전문성이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다.

알아서 다 잘하는 아이들만 만나면 교사의 존재감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러나 배우려고 하지 않고,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 선택과 권리를 인정해 주는 거다. 단지 타이밍과 내 교육스타일이 다소 안 맞을 뿐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여전히 서로에게 다른 타이밍과 다른 만남에서 배움과 성장과 만족에의 희망이 있을 거라고 믿으며.

교사로서 노력은 계속하겠지만 유독 누군가에게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음도 인정하는 거다. 노력하고 있다면 그게 능력이나 자격 문제로, 또 정체성의 위기로 생각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3. 소문 내기(?) - 부디 혼자 다 감당하려 하지 않기

민원을 겪거나 수업 외적으로 일어나는 사안이 꼭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혹 자신의 실수였거나, 잘못이 있더라도 악한 의도로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면, 특히 좋은 의도로 한 일임에도 오해가 생기거나 억울한 일이 있다면 혼자서 감당하지 말 일이다. 선배교사는 어떤 형태로든 비슷한 일을 겪어 오신 분들이니 솔직하게 털어놓고 얘기해 본다.

그 일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동지를 얻은 든든함이 있고 실제로 선배교사들이 큰 도움을 주시기도 한다. 체험에서 나오는 현실적인 조언은 실질적으로 큰 힘이 된다.


혹 잘못한 사안이 있다면 잘못을 인정하고 대가를 치르면 된다.

해결할 사항이 아니라 징계에 해당되는 일이라면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개선과 회복의 기회를 찾으면 된다.

누구나 다 실수를 하게 되어 있으며, 나이가 든다고 해서 실수나 오류가 면제되지 않는다.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지점에서부터 회복이 시작된다. 절대 숨기거나 혼자서 감당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사소한 일이라도 발생하면 부장님과 교감, 교장쌤께 알려야 한다. 임의로 별일 아니라고 판단해서도 안 된다. 과연 힘이 되어주실 수 있을지를 따질 필요도 없다. 이야기하는 순간 함께 고민하는 운명 공동체가 되고, 더 이상 혼자만의 책임이 아니게 된다.



4. 그래도 진심 다하기

<그레이 아나토미>라는 미드에서 봤던 장면을 소개하며 코로나 시국에 학년부장으로서 쌤들께 이런 부탁을 드린 적이 있다. 어차피 잘 안될 거라 생각하지 말고 그저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출처 : https://blog.naver.com/chungvelysam/221989936366

...

뜬금없이 미드 장면 하나

소생 가망이 없는 환자의 심폐소생을 중단하려던 인턴에게 펠로우가 환자가 결국 사망하게 될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면서도 완전히 사망이 확인될 때까지는 죽을힘을 다해 애쓰고, 절대 멈추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납득을 못하는 인턴에게 펠로우는 환자보호자를 만날 때 그 이유를 알게 될 거라고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환자 사망 후 그 인턴은 보호자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했지만 숨을 거두셨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며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의사의 양심과 책무성을 지키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

우리의 최선은 면피나 학부모민원 대비, 혹은 전시행정의 효과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으로 교사로서의 우리 스스로의 당당함과 품위와 완결성을 지켜가는 일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학생들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학생들에게 상처를 받으면서도 가망 없어 보이는 심폐소생과 같은 교육활동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가끔씩은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지요.

...


결과까지 보장하거나 약속할 순 없지만 늘 진심과 최선을 다할 수는 있다. 다른 이가 몰라줘도 스스로 당당할 수 있는 힘이 된다. 불가피한 실수나 아직은 덜 준비된 역량도 있겠지만, 스스로에게 이렇게 자문해 본다. 지금 나만의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늘 진심인가? 그 질문은 민원발생 여부와 관계없이 늘 점검해야 할 교사의 자세이자 역량이다.

다른 교사와 비교했을 때 평균 이상이라는 잣대보다 나만의 진심을 다했는지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학부모님들도 그 기준을 존중해 주셔야 한다. 젊은 쌤이 더 좋다, 경력이 많아야 더 좋다 이런 식으로 판단하지 말고.


