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공간이 바람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쯤은 아이들도 안다.'- 바람을 부르는 숲 브리지트.
16.
매일 아침, 브리지트가 잠에서 깨어나 꿈과 현실이라는 불안한 경계에 머무를 때면 바람이 불어왔다.
"잘 잤어?"
"무슨 꿈 꿨어?"
"배고파?"
조심스러운 손길이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물어왔다. 복잡한 어휘에 익숙지 않은 7살 된 남자아이가 또래 여자아이에게 묻는 듯 짧은 문장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귓가에 맴돌았다.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그녀는 바람을 떠올렸다. 어떨 때는 깊게 또 어떨 때는 뜨겁게 다가와 힘 하나 안 들이고 스며드는 것이 마치 바람 같았다. 지금은 부드럽게 불어와 몽환의 세계에서 막 빠져나와 허공에 떠 있는 자신을 가볍게 안아 단단한 땅으로 슬며시 옮겨놓는 느낌. 그녀는 이보다 다정하고 더 행복한 순간은 알지 못하는 여자처럼 미소 지었다. 그녀가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당겨 얼굴을 비볐다. 그리고 지난밤 꿈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렇게 바람은 쉼 없이 불어왔고 그녀는 나부꼈다.
브리지트와 로운은 단짝처럼 죽이 잘 맞았다. 아침 식사를 마치면, 둘은 거실 바닥에 털퍽 주저앉아 서로의 머리를 땋주고 이파리와 꽃 모양 밴드로 꾸미며 얘기를 했다. 여자들 대화가 흔히 그렇듯 수다스러웠고 불쑥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깔깔거렸다. 그녀들이 유치한 놀이에 빠져있는 동안, 주방일을 마친 카린은 책을 한 권 들고 와 소파에 기대어 읽었다. 그러다 이따금 한쪽 엄지손가락을 낀 상태로 책장을 덮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는 주로 인류 고대사와 관련된 책을 읽었으나 표정은 연예인 화보 뒤적거리듯 한가로웠다. 만약, 풍요로운 미래를 위해 바쁘게 살며 불안·초조로 자신을 끊임없이 학대하는 마조키스트들이 본다면 신비로운 광경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남자는 꽃집을 폐업했고, 여자는 교사직을 사퇴했고, 아이는 학교를 그만뒀다.
로운은 어제부로 자퇴했다. 16살은 무엇이든 스스로 결정할 나이였으나 미성년인 관계로 카린이 법적 보호자로 나섰다. 셋은 학교에 함께 갔다. 브리지트와 로운은 숲속 밖으로 외출 나온 수줍은 요청처럼 꾸몄다. 하얀 단색 원피스에 머리를 굵게 땋아 뒤로 올려 이파리와 꽃들로 마무리한 두 요정은 모두의 시선을 붙잡았다.
담임선생은 짜증을 무덤덤한 가면으로 한 꺼풀 감춘 듯한 삼십 대 후반의 여자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피곤한 직업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그런 삶에 지쳐 그런 인상을 가지게 됐는지는 모른다. 상담실로 안내한 담임선생은 '뉴욕으로 돌아가더라도 얼마 남지 않은 1학기는 이수하고 재학 증명이 있어야 그곳에서 학교에 갈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쇼핑몰 안내 방송처럼 정리된 말투엔 약간의 신경질적인 반응도 섞여있었다. 어쩌면, 두 요정의 청순한 모습과 초록의 향기가 무덤덤해진 여자의 지나간 욕망을 되돌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로운은 앞으로 학교에 다니지 않을 것이라 했다. 미래에 대한 계획을 물어봤으나 그런 것은 있지도 않았다. 보통 자퇴하는 아이들 표정엔 해방감보다 미래에 대한 숨겨진 두려움이 나타나고, 부모가 대신해 앞으로의 계획을 구구절절 설명했다. 그러나 이 아이는 달랐다.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소한 결정을 존중해 달라는 여유만만한 태도였다. 평소처럼 생글거리는 모습에 고심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함께 온 숙모와 삼촌이라는 젊은 남녀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옅은 미소를 띤 채 조용히 듣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본인이 결정할 사항이라 여기는 듯했다.
