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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블리쌤 Aug 04. 2023

여행의 불편함, 그럼에도...

여행은 일단 집을 떠나는 것이다.

여행과 사진에 진심이셨던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 여행은 사진을 찍기 위해 멈춰 서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연스러운 스냅샷이 아니라 늘 일정한 대형으로 설정샷을 찍었다.

내가 SNS를 하지 않는 것은 혹 우연히라도 내 사진을 보고 불편하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이기도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사진 찍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블로그에도 가급적 내 사진이 올라가지 않도록 주의한다.



아버지는 여행 때마다 소위 깜짝쇼를 좋아하셨다. 그런데 함정은 다른 가족들은 별로 놀라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았다는 거다. 행선지를 모르고 가는 여행은 기대감이나 설렘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행에서의 즐거운 기억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더 좋았고, 나의 가장 큰 스릴은 연년생인 여동생과 집에 누가 먼저 들어가는지 내기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차피 내려올 산을 뭐 하러 힘들게 올라가며,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내 철학(?)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같은 기억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집돌이 같은 나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인 것 같다.



그러다가 남동생이 태어나면서 우리의 여행은 잠정 중단되었다. 나랑 여섯 살 차이니까 어린 시절에는 동생이랑 같이 놀았다기보다 돌봐주었다고 봐야 한다.

지금은 부쩍 커서(실제로 키도 나보다 크다ㅋㅋ) 학교에만 머문 나보다 세상 물정을 더 잘 알고 있고, 직업적 전문성을 갖추고 있어 여러 가지로 현실적인 도움을 많이 받는다.



막내는 여행을 좋아한다. 기질 자체가 여행을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회사에서 해외 출장을 다니면서도 즐거워하는 것을 난 이해하지 못했다.

반대로 통역을 해주는 역할로 비용 없이 해외연수를 가자는 제안을 거절했다는 나의 말에 남동생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 거의 기절했다.

난 영어교사지만 그 흔한 어학연수는 물론, 해외에 가본 적도 없다.

내가 안 가본 거는 별 아쉬움이 없는데, 가족여행으로 해외에 가지 못한 것이 늘 미안하다. 딱 한 번 일본여행을 가려고 예약도 하고 준비를 다 했는데 출발 하루 전에 둘째 딸 독감확진으로 떠나지 못했던 미완의 기억만 있다.



여기저기 다니기에는 내 체력이 받쳐주지 않는다. 그러나 난 불만이 없다. 그냥 학교와 가정, 교회, 도서관에 다닐 여력만 있으면 되었으니까..

그래서 차 없이도 평생을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또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잠자리가 바뀌는 것에도 되게 민감하다. 그런데 난 잠을 제대로 못 자면 바로 몸의 증상으로 나타난다. 어떻게든 수면시간을 사수하려는 것은, 어린 시절 9시만 되면 TV에서 공익광고처럼 울려 퍼졌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 나라의) 건강한 어린이가 됩시다" 문구가 평생 머리와 몸에 새겨졌는지 어떤 때는 정말 일찍 잠이 든다.

그래서 난 되도록 고2 담임을 피하려 했다. 고1이 다니는 야영도 부담이었지만, 고2는 수학여행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고2 담임을 딱 두 번 했고 그렇게 제주도를 두 번 다녀왔다.

(내가 비행기 탄 건 제주도 갈 때였는데, 대학 졸업여행, 신혼여행, 가족여행, 그렇게 다섯 번이었다)



야영이든 수학여행이든 그날이 다가오면 설렘보다 부담감이 압도적이었다. 차로 이동하는 것도 멀미와 체력 문제로 힘들었지만, 잠을 충분히 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밤새 학생들이 이탈하지 않도록, 사고치지 않도록 선생님들은 당번을 정해서 불침번을 서야 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고3 담임할 때 수능 끝나고 졸업여행을 몇 년 연속으로 다닌 적이 있다. 졸업여행은 더 힘들었다. 수능 끝난 아이들을 통제하기가 훨씬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간다면, 누군가를 위해 먼 거리를 가게 된다면, 그건 엄청난 결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군가가, 그 만남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에서 다니는 여행도 결국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으니 매년 그 부담감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녀오면 몸살이 나고 힘들었어도 학생들과 함께 하는 모든 시간이 다 좋았다.



고3 때 아버지가 갑자기 교회를 옮기셔야 할 일이 생겼다. 예정에도 없이 너무 갑작스럽게 옮기시게 되어 경기도에서 전혀 지리적, 문화적 연관성이 없는 경상북도의 농촌교회로 이동하게 되었다. 동생들은 전학을 했고, 나는 고3,  9월이라서 홀로 학교에 남았다.



그해 서울대 입시에 실패했다. 성공했더라면, 갑작스러운 이사가 내 삶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서울에 혼자 독립하여 정착했을 거니까.

대학을 가서 친구들과의 일상이 서로 흩어지게 되어 자주 볼 수는 없었더라도, 그 끈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을 텐데... 난 아예 유배 가듯이 전혀 새로운 곳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또 재수해서 서울로 갔다면 고향 사람들과 다시 교류의 맥이 이어졌을지도 모르지만, 대구에 남아 경북대에 진학하면서 기억의 흔적 외에 현실적인 교류는 단절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롱디(장거리)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난 그게 가능하나 싶다. 여행처럼 정말 결단하고 작정해서 다니는 것을 일상처럼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적어도 나는 멀어진 지리적 거리는 심리적 단절과 거의 일치했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대구에서도 나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대구에서 지낸 날이 훨씬 더 많아진 지금은 나만의 언어도 잃었다. 수업할 때나, 강의할 때만, 그런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그 잔재가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한동안은 친구들을 만나러 올라가기도 했지만, 내겐 그걸 자주 반복할 만한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매 순간 감당해야 하는 일상이 내겐 더 중요하기도 했다.



