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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은 나와 다른 감정이 있다

다른 사람은 다른 감정을 가진다는 것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배울때

이론적으로 생각하면 사람들은 다 각자만의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지식으로 아는 것과 분위기와 상황을 몸으로 경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어렸을때 저의 기억에는 아버지의 감정은 불안했습니다.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것 같은 분노와 불안함 그리고 두려움의 감정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아버지와는 대면 하지 않는 것이 무서운 상황을 피하는 방법이라고 저 나름대로는 생존전략을 세운것 같습니다. 그래서 집에서는 항상 자신의 표현을 하지 않고 조용하게 지내는 아이였습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자녀들의 생각이나 감정이 자신의 것과 다르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나 봅니다. 아버지와 감정이나 생각이 다르면 화를 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이 무서워서라도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이야기 하기 어려웠습니다. 저는 특히 겁이 많은 아이였기 때문에 결국은 상대방이 화내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은 없고,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어주는 방향으로 삶을 살았습니다. 지난번에 글에서 트라우마에 대응하는 4가지 F반응(Flight, FIght, Fawn, Freeze) 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Fawn에 대한 이야기를 한적이 있는데, 바로 Fawn이 그러한 대응방법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다 하다가 도저히 못견디겠으면 사회에서는 회사를 바꾸거나 다른 곳으로 도피하는  것으로 해결방법을 찾았습니다. 


살기 위해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죽인 세월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자신과 타인을 구분할 수 있는 경계가 모호해졌습니다. 도대체 독자적인 생각과 감정 없이 어떻게 한 사람의 정체성이 만들어질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저는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는 선택을 무의식적으로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제가 이런 선택을 했다는 것 자체를 망각해버린 것입니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생존만이 인생의 목적이 된 삶은 비극이었습니다. 모든 상황을 생존에 위협이 되는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으로만 인식하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삶의 어떤 의미를 찾거나 자신의 재능을 살리는 것에는 관심도 갖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한 시각을 가지면서 삶에서 중요한 많은 것들을 다 놓치고 살아 왔습니다. 살았지만 살았다고 할수 없는 이런 삶을 살면서 자신이 어떠한 상황인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먹고살수는 있지만 의미있는 삶이나 깊이있는 삶을 살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친밀한 관계를 맺기는 매우 어려워 집니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이나 생각을 읽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자기 자신만의 생각과 감정에 과하게 집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생각해보면, 어쩌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자신의 생존이 위험한 상황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감정에 신경을 쓸수 있겠습니까?  돌아보면, 저도 아버지를 두려워 했지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저 자신도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오랜시간동안 나의 안에 있는 두려움을 보게되었고, 그러한 두려움을 마주하고 그 두려움을 충분히 느껴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동안 회피했던 감정이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저의 안에 쌓여있던 두려움과 수치의 감정등이 줄어들면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다른 사람들의 상황과 감정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들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생각의 범위가 넓어지고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돌아볼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자신의 욕구는 다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만 맞추는 왜곡된 트라우마의 반응도 아닙니다. 돌아보면 참 꼬여도 너무나 꼬였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삶으로의 발을 내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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