담임선생은 나이가 어린 이들이 철없는 환상에 사로잡혀 이상과 현실을 구분 못하고 즉흥적으로 살아가는 무책임한 얼간이라 단정 지었다. 일주일만 지나면 여름 방학이 끝남과 동시에 1학기도 마치는데 자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들은 교육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낡은 관습 정도로 취급하는 것이 분명했다. 담임선생이 개인과 사회에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줄 의무감이 충만했을 때였다.
"난 바쁜 노예로 살고 싶지 않아요."
청중을 사로잡듯 나직하면서도 또렷한 목소리로 로운이 말했다. 담임선생은 예상치 못한 소리에 움찔했다.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이 아이는 공부엔 전혀 흥미가 없었다. 평소에 야간 자율학습도 참여하지 않고 학원도 다니지 않았다. 머리를 땋고 다니지 말라고 해도, 교칙에 단정하라는 말은 있어도 머리를 땋지 말라는 규정은 없다며 꿋꿋이 땋고 다니는 다소 엇나간 아이였다. 그렇다고 해서 불량스럽진 않았다. 눈빛이 갓난아기처럼 맑은 아이는 항상 생글거렸고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었다. 담임선생은 '바쁜 노예'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어졌다.
로운은 잠시 뜸을 들여 시선을 끈 후에 말을 이었다.
"일찍 일어나 8시 10분까지 등교해서 오후 16시 30분에 끝나면 보충 수업을 시작하고, 보충수업이 끝나면 밤 8시 50분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하죠. 그리고 또다시 학교 앞에서 기다리던 노란색 학원버스를 타고 학원으로 가죠. 온종일 밤늦도록 배우고 끊임없이 문제를 풀지만 정작 어떻게 해야 행복한 삶을 사는가는 배우지도 풀지도 못해요. 그것을 배우고 풀었다면 지금처럼 불만과 불안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되진 안 있을 것이에요. 대다수가 좋은 대학을 목표로 공부하고, 성적이 떨어지는 아이들은 어떻게 든 돈을 벌려고 하죠. 순수한 의도로 변호사가 되어 억울한 사람을 변호하고, 의사가 되어 병든 사람을 무료로 치료해주고, 집을 지어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고, 과학자가 되어환경을 개선하는 기적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요. 전망 좋은 고층 아파트에서 내려다보고, 고급 차를 타고, 값비싼 명품 핸드백을 들고, 고상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품격 높은 삶을 찬양받고 싶을 뿐이에요. 나는 그것을 찌질한 삶이라 생각하지만."
곧은 자세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맞대고 차분히 말하는 로운은 훌륭한 연사였다. 세상을 꼼꼼히 관찰하고 밑줄을 그어가며 공부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소리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물론, 난 자율학습도 참여하지 않고 학원도 다니지 않아요, 하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나갈 지경이예요. 그렇게 바쁜데 어디 생각하고 행동할 틈이나 있겠어요?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보이는 대로 허둥지둥 따라갈 뿐이죠. 그게 바로 노예예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는 사람. 입으로 자유를 외치지만 정작 자유가 뭔지 몰라요.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요. 주인인 사회가 명령한 대로, 어려서부터 돈과 유명세를 목표로 바쁘게 살아왔기 때문에 성인이 돼서도 뭔가 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사람처럼 불안에 시달리죠.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해요. 직장에 다니는 여자가 수시로 학원 시간 체크해 아이에게 전화하고, 퇴근 후 마트에 들러 서둘러 장을 봐 집에 가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한 다음 학원으로 아이를 데리러 가요. 수학, 영어뿐 아니라 태권도, 수영, 피아노, 미술을 가르치고, 주말이면 함께 서점에 가서 책을 사주거나 박물관에 데려가죠. 왜들 그렇게 가르치고 배우는 게 많은지 일일이 열거하기도 숨차요(정말 숨차 보였다). 어디 그뿐인가요. 본인들은 헬스를 다니고, 요가를 배우고,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각종 강좌를 찾아다니죠. 책 한 권을 읽어도 넷플릭스로 영화 한 편을 봐도 근사하고 대단한 것이라도 한 것 모양 SNS에 올려 관심을 끌려 하죠. 그럼 뭐해요. 그 많은 지식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어떻게 살면 행복한가 하는 간단한 문제조차 풀지 못하고, 그 많은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항상 외로운데."
