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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블리쌤 Aug 02. 2023

휴양지에서 느낀 사소하지 않은 행복

난 좋은 아빠이자 남편이었는지... 이런 의문이 들 때마다, 아직 아내와 어린 딸이 잠들어 있는 새벽에 집을 나서면서 학교에서 열정을 다했던 젊은 날들이 떠오른다.

30대 초반까지 근무했던 첫 여고에서 난 젊음의 열정을 다 불태우려 했었던 것 같다. 나를 지켜보던 선배교사가 내게 교사 1,2년 하고 그만둘 거 아니라면 체력 안배하면서 적당히 해야 한다고 조언하기 까지 할 정도로 내겐 브레이크가 없었다.


첫 여고에 부임하던 해에 만으로 20대 끝자락이었고, 첫째 딸은 아직 돌이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난 내가 학생들에게 무엇이든 다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비장함으로 학생들을 대했다. 담임으로서도, 교과교사로서도... 나의 상담은 전교생을 대상으로 했다. 토요일 오후에는 학생들의 상담 이메일에 답장하는 데 시간을 보낸 적도 많았다. 심자 감독을 하면서도 상담을 해주었고, 모든 아이들을 진심과 친절로 대했다.

고3 담임을 계속하다 겨울방학 예비 고3 학생들 보충수업할 때는 신청하는 모든 학생들과 일대일로 상담을 해주기도 했다. 


나의 수업과 상담은 안녕했는지? 아니었을 것이다. 연륜도, 경력도 덜 쌓여 있어 학생들이 원하는 답을 명확하게 줄 수 없었을 것이고, 수업도 숲보다는 나무를 바라보게 하는 수준이었을 것인데... 그래서 난 그 부족함을 젊음의 열정으로 메꾸려 했는지 모른다.


물론 난 평소에 칼퇴로 유명하긴 했다. (맨날 칼퇴한다고 뭐라하던 그당시 제자가 애엄마가 되어서 내게 그때 내가 칼퇴했던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며 미안해하기도 했다.) 학교에 머무는 동안에 최선을 다하고, 상담이 필요한 시즌에는 남아서 학생들이 불편하지 않게 해주었을 뿐. 그래서 학교에 있는 시간에 더 열심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집이 가까워서 학생들이 날 반기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못 하고 불쑥불쑥 드나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고3이라면 추석 연휴 때도 자습을 했던 그 시절, 고향에 내려가기 전 아침 일찍 바나나단지우유를 사들고 아이들 보러 갔다가 다리 깁스를 했던 사고보다 사건에 가까운 에피소드도 기억난다.


둘째가 태어났던 해에는 고3 담임하면서 수시원서를 한창 쓰는 기간이어서, 새벽에 아이가 태어난 기쁨을 잠시 함께 하고는 휴가 기간임에도 비공식적으로 학교에 가서 학생들과 상담하고 원서 쓰는 걸 봐주기도 했다.


고3 담임하면서 수능을 친 날에는 반의 모든 학생에게 다 전화를 했다. 궁금해서 다그치듯 결과를 묻기보다 속상한 얘기 들어주고, 수고했다고 격려해 주었다. 어떤 학생은 채점하는데 10번까지 하나도 안 맞아서 울고 있길래, 짝수형으로 응시하고 홀수형 답으로 채점하고 있다는 걸 일깨워주고 안심하여 함께 웃었던 기억도 있다. 지금은 수능이 목요일로 확정되었지만, 수요일인 시절에 수능 친 반 학생들에게 전화를 하기 시작했는데, 딸 유아세례로 수요예배를 참석해야 해서, 교회로 가는 택시 안에서도 반 학생에 이게 전화를 돌렸다. 이미 시작한 전화를 모든 학생들에게 다 돌려야 한다는 스스로 정한 기준에 따른 책임감 때문이었다. 아내는 그 일로 두고두고 섭섭해했다. 유아세례 받는 축복이 날에 온전히 아이에게 집중하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나의 교만이었던 것 같다. 모든 학생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명분으로 내가 그들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자기만족 속에 살았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에게 받는 관심과 인기가 나의 사랑과 열정의 결실이라고 착각하기도 했다. 

아이들의 모든 걸 내가 다 책임질 수 있을 것처럼 행동했다.


그 노력과 애씀이 의미 없다는 후회는 아니다. 난 그래야 했고, 많은 학생들이 나의 그런 관심과 노력에 고마움을 표현했다. 아이들은 성장하고 자랐지만, 사실 그건 내가 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아니었어도 아이들은 성장했겠지만, 난 그 성장과 발전에 나의 지분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흐뭇했던 것 같다. 난 그런 교만한 젊은이였고, 관종이기도 했다. 도무지 가만히 있질 않고 뭐라도 하려 했으니까.


칼퇴를 자주 하면서 난 가정에서도 내 역할을 잘 했다고 생각했다. 술을 전혀 마시지 않으니 정해진 회식 외에 내가 일부러 선생님들의 친교 모임에 낄 이유도 없었고, 감사하게도(?) 선생님들도 나를 굳이 끼어주지 않았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내가 지역을 옮기는 바람에 교류가 끊겼고, 대학 때 친구들은 대부분 여사친들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서로 따로 만나거나 연락하기 애매한 상황에서 난 일찍 결혼한 후로 아내와 딸들하고만 친구처럼 지내고, 학교의 학생들과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부여하며 살았다. 난 사교적이지도 않아서 굳이 친구를 만드는 것에 아쉬움이 없었다. 교회에서도 만남이 제한적이었다.

