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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블리쌤 Aug 06. 2023

입시 선택의 전후 1 - 나의 고입 스토리

중학교 때 고입 비평준화 지역에서 고등학교 스카웃의 타깃이 된 적이 있다. 

평준화 지역에서도 학생들의 선택이 중요하다. 선택하지 않은 학교에 근거리 배정될 가능성도 있지만, 소위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지원하면 확률적으로 우수한 학생들의 비중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내가 있던 한 고등학교에서 부디 교칙을 엄격하게 적용하라는 교장쌤의 반복되는 요청이 있었다. 규율이 엄격하지 않다고 소문이 나면 그걸 노리는 학생들이 대거 지원하게 되어 구성원들도 그렇게 될 거라는 논리였다.

대구 교육특구 고등학교에서 매년 우수한 학생들이 채워지는 것은 그 지역에서 중학교 때까지 공부를 많이 한 학생들이 선택하지 않아도 배정이 되며, 굳이 멀리 가지 않으려고 1, 2지망을 근처 학교를 쓰는 이유도 있겠지만, 1지망 50%의 정원은 아주 먼 지역에서도 지원이 가능한데도 소위 내신 따기 어려운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 있는 곳에 비교육특구 학생들이 굳이 지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평준화 지역의 고등학교에서는 추첨이 아닌 학생의 선택으로 구성원이 채워진다. 그러니 특히 우수한 학생이 유입되는 것이 학교의 분위기와 수준을 결정짓기도 했다.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먼 옛날 각 고등학교에서는 공격적인 마케팅(?)과 홍보를 하고 파격 제안을 하기도 했다.


작은 시골교회의 목사님 가정에서 자란다는 건 분명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목사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때로는 “연극 증후군”처럼 나의 말과 행동의 선택을 제약을 가져오기도 했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삶의 방식 자체의 선택의 제약도 분명 있었다. 당장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난 생각이 단순하지 않아서 어린 나이에도 경제적 상황들을 고려해서 고입 선택을 했다.


평준화 지역에서도 선택은 어렵다. 보통 내신 따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다면 수업 분위기나 면학 분위기가 아쉽고, 수업 및 면학 분위기가 좋으면 내신 따기가 어렵다. 그래서 의대를 노리는 학생 중 이미 실력을 충분히 쌓았고 자기주도학습과 멘탈 관리가 가능하다면 수업이나 면학 분위기에 상관없이 내신 1등급 받을 학교를 전략적으로 선택하기도 한다. 지금은 수시의 비중이 크고, 처음부터 정시라는 좁은문에서 시작할 이유는 없으니까.

나의 고입 시절에는 대입 수시가 없었다. 그저 지금 수능에 해당되는 학력고사만 잘 치면 되는 거였다. 물론 내신도 조금 반영되었지만, 과목을 다 합쳐서 내신등급 그룹을 넓게 잡았기 때문에 지금처럼 치열한 내신 전쟁까지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의 선택은 비평준화 지역 고등학교 3개 중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몰리는 A 등급 학교여야 했다. 내신 때문에 전략적으로 낮은 학교에 갈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학력고사를 잘 치기 위한 수업, 면학 분위기가 절대적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A 등급 학교에서 학교방송으로 내 실명을 언급하며 나를 아는 학생 교무실로 오라고 해서, 앞 집 형님으로부터 그 학교 홍보물과 원서를 전달받기도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러나 C 등급 학교에서는 아버지가 학교 교목으로 계셨던 사립학교라서 인맥이 형성되어 있었고 우리집으로 몇 분 선생님이 직접 오셔서 스카웃 제안을 하셨다. 파격적인 조건으로. 고등학교 3년 장학생은 물론, 스카이 대학을 진학할 경우 학교에서 4년 등록금을 장학금으로 주겠다고. 

비평준화 지역에서 학교 등급은 대입 실적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공격적인 투자를 하는 거였다. 혹 스카이 대학 합격에 실패하면 장학금이 나가지 않아도 되니, 먹튀 가능성이 없는 투자이긴 했다. 


그래서 난 C 등급 학교를 선택했다. 내가 주체적으로...

