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유가중학교 영어교사 연수에는 예상치 못한 특별함이 있었다.
소규모이긴 했지만, 적은 인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친밀감도 있었다.
일단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초대해 주신 학부 선배님이자 대학원 동기이기도 한 선생님이 날 반겨주셨다.
강의실에 가니 초임 때 함께 동학년을 했던 영어과 후배선생님이 반겨주었다. 거의 20년 만의 재회였다. 살아 있으니 이렇게 또 만난다고 하며 반가워했다.
만나면 반갑고 편하게 얘기 나눌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따로 연락하기는 애매한 친밀감...
4년마다 정기적으로 인사이동을 겪는 공립학교 교사로 늘 느끼는 만남과 헤어짐의 단상이다.
강의 시작 전에 국어과 쌤 한 분이 날 찾아오셨다.
4년 전 거의 처음으로 교사 대상 강의를 하고 나서 내게 고등학생 아들 컨설팅을 부탁하셨던 선생님이셨다. 반갑게 인사하시며 아들의 근황을 전해주셨다. 이런 긴 시간 후에, 강사 목록을 보시고 일부러 나를 찾아주신 것이 너무 정겹고 감사했다.
함께 중3 담임을 하다가 이 학교로 전근 오신 선생님도 커피와 과자를 챙겨서 나를 보러 오셨다.
강사목록 예습을 하고는 반가움을 실물로 표현하시며 지난 학교의 그리움도 전했다. 마음이 몽글몽글 따뜻해졌다.
강의를 마치고는 유독 몰입하셨던 영어선생님 한 분이 다가오셔서 3년 전에 경남 울산에서 1정 연수 강의를 하지 않으셨냐고 물으셨다. 맞다고 하니까... 그 자리에서 내게 연수를 들었다고 하셨다. 그 많은 1정 연수 강의 중에 나를 기억하시고 일부러 아는 척까지 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선생님도 그때의 인연으로 이번 강의 내내 혼자서 내적 친밀감은 느끼셨다고. 그런데 그 친밀감이 실은 선생님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 선생님의 몰입과 반가운 마음이 이미 내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그 친밀감의 이유도 다 납득이 되었다.
선생님은 올해 경남에서 대구로 전입 해오셨던 건데, 이런 우연한 재회를 하게 된 것이 나도 신기했다.
그 외에도 연수 후 초면임에도 칭찬과 격려를 아낌없이 전해주신 선생님도 있으셨다. 자료를 구축한 게 너무 대단하다고 하셔서 선생님들 모두 다 열심히 하시지만, 난 그때그때 기록을 남겨두었던 것뿐이고, 교육특 고등학교에서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드는 열정적인 학생들을 운 좋게 만났을 뿐이라고 말씀드렸다.
강사로 초대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선배 선생님은 저녁으로 스테이크와 디저트까지 사주셨다. 강사 대접이 아니라 그동안 세월의 흐름을 얹어서 한 번에 선배로서 후배에게 베푸는 마음이라고 하셨다. 거기다 집 앞까지 차를 태워주시며 귀가 서비스까지 책임지셨다.
이런 환대가 이미 받아놓고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꿈꾸는 것 같았다.
인간과의 만남이 가장 큰 자극이자 행복 요소이며, 특히 내향형인 사람은 인간과의 만남에 더 큰 만족과 행복을 누린다는 심리학자의 이야기를 그냥 삶으로 체험한 느낌이었다.
나는 언제든 강의의 기회가 있으면 강의로 귀한 분들을 만난 것만으로도 충전이 가능한데, 이런 환대와 가족 같은 챙겨주심에 빈틈없이 급속 충전이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이런 행복한 여정이라니...
선배님은 대구 외곽지라서 너무 학교가 멀다고 미안해하셨지만, 그 어떤 강의보다 마음으로 가깝고 친밀한 여정이었다.
특히 선배님과 저녁식사와 먼 길을 데려다주시는 차 안에서의 대화도 마음을 울렸다.
대학원 함께 다닐 때 합법적으로 대학원 수업 째고 결혼식을 했고, 신혼여행까지 다녀와서 궁금해하는 대학원 동기들에게 "꺅" 소리 나는 얘기로, 25년을 훌쩍 넘긴 기억 속의 젊은 날, 우리가 공유하는 첫 기억을 소환했다.