내게는 학교와 가정, 그리고 교회뿐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더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집에 와서는 거의 피곤함으로 딸들이 어렸을 때 잘 놀아주지 못했고, 큰 딸 태어난 이후 고3 담임을 5년간 연속으로 하면서 체력과도 싸워야 했다. 둘째 딸의 어린 시절에 아빠는 피곤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딸들은 아빠를 잘 따라줬다. 걸음마를 늦게 배운 대신에 배치기에 능했던 둘째 딸은 아빠가 퇴근해서 집안에 들어오는 순간 배치기 신공을 발휘해 광속으로 내게 달려오며 반가워했다. 아빠의 어설픈 인형놀이나 보드게임 등 사소한 놀이에도 아이들은 즐거워했다. 

지나고 생각하니 난 좀 더 힘을 냈어야 했고, 아이들이 사소한 즐거움을 함께 했어야했다ㅠㅠ


그래서 특히 열정적인 젊은 교사들에게 그래서 이런 말을 해준다. 너무 열심히만 하지 말라고. 자신의 것부터 더 챙겨도 된다고. 때로는 자기만족을 위한 활동인지, 진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건지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너무 다 책임지려하지 말라고. 교육의 성과에 대해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그렇다고 후회한다는 건 아니다. 난 그 당시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최선을 다했을 거니까. 그리고 내 조언을 듣고도 젊은 쌤들은 젊음의 열정을 누그러뜨리지 않을 것이다. 그게 젊음의 특권이기도 하니까.


내 나이가 되어서까지 젊었을 때처럼 할 수는 없다. 그건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여유는 체력의 한계와 능력의 한계를 인정한 겸손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힘을 빼고 기다리다가 정말 필요할 때 집중하고 몰입하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차피 더 이상 그 이상을 할 체력도 없으니 선택의 여지도 없는 셈이다.


연령에 상관없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안식이고 휴식이다.

난 방학 때에도 열심히 달렸다. 감사하게도 딸들이 학원을 보내지 않았음에도 공부를 잘 해왔고, 차 없이 지내는 것에도 불만이 없어 경제적인 압박감 없이 지냈으니, 방학 동안의 나의 열심은 경제적인 이유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물론 교직 초기 거의 강제로 방학 보충수업을 시킬 때는 교사들도 무조건 수업에 투입되어야 했지만, 난 학생들과의 수업은 무료라도 자발적으로 어떻게든 해왔으니 불만은 없었다. 체력적인 걱정만 있었을 뿐.


중학교 내려온 지 올해로 3년 차이고, 어차피 코로나 이후로 보충수업과 야자가 가장 적극적이었던 대구에서도 고등학교 보충과 야자가 자율화되면서 고등학교 교사들이 중학교 교사의 퇴근시간과 비슷해졌다. 하물며 중학교 방학은 온전히 쉴 수 있는 기회인 것인데..

그럼에도 난 중학교에서도 아이들의 필요를 살펴서 학교 방학 보충수업도 하고, 외부 강의와 영어몰입수업 등에 참여해서 이전과 비슷한 패턴으로 지냈다.


올해 여름방학은 그래서 내게 특별했다. 

이번 여름방학 보충수업은 정말 오랜만에 자발적으로 쉬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4명 이상의 학생이 모이면 보충수업이 개설이 되니 내가 원하면 무조건 수업을 진행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수업을 원하는 학생들이 작년처럼 40명이 넘으면 왕복 2시간 거리를 감수하고도 수업을 진행했겠지만... 여름방학 자기주도학습 프로그램에 포함된 영어멘토링 과정에서 온라인으로 내 수업을 들을 수 있으니까, 2학기 때 여름방학 때 수업 들은 것을 전제로 수업을 해주기로 약속하고 그냥 이번 여름방학은 쉬기로 했다.


다른 것보다 가족여행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몇 년 만에 가족여행을 2박 3일로 다녀왔다. 여행이라기보다는 그냥 휴양이었다. 

아내는 화려하지도 않은 자연휴양림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너무 좋다는 말을 연발했다. 

그동안 너무 학교에만 매여 있어서, 이런 기회를 자주 갖지 못해 좋다는 말을 할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족들 모두 누워만 있어도 그 자체로 힐링이었다.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힐링이었다.

아이들 어렸을 때 뭘 해도 신기해하고 좋아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그 순간에 그저 감사했다.


둘째는 재수하는 중이어서 3일간의 휴가가 부담스러울 것 같아 강요하지 못했다. 이런 선택의 갈등을 주는 것 자체가 미안했다. 그런데 선뜻 가족여행에 동참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렇게 완전체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아내는 너무 감사해했고 행복해했다.


우리는 차 없이 계속 살아와서, 여행도 기차 코스로만 주로 다녔는데... 대구 도심지에 살면서, 휴양림은 보통 우리 여행권 밖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택시로 2만 원 정도면 되는 거리의 자연휴양림을 다녀왔다.


몇 년째 생활지가 달라진 큰 딸과 내년에 생활지가 달라지려고 애쓰고 있는 둘째 딸...

일정을 맞추지 않고도 언제든, 어디든 다닐 수 있었던 때는 몰랐던 이런 기회의 소중함을... 별로 화려하지 않고 즐거운 볼거리나, 놀거리가 없이도, 사소하지 않은 행복감으로 그동안 아빠로서, 남편으로서의 미안한 마음을 덮으려 했다. 다 덮어지지 않는 아쉽고 미안한 마음보다, 지금부터 주어지는 그 어떤 사소한 기회라도 감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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