가난한 집안의 가정 형편까지 살피고, 아버지가 계시던 학교에 아들을 보내는 의리를 지켜드리는 효자라고 생각하며 자신만만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난 그저 교만한 학생일 뿐이었다. 

일단 중학교 때까지 시골학교 전교 1등이라는 성적에 교만했다. 중학교 성적이 고등학교 성적으로 꼭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서도 이어질 거라는 나만의 논리, 그리고 고등학교에서 나의 존재를 알고 접근을 해온 이유는, 그 지역 시군 학교대항 수학경시대회에서 줄곧 1등(중1 때만 2등)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혹 그런 잠재성과 능력이 있었더라도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정시뿐인 그 시절에 A등급 학교를 진학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고입 시험 성적은 시군 전체 차석이었다. B 등급 학교 수석보다 1점 뒤졌지만, A등급 학교 수석보다는 성적이 높았다. 

그리고 고1 때 전국모의고사에서 전국 4등을 했다. 그때까지는 C 등급 학교와 나의 선택이 옳았던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짊어진 짐은 가볍지 않았다. 우리나라 쇼트트랙처럼 그 자신감으로 뒤에서 기회를 보다가 서서히 속도를 올려서 막판 스퍼트를 했다면 과정 중에 힘들었어도 압박감은 그렇게 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 너무 오버페이스를 한 느낌이었다. 이젠 더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오지 않도록 유지하는 더 힘든 과제를 수행해야 했고, 점점 성적이 올라가는 즐거움을 누릴 수 없었고 마치 가진 걸 빼앗기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어야 했다.


내가 교사로서 학생들과 딸들에게, 그리고 강연 다니면서 교사와 학부모님들께 행복교육을 외치는 것은 나의 그런 아픈 체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결론을 정해 놓고 몰아붙이거나, 부모와 교사의 직간접적인 기대가 얼마나 학생 본인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인지 난 어린 나이 때부터 나의 일상으로 끌어안고 살았기 때문에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고2 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영화에서 성적비관으로 자살하는 여자주인공에 너무 감정이입하고 몰입해서 폭풍오열을 하고, OST를 들으면서 굳은 다짐을 하기도 했다. 난 물러서면 안 되고, 밀려서도 안 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주변의 기대와 격려와 응원은 너무 감사했고 실제로 힘이 되기도 했지만, 내게는 때로 절대 밀리면 안 된다는 족쇄가 되기도 했다.

전교 1등, 예비 서울대생 등의 기대와 타이틀이 나의 정체성이 되어야 했다. 그걸 입증하지 못하면 난 영영 가치 없는 존재일 거라는 두려움과도 싸워야 했다. 고2 때 수학성적이 곤두박질쳐서 1년간 회복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성적이 와장창 무너져내렸거나, 내게 신앙이 없었다면, 나의 고통스러운 심경을 토해내는 글쓰기가 없었다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변명조차 하지 못하고 영화 주인공을 자처했을지도 모른다. 

문득 내가 여전히 살아 있음이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혼자서 발버둥 쳤던 것 같지만 내 힘만으로 살아남은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 그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고등학교 생활도 너무 힘들었다. 영어쌤은 내게 수업 들을 생각하지 말고 혼자 공부하라고 대놓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실력이 아니라 학생들 수준으로 인해 충족시킬 수업을 하실 수 없다는 배려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또, 난 내가 한 선택의 무게를 느껴야 했다. 

오히려 면학 분위기나 수업 분위기가 좋았다면 그렇게 애쓰지 않고도 그 분위기와 문화에 몸을 실어서 생긴 여유로 더 큰 성취를 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순리에서 벗어난 선택을 한 나는 내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해서 무척이나 조급했다. 스카이 대학 장학금 약속은 내가 입학했을 때 받게 되는 것이지, 무조건 보장받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난 그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늘 이 정도로 충분치 않다는 강박같은 노력을 더해야 했다. 쉬는 시간에도 식사 시간에도 공부를 하려고 애썼다. 지금 생각하니 오히려 쉬면서 여백을 가졌다면 오히려 더 집중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시간의 양이 아니라 집중의 정도가 더 중요하고, 휴식하면서 더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도 내겐 사치였던 것 같다. 