딸이 대학생이 되어 수원에 올라가게 되었을 때 내가 직감한 것은 그런 것이었다. 같이 산다는 것과 다른 느낌일 거라는, 이제 작정하고 애쓰지 않으면 자주 만나기 힘들 거라는 현실... 그건 심리적 독립을 이뤄가는 딸들의 자연스러운 성장과 시간의 흐름에 그 독립을 가속화하는 지리적 거리감이 더해지는 너무 슬픈 느낌이었다.



딸은 학원, 과외 등으로 생활비를 번다고 집에 내려와서도 며칠 머물지 못했다. 어쩌다 보니 내려왔을 때 코로나 확진이 되어 일주일 이상 머물렀을 때를 제외하고는...



수원에서 교사하는 제자가 내게 했던 말이 강력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아빠가 자주 올라오는 거 딸이 좋아하겠어요? 용돈이나 많이 보내주세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난 딸이 아무리 보고 싶어도 자주, 아니 가끔씩이라도 올라가지 못했다. 딸의 대학생활의 시작은 코로나 시작점과 거의 일치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긴 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서야, 난 무심한 아빠에서 벗어나려 애쓰고 있다.

올 1월 말 설 연휴에 딸이 대구에 내려올 기차표를 구하지 못해서, 다른 가족들이 수원으로 역귀성을 했다.

그리고 6월 말 주말, 방학을 하고 8월이 되어서야 딸 집에 왔다.

딸도 스케줄이 있어서 딸이 자리를 비운 빈 방에서 딸을 기다리며 쓸쓸하게 글을 쓰고 있다.



딸에게뿐 아니라, 내 몸이 힘들고, 잠자리가 바뀌면 아플 수도 있고, 방학 때도 수업을 해야 하고 해서 이런저런 핑계로 인간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건 아닌지 돌아보았다.

이미 일상이 달라져 버린 딸은 아빠가 오는 것을 반기는 것인지 본심을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그럼에도 난 아빠로서 딸을 만나러 먼 길을 와야 할 의무도 있고, 권리도 있고, 책임도 있는 거였다.



우리는 삶을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편한 대로 흘러가듯 그렇게 살 수 없다. 보통 그런 흘러감 속에는 후회가 자리한다.



여행은 일상을 떠나는 것이다. 얼마 전 가족여행의 휴식과 안식의 기록을 남겼던 것처럼, 강제로라도 일상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여행지가 어디든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우리 동네 관광지에 오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의 일상에 뭐 그렇게 특별한 것이 있다고. 그럼에도 우리의 일상은 그들의 일상과는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단지 여행의 체험 자체로 삶을 배우고 성장하고 재충전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익숙함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여행지가 아닌 일상의 특별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난 그 전에도 장소의 매력에 이끌려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만나고 싶은 사람, 그리움을 현실로 마주할 기회만 여행의 의미가 있었다.



딸을 일상에서 자주 못 보니, 두려움이 생겼다. 어쩌다 만나면 다시 또 헤어질 것이 너무 두려워지는 것이었다. 또 만나게 되겠지만, 잘 봉인해두었던 사무치는 그리움을 다시 파헤치는 느낌이 들어서다. 그걸 수습하려면 또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난 모든 불편함과 두려움을 무릅쓰고 먼 길을 와야 할 이유가 있는 거다.



잠시의 만남이라도, 만남으로만 그리움의 실체를 마주할 수 있다. 그래야 현실에서 그리움도 지속될 수 있다.



난 역시 지리적 거리의 제한을 넘어서기 힘들어진, 여동생과 남동생을 함께 만난다. 딸을 만나러 온 덕분에 이왕 가까워진 거리로 가능해진 일이다.

그들은 원래 살던 고향으로 돌아간 셈이고, 결국 나 혼자 남겨졌다. 두 딸이 모두 서울에 자리를 잡게 되면, 우리 부부도 딸들 가까운 곳으로 올라갈지 아직 모르겠다. 그렇다 해도 퇴직 후의 일일 것이고, 그 떠남은 지금 일상과의 단절을 의미할 것이니 신중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내 고향 가까이에 와도, 예전의 친구들과 끊어졌던 끈이 다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니... 더구나 아내야말로 낯선 곳에서 내가 대학교 때부터 홀로 남겨졌던 것 같은 일을 겪게 될 수도 있으니...



그럼 우리 부부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대학 이후 아이들이 독립하는 건 당연한 과정이지만, 일상을 공유하기 힘들어도 딸들을 좀 더 자주 보면서 지내는 길을 선택할 것인가.

그렇다면 대구에서의 일상을 추억으로 봉인해둘 수 있을 것인가?



있을 때 잘하라는 그 흔한 말이 갑자기 이렇게 사무치게 다가올 수가 없다.

이제라도 핑계 대면서 회피하지 않아야겠다. 후회에게 틈을 주지 않도록...



여행은 원래 불편한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떠나는 이유는 그 불편함을 넘어서는 소중한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편함보다 그 소중한 가치에 집중하면 될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일깨우고 싶다.



6월에는 울산에도 다녀왔고, 다음 주에는 창원에도 간다. 울산에 다녀와서 몸이 좀 힘들었지만 귀한 선생님들을 만났고 고됨을 넘어서는 소중한 가치를 마주했다.

다음 주에 전혀 모르는 60여 분의 선생님들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지만, 불편함을 넘어서는 설렘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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