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종족-7.
브리지트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흥분감에 떨어야 했다. 말아쥔 손에 땀이 나고 그녀의 심장이 비명을 질렀다. 자신에게 초록의 영혼이 있고 로운은 자신을 닮으려 했다. 심지어 바람의 영혼을 가진 남자와의 사랑까지도 부러워했다는 말에 그녀는 들썩였다. 몇 달 전 꿈처럼, 그때도 숲 속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햇살 아래 카린과 살랑이는 얘기를 나누며 행복해했을 것이다.
그들의 고향은 아틀란이었다. '세상은 이미 가득 차 있고, 우리 아틀란인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말에서 알 수 있었다. 고대로부터 사람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전설의 초 고대 문명 아틀란티스가 맞다면, 그곳은 서쪽 바다 어딘가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갈 수 없는 웜홀 반대편 다른 우주 항성계에 존재했다. 환상의 아틀란티스 문명은 모든 것을 물질의 풍요로움과 연결 지어야 직성이 풀리는 영장류 특유의 과잉 망상에서 비롯됐다. 사람들이 기대한 것처럼 완벽한 세상도 아닐뿐더러 황금빛 찬란한 유토피아도 아니었다. 불편해 보일 정도로 거칠고 단조롭고 투박한 것이 어느 미개발지 같았다.
오래전 브리지트는 그 귀가 뾰족한 작은 악마들에게 짐승(노예. 짐승)처럼 살면 안 된다고 말했고, 손끝에서 거대한 다중의 평행 우주와 웜홀을 펼쳐 보여주었다. 브리지트는 이 전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전달해야 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었고, 웜홀을 자유롭게 오가며 광대한 우주를 여행하는 바람의 영혼을 가진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였다.
뉴욕은 지금 밤 10시였다. 로운의 기억을 뉴욕의 세 사람과 공유하기 위해 영상 통화를 하려는 것이다. 브리지트는 로운의 폰에 저장된 헬렌의 사진을 보거나 얘기를 들을 때면 속에서 뭔가 움직거리는 듯했다. 그 느낌은 이번 생에서 그녀가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카린이 노트북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전기 코드를 꽂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바닥에서 소파로 옮겨 앉은 그녀는 두 손을 가슴에 얻고 연신 심호흡했다. 긴장과 기대감 사이에 놓인 그녀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했다. 절정에서 내려오자 다시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려서 보여주면 좋을 것 같아."
어려서부터 레오에게 그림을 배운 로운은 그림을 쓱쓱 잘 그렸다. 잽싸게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 크로키북을 들고 나와 브리지트 옆에 앉았다. 준비를 마친 카린도 그녀 옆에 앉았다. 양쪽에서 카린과 로운이 호위하듯 바싹 붙어 있음에도 그녀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카린, 이상하게 떨려. 아니 뭐랄까, 마치 울림 같아. 내 안의 영혼이 요동치는 느낌이야."
그녀가 카린에게 말했다.
"좀 전에 영상 통화를 하자고 하니까, 헬렌의 목소리도 떨렸어. 그녀도 그런 것 같아."
카린이 브리지트의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
"헬렌이? 뭔지는 몰라도 두 사람 관계가 있는 것 같아."
로운이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귀로 들리는 주변 분위기와 상관없이 앞에 있는 앵글로·색슨족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헬렌도 마찬가지였다. 보이지 않는 끈이 두 사람을 연결한 것처럼 무의식 비슷한 상태로 서로가 바라보고 그저 좀 더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알 수 없는 감정에 이끌린 헬렌이 손으로 화면을 집자 브리지트도 손을 마주 대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한 채 손을 마주 대고 그대로 있었다. 뉴욕과 서울 간 11,046km 떨어져 있고, 인종과 언어가 다른 두 사람이 공간을 뛰어넘어 느낌의 언어로 대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말로는 표현하기 부족한 안타까운 언어들이 촉감을 통해 서로에게 전달됐다. 친근함, 그리움이 뒤섞인 애틋한 언어였고, 그녀들의 영혼이 이만 년 동안 간절히 기다려오던 느낌이기도 했다. 헬렌과 브리지트 눈가에 물기가 고이더니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금 헬렌과 브리지트의 영혼이 엄청나게 빛나기 시작했어. 이렇게 빛나는 것은 처음 봐. 환하게 웃는 것 같아."