선배와 나는 승진 없이 아이들 옆에만 있던 비슷한 교육철학과 교육관을 가지고 있었고 세월의 검증까지 거쳤다.
그래서 선배님은 내 강의에 더 울컥하셨다고 했다. 승진의 모형도 아니고, 수석교사의 대표성 없이... 그저 학생들에게만 모든 것을 다 쏟는 그 일에 대한 귀한 가치를 공유할 수 있음에 감사하셨다.
승진하신 분들도 그분들만이 하실 수 있는 힘든 일을 감당하며 역할을 다 하시겠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너무 들었음에도 평교사로 한결같은 삶의 열정과 아이들과의 만남에 두는 가치를 서로에게서 확인하고 전우애 같은 동료의식과 큰 위로를 느꼈다.
돌아보면 우리가 맞서야 할 것은 세월과 노화만은 아니었다. 학부모 민원, 학생들의 무력함, 학생들의 실제 성장에 무관심한 것 같은 전시행정 같은 교육, 사교육에 대한 더 큰 신뢰와 공교육에 대한 무력감, AI 등의 격변하는 시대상...
우리가 그 모든 문제를 대승적으로 다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그저 우리가 만나는 학생들을 지켜왔고 무사히 살아남아서 오늘에 이르게 된 지난날의 소회를 나눴다.
"아이들이 나이 드는 우릴 좋아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하는 걱정만 있을 뿐 우리는 끝까지 아이들을 만나겠다고 다짐했다.
선배님께 나이 들어도 꼰대 같지 않고 늘 노력하시는 쌤처럼 노력하고 싶다는 제자의 댓글을 확인한 일, 진로로 고민할 때 나이 들어서도 자신의 일에 열정인 아빠를 보면서 힘을 얻었다는 딸의 이야기를 전했고, 선배님도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학생들 곁에서 지켜온 가치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나이가 들고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을 다하고 있는 서로에게, 얼마 남지 않은 서로의 교직생활을 응원하는 마음을 전했다
우리의 진심이 전해져 제자들을 통해서도 대를 이어 전해질 선한 영향력에 대한 기대의 마음을 품으면서...
만남은 추억 이상의 자산이며, 현재 자신 모습의 총체다.
그 생각 끝에 만남을 미드(미국드라마)의 시즌제가 떠올랐다.
미드는 첫 시즌이 진행될 때 시청자들의 반응과 제작 여건들을 고려해서 계속 시즌을 이어갈지를 결정한다고 한다. 21번째시즌을 이어간 <그레이 아나토미>는 주인공과 시청자가 함께 늙어가는 극강의 감정이입을 체험시킨다.
그리고 매 시즌 사이에는 긴 공백이 있다.
그러니 재회라는 것은 시즌 1의 공백을 넘어선 시즌 2가 아닐까?
신기한 것은 재회도 그 공백이 무색할 정도로 앞의 기억이 완결된 채로 어색함 없이 스토리가 이어진다는 것이다.
시즌 1의 첫 번째 에피소드를 통상 파일럿(pilot)이라고 한다. 시청자들의 반응을 보는 탐색전 같은 느낌이다. 우리의 만남은 파일럿 에피소드를 거치고 시즌 중의 지속성을 통해...
자연스러운 운명 같은 다음 시즌을, 혹은 서로 의도하여 운명을 만들어가는 다음 시즌을 기약하기도 한다.
이전 시즌의 진심은 오랜 공백을 넘어서 이어지는 연결고리다.
의도하든 안 하든, 만남의 길이보다 그 순간의 진심과 교감이 더 중요하다. 그러니 "2시간 짜리 영화에서는 2시간이 영원이잖아요."라는 드라마 대사처럼 진심을 다한다면 만남의 짧음에 너무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혹 다음 시즌이 없다고 그전 시즌이 의미 없는 건 아닐 것이다. 소중함 그대로 훼손 없이 추억으로 박제될 것이니까.
엇갈리듯 각자의 삶을 살다가 다시 행로가 겹쳐 짧은 재회의 순간을 의도적으로든 우연히든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며, 이전의 만남 자체가 축복과 선물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회가 된다.
그렇다면 교사들은 열어주기를 기다리는 잠재된 선물들이 가득 쌓여 있는 것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