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딸, 할머니랑 아빠 말씀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구...'
엄마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애써 눈물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돌리고는 흠, 하고 헛기침을 한뒤
나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자, 엄마랑 꼭 약속해, 할머니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고 있으면 엄마가 꼭 데리러 올께. 알았지?'
'....응...' 오랜 망설임 끝에 엄마가 내민 새끼손가락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며 나는 일곱살 어린마음에도
직감적으로 이제 두번 다시 엄마를 볼 수 없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마음한켠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멀어져 가는 엄마를 쫓아가며 소리를 질렀다. 안돼 엄마!! 엄마 가지마아! 엄마아!!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의 몸부림을 치며 엄마한테 다가가 안겨 펑펑 울자, 엄마도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몇분을 그렇게 울었을까. 아니 몇초도 안되었을까.
이내 아빠가 다가와 '이제 가자!' 하며 손목을 잡아끌면서 엄마에게서 나를 떼어냈고, 그자리에 주저앉아
고개숙이고 울고 있던 엄마의 모습만이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거짓말처럼 엄마와 헤어지고 나는 낯설음에 혼자 던져졌다.
나는 주로 인천 외갓집에서 생활을 했었고, 두 동생들은 광명시에서 할머니와 고모네 식구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는데 내가 오자 동생들은 나를 서먹해했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집안 사정상, 세자매가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한집에서 자란 일이 별로 없었는데, 이번에 내가 오게 되면서 처음으로 완전히 같이
지내게 된 것이었다.
웃음 많고 애교도 많고 노래도 잘해서 늘상 한복을 입고 동네 어른들께 인사를 하고, 할머니앞에서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같은 트로트 노래를 곧잘 불러드려 할머니를 즐겁게 해드렸었다는 그 꼬맹이는 엄마와의 새끼손가락 약속이후 많이 변해 돌아왔다.
광명시에 다시 돌아온 이후 나는 웃음이 사라졌고, 툭하면 짜증을 냈고 누군가 큰소리만 내도 말없이
눈물부터 흘렸고 그러다 화를 내기도 했는데 그 대상이 모두 아빠와 할머니와 동생들이었다. 그때 나는 그들 모두가 짜고 나와 엄마를 갈라놓았다는 생각에 모두를 적대시했다.
하지만 엄마와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할머니는 대상에서 제외시켜야 했다. 아빠는 어차피 같이 살지도 않으니 대상이 되고말고 할것도 없었다. 남은건 동생들과 공부뿐인데, 공부는 아직 제대로 해본적도 없으니
학교가서 내가 열심히 한다면야 어떻게든 될것 같았다.
결국 나의 적대감의 대상은 고스란히 동생들 몫이 되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동생들을 쌀쌀맞게 대했고 놀아주지도 않았으며 동생들을 투명인간 취급했다
'언니...'라고 말만 붙일라 치면 '왜! 나한테 말시키지마!' 라며 말 붙이는것조차 원천봉쇄 시켰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두 동생은 저희들끼리만 어울렸고, 나는 동네에 아는 친구도 없었기에 혼자 방에 틀어박혀 온종일
책만 읽곤 했다.
할머니와 동생들과 지내면 지낼수록 외갓집과는 분위기가 너무나 달랐다. 하루하루가 숨이 막혔다.
동생들이 조그마한 잘못을 해도 할머니는 매질을 크게 하셨다. 손바닥이나 종아리를 때리는것도 아니고, 그냥 그 아이들이 앉아있거나 서있는 상태에서 할머니 손에 잡히는 물건이 있으면 그걸 집어들고 바로 아무곳이나때리셨다. 그럼 동생들은 반사적으로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잘못했다는 말만 반복적으로 했다.
나는 처음에 그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 혹시 나도 저렇게 맞게 되는건 아닐까 겁에 질렸다.
당장이라도 외갓집으로 가서 엄마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엄마, 할머니가 너무 무서워, 동생들을
마구 때려, 나좀 데려가줘 제발'
하지만 이말은 허공에서만 맴돌 뿐, 나는 입술을 깨물며 곧 현실을 깨달았다. 나는 더이상 갈곳이 없다는 걸.
저렇게 동생들처럼 맞게 되더라도 여기서 엄마가 올때까지 버텨야 한다는 걸
그렇게 할머니에게 맞고 있는 동생들을 계속 보고 있자니 어느새 적대감은 사라지고 안쓰럽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를 말리지도, 동생들을 보호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