그러니 고1이 지나면서 더 지치고, 수학성적 때문에 더 힘들어 했으며, 2학년 2학기부터는 담임선생님이 너무 까불어서 조용해지라고 내 짝으로 붙여 놓은 친구 때문에 인간적인 모습을 좀 더 회복하면서 집중력도 많이 흩트러졌다. 쉬고 싶고 놀고 싶다는 억압된 생각이 그 친구를 만나 분출구를 찾았던 것이었다. 그 친구를 통해 알게 된 동네 여사친을 짝사랑하게 되면서 나의 고3은 소위 "사치의 향연"이 벌어졌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오버페이스를 주의하라고 말해준다. 한 번 번아웃이 오면, 다시 회복하기가 몇 배나 더 어렵기 때문이다. 성취에 조급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휴식과 안식을 누리면서 집중할 때 몰입하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플래너를 형광펜으로 많이칠하게될수록, 그렇게 공부시간을 확보할수록 실력이 쌓일 확률은 높아지지만, 늘 자기 역량껏 자신의 속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뜨거운 열정으로 타오르고 꺼질 것이 아니라면, 지속성이 늘 전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시행착오를 스스로 겪었기 때문에 교사를 하면서 학생들의 시행착오를 줄여줄 수 있을 것 같아, 나의 아픔도 다 의미가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당시 나는 마음도 급하고, 몸도 많이 아프고, 늘 쫓기는 심정으로 주변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까지도 감당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살아남아 버텼다는 것만으로도 그 시절 내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대다수의 학생들이 학력고사 선택하는 과목으로 학교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것도 당연했기 때문에, 난 그 선택 사이에서도 힘들었다.

사회과목 중 대부분 아니 모두가 선택한 지리 과목은 정말 공부하기도 싫어서, 고3 때 내신과는 별개로 혼자서 세계사 과목을 선택하여 학력고사를 대비했다. 내가 자초한 선택이긴 하지만 큰 부담이었다.

그 당시 학력고사에서는 문과라도 과학 한 과목을 선택해야 했는데 거의 대부분이 생물을 선택했다. 나는 대세를 따르지 않고 물리를 선택했다. 외우는 것도 싫고, 물리는 원리만 이해하면 거의 산수 수준의 계산으로 답이 나오기 때문에 이보다 내게 더 맞는 과목은 없었다. 물론 원리를 이해하고, 때로 생각을 해서 적용하는 과정 등으로 문턱이 좀 높아서 서울대 진학하는 문과생의 비율보다 물리 선택 수가 전국적으로 더 적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거나 고3 때 생물 수업을 들어야 하면서도 혼자 굳이 물리를 했던 것은 효율적이지 않았다.

그보다 더 심각했던 건, “농업 vs 독일어”였다. 그 당시 직업계열과 제2외국어 중 선택하도록 되어 있었고 상위권 대학은 제2외국어를 지정했었는데... A 등급 학교는 당연히 제2외국어 중심으로 학교교육과정을 구성하고 학력고사 대비를 해주었을 것이지만... 이 학교에서는 반마다 5-6명만 제2외국어를 수업 듣고, 나머지 농업 선택 학생들을 자습을 했다. 그런데 농업교과 선생님의 자존심 혹은 자부심은, 학력고사와 상관없이 모든 고등학교 교육과정은 정상적으로 다 참여해야 한다는 자신만의 원칙으로 이어져 제2외국어 선택학생들도 수업 들을 것을 강요하셨다. 그러면서 학력고사를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학력고사에 포함되지 않는 다른 교과 시간을 빌려서 수업을 하시곤 했다. 나는 분노에 가득 차서, 대놓고 반항할 수는 없고, 농업교과서를 안 가져와서 엎드려뻗쳐 벌을 자처하기도 했다. 땀이 나면 자리로 들어가도 되는데, 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그냥 벌을 서는 소극적 저항을 했던 기억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다소의 횡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수업시간에 학생이 수업듣는 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당시 소수에 해당되는 학생들은 원칙을 떠나 배려를 받지 못했다는 건 확실하다. 