담임선생은 쓰라린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쓰고 있던 무덤덤한 표정의 가면이 벗겨진 줄도 몰랐다. 미간에 사이에 주름이 잡혔다. 너무나 평범해서 대담하게 일어나는 지독한 현실은 본인의 이야기였다.
"그렇게 바쁜데 부부간에 달콤한 대화는 언제 하나요. 아니, 그런 말을 하고 싶어도 낯설고 어색해서 할 수 없죠. 노래 가사에서나 흘러나오는 단어가 돼버렸어요. 머릿속이 온통 아이들 교육과 부동산 그리고 돈에 관한 것들로 꽉 차 있어 다른 얘기는 생각나지도 않아요. 어쩌다 대화가 오갈 땐 말라비틀어진 소리뿐이에요. 월급 타서 사교육비와 은행 대출이자, 카드대, 공과금, 차량 할부금을 내고 나면 통장에 남는 것도 없죠. 전쟁에서 지고 돌아온 패잔병처럼 축 쳐져 퇴근한 남편은 남자로 보이지 않고, 직장 스트레스와 해도 해도 끝없는 집안일로 항상 짜증 난 얼굴을 하고 있는 아내가 여자로 보이지 않아요. 결혼 전, 상상하던 그 남자와 그 여자는 처음부터 없었어요. 대신 아버지가 된 남자와 어머니가 된 여자가 부부라는 명칭으로 생리적 경제적 동업관계를 이어가죠. 그러다 보니, 세상은 서로에게 무반응한 남녀가 한집에서 지내는 기괴한 광경투성이에요. 하긴, 그런 내키지 않는 아내와 남편에게 충동이 느껴진다는 게 더 이상하지만. 그러다 보니 다들 불안하고 불만에 차 있어요. 그럼에도 바쁜 노예처럼 정신없이 사는 것을 부지런하고 성실한 삶이라 생각해요. 시간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버리고, 소중한 삶을 낭비한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아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바쁜 삶에 중독돼서 그래요. 사회가 교육을 통해 이루려는 최종 목적이죠. 사회가 시킨 데로 생각하고, 하라는 데로 움직이며 땅에 묻혀 흙과 하나가 순간까지 쉼 없이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예이자 대체 가능한 부속품들. 이것이 내가 학교에 다니지 않겠다는 이유예요.
16살 아이의 설득력 있는 연설은 담임선생의 보편적 삶에 대한 믿음을 무너뜨려 놓고 부드럽게 끝맺었다. 담임선생은 심한 충격을 받았다. 남들처럼 평범한 삶이라는 위안은 절망이 곁들여진 정신 승리에 불과했다. 지금 같은 삶은 결코 기대한 적 없으나 선택은 언제나 기대하지 않은 쪽으로 해왔다. 누구나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삶은 형편없이 쪼그라들었고 앞으로 더 쪼그라들 것이라는 생각에 분하고 억울했다.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으나 소용없었다. 인내심이 바닥난 사람처럼 미치도록 소리치고 싶었다. 생글거리는 아이의 얼굴이 담임인 자신을 비웃는 악마처럼 보였다.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요?'라고 넌지시 유혹하는 것 같았다. 온갖 반사회적 금지된 욕망이 솟구쳤다. 그렇게 살고 싶었다.
잠시 침묵하며 격렬한 감정을 가라앉힌 담임선생은 앞에 있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다지 영리해 보이지 않게 생긴 남자와 까무잡잡한 피부의 독특한 매력이 넘치는 여자였다. 외형적으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은 묘하게 어울렸다. 기껏해야 이십 대 후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이들이 로운이 말한 삶을 살지 않을까. 나이를 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나이가...?"
"둘 다 서른아홉이고 숙모도 지난달까지 고등학교 선생님이었어요."
로운이 대신 대답했다.