영혼을 볼 수 있는 로운이 신기한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사실, 이러한 소통방식은 오래전 영혼의 종족이라 불리던 그들이 즐겨 쓰던 원시적 대화방식이었다. 대지와 나무, 햇살과 숲, 개울물과 자갈이 서로 소통하듯 그들은 영혼을 가진 다른 생명체들과 소통해 왔다.
"다른 방식으로 진화."
카린이 말하자, 모두가 이어지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 문명의 중심축은 사람이 아니라 물질이라고 생각해. 다들 물질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하지. 인류는 처음부터 전쟁을 일삼으며 같은 종족들마저 노예 혹은 종이라 부르며 소유권을 주장하고 사용가능한 물질로 취급했어. 인류가 위대하다고 말하는 성경과 수많은 문학작품에도 버젓이 등장하지. 절대 권력을 가진 사제와 맹신하는 신도, 왕과 충성스러운 신하, 은혜를 베푸는 주인과 복종하는 종의 관계. 인간은 누구나 신처럼 행세하고, 왕처럼 대접받고, 주인처럼 지배하려 해. 그러자면 권력이 있어야 하고 권력은 물질에서 나와. 크든 작든 그 어떤 권력도 물질 없이는 생겨날 수 없어. 물질은 거짓 추종자와 비굴한 부역자를 만들고, 삶과 죽음을 가르는 전지전능한 신으로 굴림하면서 모든 것을 통제해. 인간의 도덕성과 생각까지. 누구도 물질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의 호모 사피엔스는 물질의 발전을 유일한 문명의 진화로 여겨, 그들의 머릿속은 물질에 관한 방대한 지식으로 꽉 차 있어. 그래서 위험천만한 것들을 쉼 없이 만들고, 그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새로운 것을 빠르게 만들어내지. 누군가 새로운 것을 만들고 팔아 큰돈을 벌거나 많은 재산을 물려받으면 열렬히 칭송해. 낮은 신분인 노예가 주인을 대하듯 하지. 그러나 물질로 이룬 문명은 지속 가능하지 않아. 누군가 많이 가지면 대다수는 적게 가져야 하거든. 노예의 꿈은 자유가 아니라 주인이 되는 것이고, 짐승의 욕망은 지배를 원하니까. SF 영화처럼 고도로 지능화된 외계인이 침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무너지게 돼 있어. 고도로 지능화된 외계인이라면 그런 골치 아픈 일은 벌이지 않아. 가만히 놔둬도 극심한 갈등으로 인해 붕괴할 것이고, 그들의 과학 기술로도 어떻게 해볼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된 행성 따위는 필요치 않으니까. 그렇다고 아쉬워할 것 없어. 광대한 우주의 시각으로 본다면, 어느 행성의 한 종족이 생겨나 수천 년간 문명을 이루다가 사라지는 현상은 평범한 사건이자 찰나일 뿐이야."
카린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반면에 우리 아틀란인들은 물질이 아닌 영혼을 기반으로 진화한 것이 분명해. 이제 이해가 됐어. 왜 우리가 혈연관계로 맺어진 부모 형제와 섞이지 못하고 떨어져 나왔는지. 두 생명체는 애초부터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야. 그들은 본능적으로 우리를 이질적인 존재로 느꼈겠지. 우리의 공통점은 물질에 그다지 관심 없고 무엇을 섬기거나 추종하지도 않아. 신에게 기도할 줄도 모르지. 아틀란의 아이들처럼 거칠고 개성이 강해. 그렇다고 폭력적이란 소리는 아냐. 규격화되어있지 않고 규정된 도덕률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야. 영혼은 본래 자유로운 존재고, 자유로운 생명체만이 영혼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지. 결국 우리는 그들로부터 떨어져 나왔어. 아니 그럴 수밖에 없게끔 내몰렸다고 봐야지. 그리고 그들도 우리를 찾지 않았어. 전에 한번 꽃가게 건너편 호텔로 꽃 배달을 갔을 때 아버지와 마주친 적이 있어. 마치, 언젠가 한 번 본 사람인데 생각나지 않아 머뭇거리듯 한 표정으로 나를 잠시 쳐다봤어. 그러다 그의 아버지가 내게 지어준 이름을 짧게 뱉어내더니 그냥 지나쳐버리더군. 내게 별다른 감정을 못 느끼는 사람처럼 보였어. 아마도 루시안이 우리에 대한 그들의 감정을 지운 것 같아. 가해자가 느껴야 하는 피해자에 대한 죄의식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은 오로지 악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사람의 뇌는 어떤 사람에 대한 좋거나 싫거나 하는 다양한 감정이 없다면 굳이 떠올리지 않거든. 우연히 마주쳤다 해도 그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지. 우린 그들에게 잊힌 존재야. 그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지. 본인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자식과 형제에게 저지른 끔찍한 실수를 기억하고 산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니까."
