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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블리쌤 Aug 05. 2023

그리움인 채로 두지 않기

자주 연락해야 하는 이유

큰딸을 만나러 갔다가 남동생을 함께 만나 저녁에 시간을 보냈다.

삼촌이 대구에 출장을 자주 다니던 딸들의 어린 시절, 삼촌을 아침에 깨우는 건 딸들의 몫이었다. 배에 올라타서 잠을 깨워도 삼촌은 기분 나쁘기는커녕 그 느낌이 너무 정겹고 좋아서 결혼해서 아이를 꼭 가져야겠다는 꿈이 생겼었다고 했다. 지금은 어린 아들을 키우며 그 꿈을 이루고 있다며 과거의 기억을 소환했다.

세월의 흐름을 성큼 뛰어넘은 듯, 어린 시절 이후로는 자주 만나지 못한 20대 조카와 중년을 지나는 삼촌의 만남은 어색할 줄 알았는데...

어색함은 잠시뿐이었다.

 

삼촌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것이 딸에게 의미 있는 간접 체험이 될 것 같아서 화두를 던졌다. 삼촌의 삶에 반복되는 우연은 확률적으로 봤을 때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삼촌은 대학교 때 학점이 그다지 좋지 못했는데, 마지막 계절학기 두 과목에서 필사적으로 좋은 학점을 받아 대기업 지원 학점 컷을 간발의 차이로 넘어섰다는 이야기.  


    경영학 전공이었고, 대부분 영문과를 부전공을 하는데, 성적 때문에 아무도 몰리지 않는 일문과를 선택해서 일본어를 열심히 할 수 있는 기회와 결과적으로는 훗날 업무에 큰 도움을 얻었다는 것.  


    경북대 출신으로 서울의 취업이 만만치 않았던 상황에 서울 대기업 계열사에 합격하게 되었다는 것. 영어는 기본으로 해야 하지만, 고급 수준이 아니었음에도, 일본어를 부전공하며 준비한 덕에 회사에서 일본 관계자와 일본어로 통화를 하자마자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면서, 자신의 영어 수준까지 올려치기 해줘서 지속적으로 영어실력 향상을 위한 동기유발도 되었다는 것.  


    외국계 회사로 넘어가면서 오히려 기회를 얻어 능력을 인정받는 자리까지 올라갔다가, 코로나와 겹친 아들 출산 즈음에 해외출장을 거절하고, 이후의 대만 출장 기회는 코로나로 인해 그전에 비자를 발급받지 못해 무산되었고, 재계약을 하지 못했지만 실직 기간 생활하기 충분한 퇴직금을 받았다는 것, 그 덕분에 아들의 출산을 함께 하고 육아를 공동으로 하는 행복을 누렸다는 것.  


    스타트업을 하려고 준비하는 과정에, 예전에 함께 하던 선배의 부탁으로 대만 출장을 가서 도움을 드렸던 것을 계기로 처음 입사했던 대기업 직원 중 능력 있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시작한 사업체에 스카웃 제의를 받아 거의 통장 잔고가 0에 수렴하던 때에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정말 마음에 잘 맞는 드림팀 같은 분위기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것.  


    얼마 전에는 자칫 심각한 병으로 이어질 수 있는 증상을 초기에 발견해서 고비를 넘겨 건강을 지켰던 것.  


이런 절묘한 타이밍과 위기 극복의 과정이, 매 순간 힘든 일을 겪었지만, 지나놓고 생각하니 너무 자주 반복되는 운명 같은 우연에, 오히려 숙모님이 교회를 갈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과거의 힘들었던 이야기도 나누었다.  

    대학생 때 널빤지 파티션에 누울 공간만 간신히 있던 고시원에서 생활한 이야기.  


    친구 교회에서 마련해 준 거처에서 지낼 때 한 겨울에 난방이 되지 않아 전기장판에 의지하면서 세 명의 친구가 함께 잠을 자는데, 전기장판만 뜨겁고 숨을 내쉬면 입김이 나올 정도의 온도 차이에서, 등이 뜨거워 세 명이 일제히 골고루 몸이 뜨거워지게 돌아눕기를 반복하다가 남동생이 "우리 이거 바비큐되는 것 같지 않냐"는 말에 세 명이서 한참을 눈물 날 때까지 웃었다는 말 그대로 웃픈 이야기.  


    방학 때 외국인 노동자들이 주로 일하는 공장에서 두 달간 일하며 돈을 벌다가 손가락 잘릴 뻔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던 이야기.  