담임선생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이들도 로운이처럼 눈빛이 맑았다. 특히, 여자의 새까만 눈동자 속에는 무언가 가득차 있는듯 했다. 시선을 떼기 힘들었으나 정작 두 사람은 자신의 놀란 모습에는 무관심한 표정이었다. 테이블 위에 얹혀 있던 남자의 손이 내려가는 게 보였다. 테이블 아래로 여자의 손을 잡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서로를 비스듬히 마주 봤다. 이어서 반응이 일어났다. 그녀가 미소 짓자 그도 따라서 미소 지었다. 조금 전까지 짓고 있던 미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미소였다. 그녀의 매혹적인 새까만 눈동자 속엔 영리해 보이지 않는 그 남자가 있었다. 담임선생은 헉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브리지트는 누구보다 감동했다. 오래전 '말하는 짐승(노예)처럼 살면 안 된다'는 자신의 말을 로운은 기억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그녀를 흔들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흰색 원피스가 살며시 부풀어 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머리에 장식한 이파리와 꽃잎이 살랑거렸다. 담임선생이 고개를 돌려 상담실 창문을 확인했으나 닫혔고, 천장에 달린 에어컨은 설정된 온도에 이르자 멈춰 있었다. 기묘하게도 자신을 포함에 그 누구도 머리카락 한 올 흔들리지 않았다. 어딘선가 불어온 바람은 그녀 주위에서만 맴돌았다. 그녀로부터 풍겨나오는 초록의 향기가 진해지며 향긋한 맛을 내기 시작했다. 이 휘발성 화합물은 같은 종에 속하는 한 개체가 다른 개체로부터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분비하는 페로몬이었다. 후각으로 맡아진 향기와 시각으로 보이는 이미지가 담임선생 뇌에서 합쳐졌다. 담임선생의 뇌는 그녀를 바람에 나부끼며 페로몬을 뿜어내는 숲으로 인식했다. 그녀가 숲이 되어 바람을 부르는 것 같았다.
사실, 이것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생명체가 출현하기 이전부터 있어서 왔던 향기의 한 종류였다. 너무나 오래되어 인간이 알 수 없던 그 시절, 어떤 한 종족의 남자가 향기나는 숲속에 머물렀다. 그는 뛰어노는 아이 같았고, 아이처럼 말할 줄 아는 용감한 남자였다. 그에게 초록의 향기는 자신의 생명과도 같았다. 하지만 인간은 절대 맡아서는 안 되는 금단의 향기이기도 했다. 이것이 지닌 위험천만한 환각 성분이 공동체 사회에 끼치는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뇌 손상을 일으켜 거짓을 진실로 보이게 하고, 지엄한 사회 명령을 따르지 않는 독립된 이기적인 존재로 만든다. 사람을 나태하게 만들어 적게 벌어 적게 쓰고 모으지 않는 통에 사회 경제 시스템마저 붕괴시킨다. 기업이 파산하고, 가족은 해체되고, 부동산과 주식이 폭락해 자살자가 속출하는 끔찍한 상황이 일어난다. 세상은 지옥으로 변한다.
17.
"사귀던 남자 친구는 없어?"
브리지트가 로운의 머리를 땋주며 물었다.
"남자애들 이름은 몇 가지밖에 없어요. 나이키, 아디다스, 디스커버리, 갭 이렇게요. 꼭 걸어다는 광고판 같아요. 수컷 마운틴고릴라처럼 심각한 표정에 가슴을 내밀고 다니는 것이 지적이고 강한 남자라 생각해요. 그리고 어른 남자들처럼 엄숙하게 말하며 가르치려 해요. 내가 아는, 저 어리숙한 남자와 레오는 그렇지 않아요. 언제나 편하게 웃는 모습이에요. 가끔 진지한 표정도 하지만."
그녀는 수컷 마운틴고릴라 같다는 표현과 소파에서 책을 읽고 있는 카린을 힐긋거리며 흉보듯 말하는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적절한 비유였다. 그는 깊고 넓고 자유로워 오히려 어리숙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타고난 사냥꾼은 자신의 예리함을 절대 드러내지 않는 법이니까.
"아, 그리고 화가인 레오는 바다 같아요."
"바다?"