"그러니까 카린 너의 말은, 우린 그들과 다른 종족이고 거기서부터 수수께끼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뜻이야?"
레오가 질문하듯 말했다.
"맞아. 호모사피엔스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전혀 다른 종족이야. 우린 그들보다 훨씬 이전의 종족이기도 하고. 지속 가능한 문명을 이룬 종족이기도 해."
"난 카린의 생각에 동의해, 브리지트가 아틀란 아이들에게 보여준 평행 우주에는 매우 느리게 회전하는 거대 우주와 빠르게 회전하는 작은 우주가 모래알처럼 많았어. 또 각각의 우주에는 수많은 은하와 지구와 같은 환경을 가진 행성도 셀 수 없이 많지. 그렇다면 아틀란 행성은 느리게 회전하는 거대 우주에, 지구는 빠르게 돌아가는 작은 우주에 속해 있지 않나 싶어. 우린 나태하게 보일 만큼 여유로운 습성을 가졌고, 이곳 사람들은 정신없이 빠르게 사는 습성이 배어있으니까. 그곳과 이곳의 시간 흐름도 달라. 루시안과 로운이 이만 년 전 그때도 있었고 현재도 있는 것으로 보면 짐작할 수 있지. 그리고 카린의 말처럼 우리 아틀란인들은 물질이 아닌 영혼을 기반으로 진화한 것이 맞아. 우주에 수많은 생명체가 똑같은 방식으로 진화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억지야. 게다가 진화 과정에서 묘한 능력도 생긴 것 같아. 물론, 우리끼리는 능력이라기보다 일반적 현상에 불과하지만, 이곳 사람들에겐 영향을 끼쳐."
레오가 말을 이었다.
마날이 말했다.
"난 어려서부터 춤추는 것을 좋아했어. 이슬람 사회에서 여자애가 춤추는 것은 아버지나 남자 형제들에게 명예살인을 당해도 싼 중 죄악이지만 말이야. 내가 춤을 추면 집안이 달아올랐어. 아버지와 어머니는 방탕한 계집처럼 보인다며 춤추지 말라고 했어. 그래서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추고, 숲에서 추고, 밤하늘에 별빛이 쏟아지는 들판에서 췄어. 난 몸이 반응하는 대로 춘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어. 되돌아보면, 내 영혼이 그리워하는 것을 춤으로 표현했던 것 같아. 레오의 그림처럼 바람, 숲, 물, 별, 대지 등을 춤으로 그렸던 것이지. 춤에 빠져있으면 누군가 다가와도 모를 때가 많아. 14살 때쯤으로 기억해, 그날은 땔감으로 쓸 나뭇가지를 주우러 동네 아이들과 먼 숲으로 갔어. 그곳엔 포탄에 쓰러진 나무가 많았거든. 한 짐을 가득 등에 지고 마을이 보이는 언덕 위로 올라섰는데, 눈 덮인 히말라야산맥 너머로 해가 지지면서 사방이 붉게 타올랐어. 나도 모르게 등짐을 벗어던지고 춤을 추기 시작했지. 밤하늘에 별이 뜰 때까지 계속 췄어. 내가 춤에서 깨어나자 마을 사람들이 저만큼 떨어져 바라보고 있었어. '부정한 년' '주변이 새까맣게 다 타버렸어.' '춤이 뱀 혓바닥처럼 날름거려. '악마의 불꽃이야.''라고 전에 한 번쯤 악마를 본 사람들처럼 수군거렸어. 처음부터 혼자였지만 그때부터 더 혼자가 됐고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로부터 명예살인을 당할 것으로 생각했지. 하지만 그런 율법에 딱 맞는 일은 생기지 않았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는 전통 방식이 있었거든. 다른 마을에 사는 부인이 둘씩이나 딸린 나이 든 남자에게 팔아버리는 것이야. 글쎄, 그 나이 든 남자의 막내딸이 나보다 세 살이나 더 많더라고... 혼인을 빙자한 합법적 강간이지."
