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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에서 벗어나는 두려움

도전 없던 젊은 시절

by 청블리쌤

컴퓨터 작업을 많이 하는 나는 키보드와 마우스 선택에 까다로운 편이다.

손과 손목에 무리가 덜 가는 팬터그래프 방식 키보드와 버티컬 마우스를 쓴다.


오랫동안 써오던 키보드가 고장 났다. 몇 년을 써오던 거라서 아무리 조심해도 수명을 다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동일한 모델을 찾을 수가 없어서 같은 회사의 비슷한 모델을 구입했는데, 키감은 비슷했지만 스페이스바가 너무 길어서 한/영 키가 그동안 쓰던 것과 위치가 달랐다. 그런 사소한 변화에도 타자 작업에 어려움을 겪는 스스로의 모습에 짜증까지 났다. 손이 기억하지 않는 배열이니 충분히 그럴만했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탓하는 것이, 새로운 모델에 도전을 해 보거나, 가성비 생각하지 말고 좀 더 좋은 모델을 구입했어야 했다는 후회보다 훨씬 더 쉬워 보였다.


얼마 후 오랫동안 써왔던 버티컬 마우스의 휠 기능도 망가졌다. 블루투스 기능의 동일 모델을 찾을 수 없어서 이번에는 모험을 했다. 물론 가성비를 따져서 선택했다. 그러나.. 버티컬 각도는 같았지만 높이와 크기가 다르니 또 손이 어색해 했다.


최대한 모험을 안 하려고 애썼는데, 약간의 모험에도, 그로 인한 사소한 변화에도 난 힘들어했다. 특히 오랜 세월이 묻어난 손에 익은 습관이라면 변화는 불편한 것이었다.


원래 쓰던 것들을 떠나보낸 아쉬움에, 새로운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속상함이 더해졌다.


노트북 블루투스 목록에서 사망선고를 하듯 장치 제거를 하면서 그렇게 노트북과 마우스를 비슷한 시기에 다 떠나보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건강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끼며, 키보드와 마우스에게까지 감정이입하려는 슬픈 느낌은 그냥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는데..


그저 너무 변화에 민감한 나 자신에 대한 답답함을 느끼면서 그런 나의 지난 삶을 잠시 돌아보았다.


새로운 모험을 하는 건 젊음이들의 특권일 것 같다. 물론 나는 젊을 때도 모험을 좋아하지 않았다. 새로운 시도나 모험은 불편함을 전제로 하며 실패와 상처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익숙했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일상 이상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어린 시절부터 올바른 행동양식과 완벽을 추구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억압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별다른 사춘기 없이 대학생이 되어서도 효자 신드롬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새로운 모험 자체가 억제되었다.


큰 딸은 대학을 가면서 거의 독립을 이루었다.


수능 망친 후 서울 놀러 가자는 아빠의 말에 설득되어 준비도 하지 않은 논술 시험을 응시하러 갔다가, 어쩌다 보니 합격하게 되었는데... 그때 논술을 응시하지 않고, 대구의 대학교에 진학했다면 지금까지 자신이 누렸던 모든 것을 단 하나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는 말을 내게 한 적이 있다.


전혀 합격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합격의 그 순간, 다른 의미의 수시납치가 실감 나서(원래는 더 좋은 데를 정시로 갈 수 있었는데 수시합격하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을 경우에 쓰지만, 이 경우는 정시보다 훨씬 더 높은 대학을 합격을 한 것이니 함부로 할 얘기는 아니지만) 딸과 같은 집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 아빠의 입장으로서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던 당혹스러움도 있었다.


나는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2시간 정도 거리의 대학을 진학하고는 매주 집에 들어가야 했다. 목사님이신 아버지가 계신 교회에 출석해서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 명분이었지만 어쨌거나 나이에 걸맞은 독립을 보장받지 못했다. 26세의 나이에 결혼하고 나서도 아내와 함께 매주 집에 들어갔다가 몇 년 만에 독립을 했다. 나 스스로 독립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결혼을 하게 된 상황이 지금 생각하니 아내에게 죄스러울 정도로 너무 미안하다.


