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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말고 사무엘 같은 어른

온라인과 현장예배의 차이

by 청블리쌤

지난 주일 분당 우리교회 온라인 예배를 드리려다가 이찬수 목사님의 부재를 알게 되었다.

그러고는 등록 교회 외에도 한 번씩 다니는 대구동신교회 주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날 주일설교가 이찬수 목사님이었다.

화면으로 만나던 목사님을 실물로 영접하다니.. 팬심 같은 마음이 꿈틀거렸다.

코로나 팬데믹일 때 교회에서도 학교에서도 대면하지 않고 예배와 수업을 하는 제한적 방식을 찾아냈다. 그 방식은 대면의 만남만 제한할 뿐, 오히려 대면하지 않고도 시공간을 초월하는 무한대의 만남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물론 여기서의 만남을 통상적인 만남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소규모의 현장 대면 예배와 수업, 즉 진짜 만남의 효과에 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소통과 교감은 화면을 넘어설 수 없다. 특히 녹화과정과 녹화 완료된 영상으로는 더 그러하다.

화면만으로 모든 것이 충족되면, 야구장을 직관하러 가는 사람들을 이해할 방법이 없다.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넘어서는 현장감, 화면으로 다 담을 수 없는 파노라마 시각, 주변 사람들과의 교감, 먹을거리 등은 직관을 안 겪어 본 사람은 알 수 없는 것들이다.

교사로서 공공장소에 가서 혹 코로나에 감염된다면 학교 전체에 미칠 영향이 두렵다는 명분이 사라진 지금도 나는 온라인 예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하나님의 임재는 제한되지 않겠지만, 나 스스로 제한을 선택했고, 편리함으로 모든 장점을 다 상쇄했던 거였다.

현장감, 교감, 소통, 감성 등 내게 주어진 은혜와 축복을 놓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나의 시간과 에너지와 모든 것을 드리는 헌신의 부재... 예배의 출발은 나의 유익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목사님은 설교에서 예배 지각은 절대 없어야 하지만,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예배에 대한 기대감의 부재라고 했다.

적어도 이날만은 오래간만에 기대감이 가득한 마음으로 예배의 장소로 향했다. 놓치고 있었던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는 기회와도 같았다.

오래전 전도했던 제자가 정착한 교회이기도 해서 한 번씩 교회에 갈 때마다 제자를 잠시 마주치곤 한다. 예배 전 교회에 왔다고 문자를 하니, 제자도 마침 예배를 드리다가 나를 포착하고 나를 찍은 사진을 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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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은혜의 자리에서 목사님의 설교는 이렇게 시작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어른이 있다. 사울과 사무엘!

다윗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자기중심적인 나이만 먹은 사울과 상처 입은 다윗을 품어 주었던 진정한 어른 사무엘.

사울 같은 어른들에게 상처받고 사는 젊은이들에겐 사무엘 같은 어른이 필요하다. 단 한 사람의 어른이라도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존재.

이 대목에서 제자에게 문자가 왔다.

헉 쌤이자나여!

나를 사무엘 같은 어른으로 여겨주는 제자의 후하고 넓은 마음에 감격해서 바로 답변했다.

다윗 같은 제자 땡땡이!

목사님은 교회의 꿈이어야 하는 세 가지를 언급하셨다.

1 상처 입은 자들의 피난처

2 사무엘 같은 어른을 만날 수 있는 곳

3 영적인 능력이 나타나는 곳

설교를 들으면서 진짜 어른이고픈 나의 꿈을 생각했다.

늙는 건 제일 쉽지만 어른이 되는 게 가장 어렵고, 아빠가 되는 건 쉽지만 진짜 어른이 되어 주는 건 another level 일 거라는 말씀에...

나는 사무엘 같은 어른에 근접해있는가? 아직 사울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은가? 딸들에게 어른인 아빠인지... 학교에서 좋은 어른으로서의 교사였는지... 치열하게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두 달 전 내게 쓴소리와 조언을 듣고 싶다는 졸업생의 문자에 상담을 거절했던 일이 갑자기 떠올랐다. 내가 해줄 이야기는 중3 때 다 해주었고, 현재 학교 선생님께 도움을 청하고,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그 명분과 논리가 완전 틀리지는 않았겠지만, 그 제자에게 필요한 건 상처 입은 후 기대고 싶은 어른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중3 때 기회가 있었음에도 나의 멘토링, 방학 자기주도학습 프로그램, 방과후 수업 중 어떤 것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소위 청블리키즈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AS를 거부하듯 나의 역할에 선을 그으며 차별한 건 아니었는지 돌아보고 마음이 아파왔다.

예배 후 그 학생에게 뒤늦은 전화를 해주었다. 그때의 거절에 서운했냐고 하니까, 선생님의 조언대로 잘 하지 않았었으니까요..라고 대답해서 더 마음이 아팠다.

어차피 나의 조언을 따를 것도 아니었을 것이니 내가 더 상처를 받아 가면서 내가 그 마음을 받아줄 이유는 없다는 핑계를 대고 있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다행히 학생은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고 실패를 분석하며 학원을 다 그만두고 자기주도학습의 방향을 잡고 습관을 서서히 형성해가고 있었다.

그래서 나의 한 마디 조언보다 스스로 일어서서 자리를 잡은 것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며 격려를 해주었다.

이제 와서 내가 개입하듯 현실적인 조언을 하기는 미안해서 몇 가지 방향만 얘기하고 응원의 마음을 전했다.

지금 이 순간의 단 한 명의 어른의 존재가 아이들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남은 여생에도 계속되길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물론 매 순간 다짐해도 늘 어려운 일이지만...

나의 자격 여부나 준비도와 관계없이 적어도 내게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하는 이들을 외면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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