    가난해서 보일러 없이 아궁이에 불 때는 한옥집 같은 곳에 계시던 부모님 댁에서 전기장판 깔고, 전기난로를 피워놓고 자다가 솜이불에 불이 붙어 서서히 불이 나려고 하는데, 동생은 뜨겁다는 말을 잠꼬대처럼 하고, 난 잠에서 깨어 놀라서 불을 끄고 이불을 문 앞의 마루 위에 두고 잤다가, 갑자기 환해지는 느낌에 다시 잠이 깨어서 보니 솜이불에 남았던 불씨가 서서히 살아나서 마루를 태우며 타고 있던 아찔한 순간... 그 순간까지도 남동생은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던 이야기. 잠귀가 밝고 예민한 내가 함께 자고 있지 않았다면 목조 한옥 건물이 통째로 타버리는 화재에서 비극이 있었을지도 몰랐을 거라는...  

 

아찔하고 힘든 순간이 많았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까 모든 것이 은혜였다고...


미래에 대해 불확실을 가지고 막연해하는 큰딸에게 인생 선배이면서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삼촌의 인생 비하인드 스토리가 의미 있는 자극이 되는 것 같았다. 자신의 인생이 삼촌과 똑같진 않겠지만 적어도 삶의 큰 그림을 보는 시각을 어느 정도 갖게 되었을 거니까.

아빠는 학교에서 일어난 직접 체험과 책이나 매체를 통한 간접 체험만 이야기해 주지만, 삼촌의 시각은 아빠와는 다른 뭔가를 더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일단 아빠와 삼촌의 대비되는 차이를 큰딸이 이야기했다. 유전적인 배분에서 삼촌은 키를 가져가고, 아빠는 얼굴을 가져간 것 같다는 말을 해서 날 흐뭇하게 했다. 키는 객관적으로 반박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얼굴은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일 것인데 아빠 편을 들어주었으니.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 이 얘기를 하니 아내는 내 얼굴 보고 결혼한 것 아니라는 평상시 주장을 재확인하며 유전자 얼굴 몰빵설을 부정했다ㅋㅋ


성격도 달라서 아빠만의 이야기보다 삼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균형 잡힌 시각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삼촌은 처음 자신을 봤을 때 자신에게 혐오감만 갖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자신의 매력으로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이야기했다.

늘 실패를 두려워하고, 모험하지 않으며, 120% 이상 준비하지 않으면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아빠와는 다른 분위기였을 것이다. 그래서 딸은 삼촌의 얘기에 더 공감하고 집중하는 것 같았다.

한 번은 함께 기차를 타고 가려는데, 삼촌이 뭔가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며 옆좌석에 같이 앉지 말고, 표를 따로 끊어서 운명을 기대해 보자고 했다가, 기차를 타고 보니 서로 옆자리였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웃기도 했다.

 

여러 이야기들을 서로 웃어가면서도 진지하게 했다. 딸은 재미있어 했고, 큰 도움과 위로를 받은 것 같았다. 삼촌도 만남의 매순간을 행복해 했다. 감사한 일이었다.



다음날은 여동생, 그러니까 딸의 고모와 점심식사를 했다. 거의 점심을 함께 먹을 시간밖에 되지 않아 대화를 길게는 또 깊이 있게 하지는 못했고, 아쉬움을 달래기라도 하듯, 6-7인분 정도 되는 패밀리 세트를(직원이 주문받을 때 세 분 맞으신 거죠? 6-7인분인데 괜찮으신 거죠?라고 몇 번을 확인했다) 시켜놓고 세 명이서 거의 모든 음식을 초토화시켰다. 자주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거금을 들여 고모는 그렇게 대접하고 싶은 진심을 전했다.

짧은 시간임에도 딸은 고모와 제법 삶에 대해 체험을 나눴고 경청하는 자세를 보였다.


어린 시절 큰딸은 고모를 “오모”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대치동과 그 밖의 지역에서 영재수학을 가르치는 고모를 생활권이 달라 자주 볼 수 없었지만 명절 때마다 정성껏 교구를 준비해서 수업을 해주었다. 어린 나이일 때부터 큰딸은 수업에 몰입하여 고모를 흡족하게 했다. 어떤 때는 열이 끓어오를 때도 수업을 받다가, 너무 심해져서 응급실에 간 적도 있었다. 정기적이고 지속적인 가르침을 받을 여건은 아니었지만, 소개해 준 교구로 관심을 계속 갖게 되었고, 학습 방향제시와 동기유발이 되었다. 고모는 큰딸의 영재성을 격려하며 실제로 영재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대우를 해주며 아이의 자존감과 의욕을 높여주었다. 그런 가스라이팅(?)과 같은 격려가 고등학교 때도 서울대까지 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이어져서 큰딸은 더 열심히 공부하려 애썼다고 했다. 그리고 수능을 망치고 서울에 논술을 응시하러(말이 응시지, 논술 준비를 전혀 안했으니 그냥 서울 놀러 가서 삼촌, 고모를 만나는 거였다) 갔을 때 고모 만나기를 두려워했다. 고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고.


