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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Dec 07. 2019

고인물과 시대의 언어

두 부류의 언어



"삼촌은 힘들지 않아요... 일하는 게 무척 편안해 보여요?"

"그래, 이러다 나 여기서 고인물 되는 것 아냐?"

내가 고인물이라고 하자 같이 일하는 아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취준, 혼족, 흙수저, 칠포, 폐인 등은 신조어다. 그중엔 ‘고인물’ 이란 재미난 언어도 있다. 한글 띄어쓰기 맞춤법에도 맞지 않는다. 원래는 ‘고인’과 ‘물’을 띄어서 써야 한다, 그러나 단일 명사가 됐기에 붙여 써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 용어 같은데 여기저기서 쓴다, 도대체 무엇을 고인물이라 하는지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져 봤다. 아무리 찾아도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게임이나 특정한 분야에서 잘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 속에서 느껴지는 정감과 약간의 가벼운 듯한 뉘앙스는 또 뭐란 말인지, 게임맹인 나는 알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아들에게 물어봤다. 녀석은 고인물의 유래와 진화 과정을 자세히 알려줬다. 그러고 보면 9살, 7살 된 아이들을 PC 방에 데려다준 것은 잘한 일 같다. 마음껏 하라는 의미였다. 아이들이란, 하지 말라고 하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기필코 하는 존재다.


애초엔, 모 세계적인 게임회사가 쉽게 깰 수 없는 게임을 자신만만하게 출시했다고 한다. ‘누구도 이 게임은 깰 수 없다’란 호언장담이 끝나기 무섭게 한국의 게임 유저 한 사람이 단번에 깨뜨렸다고 했다, 출시하자마자 깨져버린 게임이라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때 사람들은 생각했다. 컴퓨터 게임에 얼마나 폐인처럼 고여 살았으면 하고 말이다.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지 아니면 할 일 없는 백수가 과도한 몰입을 한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게임 대국답게, 그런 일이 수시로 발생하자 고인물이란 신조어가 생겨났다고 했다.


그들은 가상 세계에서만큼은 최강의 신으로 군림한다. 어떨 때는, 뉴비(게임에서 초보자들을 낮추어 부르는 말)가 들어오면 가르쳐주고 끌어올려 주기도 한다. 심지어 게임 댓글 창을 통해 처음 만난 생면부지 뉴비에게 가르쳐 주겠다고 직접 달려가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것도 나눔을 실천해야 하는지, 꽤 재미있게 사는 사람들이다.


세상에 한 번 나온 것은 유 무형을 가리지 않고 빠르게 진화한다. 고인물도 다르지 않다. 더 한 존재가 나오기 시작했다. 바로 썩은물과 석유다. 썩다 못해 증발해서 화석연료인 석유가 됐다는 뜻이다. 등급으로 따지자면 고인물 <썩은물 <석유라 보면 된다. 게임 개발자에게 이들은 골치 아픈 존재다.

개발자가 의도한 대로 하지 않는다. 새로운 공략 방법을 창조해서 게임을 한다. 그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라곤 새로운 패치를 빠르게 업데이트시키는 방법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자, 그 쓰임새는 다양한 분야로 확대됐다. 게임뿐 아니라 벽돌 쌓기, 나무 타기, 팔 굽혀 펴기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다. 그들은 자신의 분야에서만큼은 정점에 이르렀다. 

이렇듯 언어는 그 시대와 땔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시대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기도 하고 전혀 다른 의미로 바꿔 놓는다. 조금도 이상할 것 없다, 사람이 숨 쉬듯 언어도 시대와 자연스럽게 호흡하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신조어가 생겨난 원인은 제쳐두고 경박하다고 딴지 거는 사람이 있다. 자신들은 얼마나 고상한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삶이란 산고의 고통을 겪으면서 태어난 언어는 절대 경박하지 않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우리네 삶 그 자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시대의 발칙한 젊음은 자신들의 고통마저 발랄함으로 바꿔 놓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범에서 바라본다면, 신조어는 매우 역동적인 젊음의 언어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이렇게 삶 속에서 생겨난 신조어가 있지만, 나이와는 별 상관없이 오래된 사람들이 사용하는 낡은 언어도 있다. 12월, 년 말이다. 이쯤 되면 어김없이 나올 때가 됐다. 교수들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다. 이들도 고인물인 것은 맞다. 또 다른 분야인 지식에서 정점을 이뤄서다.

파사현정(破邪顯正), 임중도원(任重道遠) 등이 대한민국의 사회현상을 단적으로 표현한다고 한다. 그러나 대학을 나온 나도 TV 메인 뉴스 앵커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모르는 소리다. 게다가 남사스럽게도, 내 나라 사회현상을 설명하는데 굳이 남의 나라인 고대 중국의 격언까지 들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취준, 혼족, 칠포, 흙수저가 더 와 닿고 이 시대를 정확히 표현한다.

어쩜 그들은 고인물의 단계를 넘어 화석연료인 석유가 된 것은 아닌지,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 화석연료라고 하는데, 좀 생각해 볼 문제다.



이 글을 쓰는데 '패치, 고인물, 게임 개발자의 의도 등은 아들이 알려준 용어와 설명이다.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난 게임맹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지 않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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