A 등급 학교였다면, 학력고사 선택하지 않는 농업을 교육과정 정상화를 명분으로 강요하지 못했을 것이고, 아예 그 학교는 교육과정 내에 구성하지도 않았을 것이니까.

난 고등학교 선택의 무게를 3년 내내 어떻게든 버텼는데, 농업시간은 내 선택을 후회로 돌아보게 하는 울분의 시간이었다. 심지어 난 이 학교에서 애초에 와서는 안되는 거였다는 소외감까지 느꼈다.


목표를 이뤄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원래도 사교적이지 않았던 나는 다른 학생들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왕재수"의 길을 걸었다. 특히 내가 공부에 집중하고 몰입하고 있을 때 내게 질문하는 걸 정말 싫어했다. 가속이 붙은 상태에서 몰입이 깨지면 다시 에너지를 몇 배로 더 쓰고 나서야 그 상태가 되기 때문에... 그래도 그 외의 시간에 질문을 받아주고 아이들과의 거리를 좁혀주면서, 그때 목표 수정을 했던 기억이 난다. 서울대 영문과에서 영어교육과로... 영문과 합격점이 더 높아서 목표로 잡았지만, 어차피 교사가 꿈이니까 그렇게 타협해도 될 거라고 스스로 타이르면서...


고등학교에 전교 30등까지 따로 공부하는 공간이 있었다. 거기서 토요일 오후마다 축구를 하기도 했고, 생일파티도 하는 등의 공동체 생활도 이뤄졌다. 그런데도 난 그곳을 나와서 혼자 공부해 보려는 고민도 많이 했다. 지금 생각하니 축구하는 걸 너무 좋아해서 매번 즐거워했으면서도 낭비 같은 시간을 견딜 수가 없는 조급함 때문이었다.

결국 끝까지 공동체에 남았고, 고3 2학기 때 갑자기 먼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필연이 되었다. 숙박시설은 없었지만 그 독서실 같은 공간의 평상에서 자고, 학교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빨래를 하면서 지냈다.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것조차 너무 아쉬웠던 중학시절에 비해 나의 고등학교 생활은 지금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느끼는 것과 다르지 않을 힘겨운 나날의 연속이었고, 거기다 내 선택을 책임지는 것을 온몸으로 깨우쳐가는 과정이었다.

결과를 두고 선택을 바라보는 건 무의미하고, 돌이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으니 무의미한 상상이지만. 다시 돌아가면 다른 선택을 했고, 삶도 달라졌을까? 삶은 달라졌겠지만 선택을 바꾸진 않을 것 같다. 

다른 선택이 더 좋은 결과나 과정의 행복을 보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난 고입을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나처럼 드라마틱한 선택에 내몰리지는 않겠지만, 사실 무슨 선택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를 한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나 잘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는 게 더 중요하다고. 어차피 내신도 잘 따면서 학업 분위기도 좋은 학교는 없다. 환경의 변수를 통제할 수도 없다. 교육특구에서 서울대 의대 간 제자들은 내신 나눠먹기 하는 혼란에서도 자기 영역을 지켰다. 모두가 서울대 의대를 갈 것은 아니지만, 내가 노력을 덜 하고, 지금 이 순간의 게으름을 합리화할 수 있는 정답 같은 선택을 기대한다면 꿈에서 당장 깰 일이다.

딸들에게는 어딜 가도 일장일단이 있고 다 가질 수는 없으니 그럴 거면 집 가까운 고등학교를 권했다. 큰딸은 다른 옵션을 꿈꾸며 1지망을 달리 썼지만 다행히 추첨에서 튕겨 가까운 학교를 편하게 다녔다. 어차피 어딜 가든 다 만족할 수도 없고, 혹 후회를 하더라도 돌이킬 수도 없을 거면, 가까운 학교를 다니며 잠이라도 푹 자는 게 남는 거라는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적어도 딸들에게는 틀린 선택은 아니었다.

선택의 정답은 없다. 선택 후 정답을 만들어 가는 과정만 주어질 뿐. 물론 선택 후에는 나처럼 선택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그게 삶이다. 편하게 내게 딱 들어맞는 환경도 그런 사람은 애초에 없는 거다.


다음 시간엔 나의 대입 선택 이야기를 포스팅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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