"네, 레오를 보면 바다처럼 출렁거리는 느낌이 들고, 카린은 마치 바람처럼... 바.. 람... 바람... 아론?"
로운이 말을 하다 멈추고 뭔가 떠오르는 듯 중얼거렸다. 테이블 위 탁상용 거울 속, 로운의 귓불에 찍힌 흐릿한 푸른 점과 붉은 점이 점점 커지며 꽃 모양 형태로 변해갔다. 로운의 귓불에서 푸른 각시투구꽃과 붉은 데이지꽃이 피어나면 기억이 떠오른다는 징조였다. 그녀가 소파에서 책을 읽는 카린을 불렀다. 둘은 얼굴을 찡긋거리며 떠오르는 기억에 집중하는 로운을 가만히 바라봤다.
로운의 떠오른 기억에 의하면,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을 북유럽 피요르드 해안가 언덕으로 옮겨 놓은 듯 사방 6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커다란 홀은 학교였다. 사방이 탁 트여 주변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다. 지구의 인류보다 오래된 문명치고는 찬란하지 않았다. 떠다니는 비행선도, 구름을 뚫고 솟아있는 고층 건물도, 공중에 떠 있는 하늘 정원도,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하이퍼 튜브도 보이지 않았다. 바쁘고 빠르고 높은 곳을 좋아하는 인간이 흔히들 상상하는 미래의 라스베이거스가 아니었다. 내려다 보이는 마을의 집들은 땅을 파고 그 위에 흙으로 지붕을 얹은 움집 형태에 가까웠다. 길은 키 큰 나무들 사이로 구불거렸고, 지붕은 나지막한 풀로 덮여있었다. 밤이 되면 따뜻한 불빛이 창을 통해 새어 나왔다.
그곳에 7, 8살 정도 된 소년과 소녀인 아담과 하와는 통제 불가능했다. 착한 아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처럼 행동하며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고 싸우고 소란스러웠다. 얌전해 보이는 아이조차 비밀스러운 음모라도 꾸미는 것 같아 방심할 수 없었다. 지구의 아이들과 굳이 비교하면, 교회 성가대원과 머리에 뿔 난 작은 악마였다. 귀 끝이 약간 뾰족하게 생긴 것으로 보아 악마가 틀림없었다. 만약, 수많은 규칙과 규정에 익숙한 이곳의 맞춤형 아이들이 그곳에 간다면 단 하루도 버텨내지 못할 듯싶었다. 수업 중에도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아이, 기둥에 기대어 있는 아이, 앉아 있는 아이 등 제 멋대로였다. 하지만 움미아인 브리지트가 말할 땐 모든 아이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무질서한 혼돈 속의 질서였다.
"우리의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사람, 해, 달, 별, 대지, 숲, 물, 동물..."
브리지트가 묻자 아이들은 주변을 돌아보며 보이는 대로 떠들썩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 사이의 공간은 비어 있을까?"
브리지트가 다시 묻자 아이들은 '바람'이라고 힘차게 대답했다.
"맞아, 공간은 바람으로 채워져 있어요. 세상은 여러분이 말한 것들로 이미 가득 차 있고, 우리 아틀란인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어요."
그때 아론이라는 남자아이가 벌떡 일어나 '바람'에 대해 좀 더 말해 달라고 했다.
"아주 까마득히 오래전, 시작의 바다에 큰바람이 불어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이 생겨나며 우주가 여러 개로 나뉘었어요."
브리지트가 설명하며 손짓하자 홀 바닥에서 작은 점이 소용돌이치면서 커져갔다. 아이들은 태풍의 눈처럼 회색 구름이 뭉클거리며 휘돌아 치는 3D 홀로그램 영상 위에 있었으나 무서워하지 않았다. 휘돌아 치는 구름 속에 반짝이는 것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셀 수 없이 늘어나자 서로 둥글게 뭉치기 시작하며 떠올랐다. 커다란 홀은 어느새 크고 작은 투명한 구슬로 가득 찼다. 어떤 것은 농구공만 하고, 어떤 것은 골프공만 했고, 어떤 것은 팽이처럼 빠르게 돌고 또 어떤 것은 답답해 보일 만큼 느리게 돌았다. 각각의 구슬은 하나의 우주였다. 브리지트가 손가락으로 빠르게 돌고 있는 골프공만 한 구슬을 톡 건드리자 확대되어 보였다. 그 안에는 수많은 항성계와 성간 그리고 은하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지구처럼 푸른 행성들도 모래알처럼 많았다. 어마어마한 광경에 아이들의 표정은 경건해졌고 눈빛은 별빛처럼 반짝였다.