"그리고 몇 년 후, 탈출해서 이곳으로 와 핼렌, 카린, 레오 그리고 아기인 로운을 만났어.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내가 춤을 추면 즐거워해. 나는 지금도 카린이 소개해준 클럽에 가끔 나가 사람들 틈에 섞여서 춤을 추고 약간의 돈을 벌어. 내가 춤을 추면 분위기가 금방 달아올라 클럽 사장 포터에겐 이득이지. 물론, 내키는 대로 신나게 추진 않아. 내가 만약 집에서 추는 것처럼 맘껏 춘다면 클럽은 불타버리고 말 테니까. 레오가 거리에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듯 아주 많이 절제해서 춰. 그런데도 사람들은 내 춤이 무척 뜨겁다고 해. 사실 뜨거운 것은 내 춤이 아니라 본인들의 야릇한 욕망이지."
마날의 끝말에 모두 헛웃음이 터뜨렸다.
"너희는 가족과 집을 떠나 이곳으로 왔지만 난 떠날 수 없었어, 이 집은 처음부터 내 명의로 되어있거든. 대신 그들이 떠났지."
조용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헬렌이 말했다.
모두가 의문스러운 시선으로 브리지트를 바라봤다.
모두의 시선이 황홀감에 빠져 몽롱한 상태인 브리지트에게 향했다.
로운이 말했다.
"별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야. 내 기억으로는 그때 뒤에 있던 움미아들에게 각각 불, 물, 별의 기운이 느껴졌어. 그렇다면 불의 영혼은 마날, 물의 영혼은 레오, 초록의 영혼은 브리지트와 나, 바람의 영혼은 카린 그리고 헬렌은 항상 포근하게 감싸주는 느낌을 줘. 바로 대지의 영혼이지. 그러나 걱정하지 않아. 그도 곧 나타날 테니까. 하지만 그전에 뉴욕으로 돌아가할 일이 있어. 난 헬렌의 주름살이 정말 맘에 안 들어."
갑작스러운 로운의 끝말에 당황한 헬렌은 민망한 듯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내... 내가 브리지트처럼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
"어차피, 일가친척 중에 찾아오는 사람은 린다밖에 없잖아. 그것도 가끔. 그리고 뭐, 손님들은 꽃가게 주인이 바뀐 줄 알겠지."
"그럼 나는?"
마날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치듯 물었다.
"마날의 가로 목주름도 맘에 들지 않아, 겨우 오 년 만에 그렇게 깊게 생겨버리다니 도대체 피부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나도?"
레오가 물었다.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어, 그리고 이건 본인이 선택하는 게 아니야. 어쩌면, 그것이 내가 여기로 온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모두의 육체를 영혼의 나이로 돌려놓는 것. 단순히 젊어진다는 의미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다는 느낌이 들어. "
로운이 결심한 듯 앙큼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로운이 정 그렇다면 뭐 할 수 없지. 다시 귀찮게 생리를 한다 해도...."
헬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지만 기대감에 찬 표정까지는 숨길 순 없었다. 모두가 웃음이 터뜨렸다.
"헬렌과 브리지트 그리고 로운,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 넷이 뉴욕 거리를 걷는다는 생각만 해도. 너무 흥분돼."
마날이 뮤지컬 배우처럼 양팔을 펼치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