큰딸이 논술 치러 갔던 날도 삼촌과 고모는 이왕 서울로 올라온 큰딸에게 진심을 다해 서울에서 즐거워하도록 가이드하고 식사를 나누었다. 결과에 실망하지 말고 다음 기회를 보자는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고 큰딸이 기대하지도 않았고, 준비도 따로 하지 않은 논술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고모와 삼촌은 놀라면서도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큰딸이 사교육을 받지 않고도 논술로 합격한 것에는 고모의 지분도 컸다. 일일이 가르쳐주지는 않았어도 적어도 어떻게 공부하면 되는지 방향성을 일깨워주었고 수학 자기주도학습의 출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자기주도학습코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어서 일찌감치 학교에서 영어멘토링, 학습코칭, 수업잔소리, 개별상담을 해왔고, 지금은 그 주제로 학부모, 교사, 학생 대상 강연도 하고 있다. 방향제시, 수준에 맞는 출발점과 개별화된 속도, 사소한 것부터 습관형성, 그리고 멘탈코칭까지...

 

딸과 함께 서울에 있는 동생들을 만나며 나도 추억과 감성을 일깨우며 생각에 잠겼다.

더 이상 삼남매가 한 집에서 일상을 공유할 일은 없겠지만..

셋이서 취향도 비슷했고, 셋이 모이면 재미없는 영화도 함께 보면 깔깔거리며 즐겁게 볼 정도로 케미가 좋았다. 여동생은 그와 비슷한 일이 반복되기를 꿈꾸며, 적어도 세 남매가 가까운 곳에서 살기를 기대하고 있다. 결국 혼자 대구에 있는 나한테 달린 일이긴 하지만...

 

이벤트 같은 동생들과 만남의 끝에 아쉬움이라는 단어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울컥한 느낌으로 헤어졌다. 특히 바쁜 학원 일정 등으로 서로 만날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 먼 지리적 거리를 극복하기 어려운 여동생과 헤어질 때는 눈물이 터질 뻔했다. 우리 자주 봐야 되는 거 아니냐고.


특히 여동생과는 연년생으로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 서로를 극진히 챙겼다. 그래서 서로 남친, 여친으로 오해받을 정도로. 늘 버스 시간을 스릴 있게 맞추는 여동생과 시골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아침에 한 대 밖에 없던 버스를 타려고, 시골의 먼 길을 같이 걸어가다가 저 멀리서 버스가 보이고 걷는 것으로는 차를 탈 수 없음이 확실해질 즈음에는 내가 동생의 가방을 대신 매고 둘이 전력 질주를 하기도 했다. 시골의 인심을 담았던 버스의 기사 아저씨는 약간의 차이로 정류장에 도달하지 못한 우리 남매를 몇 번이고 기다려주었고, 그걸 지켜보던 버스 안의 학생들은 짜증을 내는 게 아니라 운동경기 실황중계하듯이 응원을 보내주곤 했었다.

 

그런데도 성인이 되고 먼 곳에 각자 살고, 가정을 꾸리다 보니 이젠 일상보다 추억을 공유하는 관계가 되는 듯한 슬픈 느낌이 들었다.

추억은 현실과의 단절로 봉인되니, 추억으로 화석화되는 것을 막는 방법은 자주 연락하고 만나는 것이다. 딸에게도 그렇게 당부했다. 같이 살던 때와 다르게 독립한 후에는 그렇게 의식적으로 애써야 하는 거라고.

 

슬픔의 전제는 기쁨과 행복일 것이다.

"We can't have the happiness of yesterday without the pain of today. That's the deal."

"우리는 오늘의 고통 없이 어제의 행복을 가질 수 없어요. 그건 거래죠."

만남 이후에 헤어짐이 아쉽고 힘든 것이 두려워서, 반복해서 만나도 그 아쉬움과 그리움은 무뎌지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만남을 주저할 수는 없다는 C.S. 루이스의 말.

그게 두려워서 아무 상관없는 사람처럼 감정의 무게를 거부하며 지낼 수는 없는 거니까.


그래서 어쩌다 보니 만남과 사소해 보이는 매 순간이 더 행복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슬픔 때문에 행복을 포기하지는 않기를...

또 소심함으로 관계의 상처를 두려워하여 먼저 연락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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