대학시절 주말의 행사나 모임은 전혀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심지어 임용고시 최종시험 준비로 한 주만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간절한 부탁도 아버지에게 바로 거절당했다.


그렇게 내가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실행하는 능력도 없었고, 있어봤자 소용없다는 무력감 속에서, 그저 주어진 일만 성실하게 하는 것이 삶의 전부인 줄 알고 지냈다.


나의 저항과 반항이 가족의 평화를 깨뜨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큰 교회 대학부에서 다양한 만남과 깊은 신앙훈련을 받고 싶다는 꿈도 있었지만 결국 이루지 못했다.


대학 4년 전액 장학생으로 다니면서 등록금을 낸 적은 없지만, 과외를 해서 번 돈도 집에 생활비로 다 드리고 용돈을 받아써야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우리 형편에 대학을 보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을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에 시골교회 목회하시는 아버지의 현실을 생각하니 내가 생활비를 보태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집에 생활비를 보태는 공식적인 과외 외에, 책 사볼 돈이 부족하고 만남의 제약이 느껴질 때쯤 난 집에 몰래 과외를 추가로 더 해서 용돈으로 쓰기도 했다. 그래서 주말뿐 아니라 평일 저녁도 과외 때문에 나의 다양한 사회적 활동은 제한되었다.


그러기까지 집에서 먼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지 않았던 이유도 컸다. 내가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모험을 하는 기질로 용기를 냈다면 재수할 때 서울대에 다시 원서를 내서 진학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용기를 내지 않은 나 외에 누구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굳이 나 자신이 뭘 더 좋아하는지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현실로 옮길 수 있는 실행력도, 용기도 없었던 나는 아예 그런 생각을 안 하고 지내는 것이 마음 편했다. 소위 선택장애를 나의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인간관계도 상처받을 두려움이 앞서서 마음을 열기가 어려웠다.


그런 내가 학생들을 만나 교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극도로 내성적인 나의 성향상 내가 먼저 아이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는 못하고, 개별적인 만남에서 재미있게 해주지도 못하는 것이 미안하긴 하지만, 적어도 수업이라는 무대에 서면 그래서 농담조차 계획하여 더 철저히 준비한 덕분에 공연하듯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고, 개별적으로 상담을 할 때도 더 깊이 있게 경청하면서 교감을 이룰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과 모험을 두려워하는 내가 매년 새로운 학생들을 만나는 것도 기적 같은 일이다.


어느 기관에서 교사 대상 설문으로 MBTI 중 I와 E의 비율을 낸 적이 있다. 내향적인 I가 63%를 넘어섰다. 외향적인 E는 학교라는 무대가 좁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건 아이들을 향한 진심이고, 학생들의 성장과 배움에 대한 열정을 발휘하며 절실하게 다가가는 것이지, 조건으로 성격과 기질이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수업할 때 나의 페르소나에 대해서는 넉넉한 'E'라는 성격을 부여해 주기도 한다.


키보드와 마우스의 고장으로 느꼈던 불편함으로 시작한 글이 이런 식으로 전개될 줄은 나도 몰랐다. 때로는 내가 쓴 글이지만, 내가 쓴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으며, 때론 잊고 있던 일들을 다시 생생하게 상기시켜주기도 한다.


그렇게 글을 쓰는 건, 삶의 증거이며, 미처 꺼내지 못했던 생각까지 끌어내는 신기한 효험이 있을 거라는 결론도 물론 생각하지 않았다.



글쓰기 시작은 의도적으로 할 수 있지만, 어떤 생각으로 이어질지는 때로 예측이 어려워서, 그게 궁금해서라도 앞으로도 계속 글을 써야 할 것 같다.


교사로서 아이들 앞에 서는 것, 서툴러도 글을 계속 쓰는 것이 이젠 두려운 도전이나 모험보다는 벗어날 수 없는 익숙함이 되어 간다.


그러나 여전히 두려울 것이고, 그래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최선을 다하게 될 것이니, 그 두려움도 익숙함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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