저경력쌤께 이렇게 조언한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진심으로 학생들 옆에 계셔주시면 된다고. 어떤 종류의 만남이든 학생들에게 배움과 성장이 일어나니, 연륜을 따라 하기보다 그 나이가 아니면 해줄 수 없는 선생님만의 역할을 해주시면 된다고.

덜 자상한 담임쌤께 불편함을 느껴도 그래서 아이들은 오히려 자기주도성을 더 배울 수도 있다고. 그게 우리가 추구할 방향은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너무 혼자서 다 해결하려는 부담을 지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5. 본질에 시선 두기 - 학생들만 바라보기

교사 존재의 이유이자, 살아가는 힘이 되는 아이들만이 유일한 처방이다.

학부모민원은 시작부터 이미 해결이 어려운 문제다. 그 자체로 해결이 어렵거나 누군가 상처를 받아야 한다면, 그건 보통 교사의 몫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아픔과 비난을 자신의 것과 일체화시키지 않아야 한다.


우린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힘든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힘겨운 채로 아이들을 만난다면, 그 아이들은 누가 지킬 것인가?

우리가 견뎌내야 하는 이유도 아이들이다. 아이들과의 순전한 만남을 보장받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라고 위로하면 된다.

학생에게 상처받아 그 학생만 마음에 자리하고 있다면, 그 외의 학생들에게 미안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면 된다. 목표에 시선을 고정하면, 주변의 것은 덜 보이게 되어 있다. 주변의 것을 다 해결하고 나서야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리겠다고 생각하지 말자.

목표에 시선을 두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흔들리고 넘어져도 가던 방향으로 계속 전진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목표에서 시선이 멀어지고 나면, 길을 잃고 헤맬 것이며, 일어설 명분도 이유도 느끼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목표는 고민할 것 없이, 우리가 만나는 아이들이다.

결국 우리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며,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교사인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다수의 학생에게 상처받았을 경우 교사로서의 존재 자체에 타격을 입고, 자신이 필요한 존재인지 부정적인 생각을 이어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드러나는 현상 같은 일로 자신의 존재를 일반화해서는 안된다. 그럴수록 정말 나를 필요로 하지만, 표현조차 못 하는 아이들을 더 돌아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야 한다. 아이들이 그걸 느끼지 못하는 저학년이라면, 아이들의 표현 이면에 있는 나 자신의 존재의 필요성에 대해 묵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격이 있고 없고를 생각하지 말고. 그건 나를 잘 모르는 주변 사람들이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니...


어차피 우리는 남들처럼, 혹은 훌륭한 모습을 갖춰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맞는 옷을 입고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자신만의 진정성과 진심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교육활동은 미비해 보이고 초라해 보이지만, 그 씨를 뿌리는 과정 이후에 거두어들일(그것도 우리가 거두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서 학생들 스스로 거두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 결실을 확인하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다) 엄청난 결실을 기대하고 소망하면 된다.

아이들은 누구로 인해 자신들이 성장했는지를 일일이 따져가며 기억하지 않겠지만, 진심으로 뿌리는 우리의 애씀은 단 하나도 허공에 흩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밀알처럼 그렇게 헌신하는 존재다. 나 자신의 성취나 만족감보다 아이들의 성장과 행복에 우선순위를 두는 존재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

일단 아이들을 지켜주기 위해 우리부터 산소마스크를 쓰고 나서 아이들을 돌보아야 한다.

우리의 육체와 마음의 건강이 회복되고 유지되어야 아이들을 지킬 수 있다.

우리 자신부터 돌보는 것은 이기적인 행위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헌신의 증거여야 한다.


문득 아래 시가 떠오른다. 나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아내를 떠올리며 포스팅했던 시인데...

https://blog.naver.com/chungvelysam/221398583882

아이들을 위한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To read in the morning and at night  - Bertolt Brecht

My love

Has told me

That he needs me.

    

That's why

I take good care of myself

Watch out where I'm going and

Fear that any drop of rain

Might kill me.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 베르톨트 브레히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내가 필요하다고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잘 보살핀다

가는 길을 조심하여 살핀다 그리고

어떤 빗방울 하나라도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워한다


작가의 이전글 학교에서 일잘러 되기 5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