브리지트가 다시 손짓하자 가느다란 선이 구슬과 구슬을 연결하며 휙휙 뻗어나갔다. 나뭇가지에서 다른 가지가 갈라져 나오듯 한 선에서 다른 선이 계속 갈라져 나오며 복잡하게 연결해 갔다. 하지만 연결은 극히 짧은 순간이었다. 연결된 듯싶으면 사라졌고 또 다른 선이 생겨나 돌고 있는 구슬에 붙었다.
"우리의 세상은 큰바람으로부터 시작됐어요.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고, 모든 것을 연결하고 어디로든 스며들죠. 여러분도 알고 있는, 바람의 영혼을 가진 어떤 한 사람은 시작의 바다를 자유롭게 오가며 영혼을 가진 다른 종족과 친구가 되기도 했어요."
"나도 숲속의 사냥꾼 카린처럼 큰바람으로 내 영혼을 채워 시작의 바다를 자유롭게 여행하고 싶어요."
아론이 말했다.
아이들 입에서 감탄사가 터졌다.
브리지트는 아론이 왜 바람의 영혼을 가지려고 하는지 짐작한 듯 웃음 지었다.
"카린이 첫 번째라면, 내가 두 번째로 시작의 바다를 자유롭게 건너갈 거야."
아론이 옆에 앉아 있는 또래 여자아이를 바라보며 결의라도 다지듯 주먹을 말아 쥐며 말했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로운이었고 둘은 항상 붙어 다녔다.
"아론의 말이 맞아. 우리 아틀란인들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영혼을 채울 권리가 있어요."
"그렇다면 난 바람을 부르는 숲 브리지트처럼 초록의 영혼을 가질 거야."
이번엔 로운이 일어나 아론을 바라보며 말했다.
서로가 내 남자 내 여자로 점찍었으니까 넘보지 말란 맹랑한 뜻이었고 자신과 앙숙인 레나를 겨냥한 경고였다.
그러자 로운의 경고를 받은 레나도 질 수 없었다.
"아니, 그렇게는 안 돼. 난 세상을 하얗게 덮는 눈과 투명한 얼음의 영혼을 가지고 아론을 내 남자로 만들 거야. 바람이 불면 멋진 눈보라가 치니까."
레나가 일어나 말했다.
하얀 것의 반대는 초록이고, 싱그러움의 반대는 차가움이다. 로운과 레나는 툭하면 싸우고 사사건건 부딪쳤다. 하나 이상할 것 없는 당연한 현상이다. 모두가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획일화된 원칙은 말 잘 듣는 노예를 만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두 앙숙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으나 브리지트와 다른 아이들은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난 가장 뜨거운 불로 내 영혼을 채울 거예요."
한 아이가 말하자 다른 아이들도 하나씩 일어나 말했다.
별의 영혼, 불의 영혼, 물의 영혼, 대지의 영혼 등 다양했고, 심지어 묵직한 바위의 영혼도 있었으나 누구 하나 비웃지 않았다.
홀로그램 영상이 사라지자 아이들은 멍한 상태로 접어들었다. 모두가 꿈을 꾸는 것이다. 이때 아이들 대뇌에서 발생한 뇌파는 무한정 치솟고 넓게 퍼져나가 자신들만의 우주를 만든다. 브리지트는 즐거운 상상에 빠져 조용해진 작은 악마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 좀 전에 본 영상은 저 뒤에 있는 세분의 움미아가 여러분들을 위해 만든 것이에요."
잠시 후, 아이들이 깨어나 다시 소란스러워지자 브리지트가 말했다.
아이들이 뒤를 돌아봤다. 홀 뒤편에는 붉은 옷을 입은 여자와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각각 물과 불과 별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들이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자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