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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왕 Oct 25. 2023

연천 기행

우리가 연천에 가기로 한 오늘은 24 절기 중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을 코앞에 둔 날입니다. 더욱이 연천의 그것은 서울의 입동(立冬)만큼 추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침부터 부지런히 따뜻한 외투며 두께감 있는 원단의 옷들을 챙겨 입었습니다. 연천으로 같이 동행하는 이에게 ‘거긴 서울보다 한참은 추울 것이 분명하니 겨울처럼 챙겨 입으라.’ 신신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요.


우리는 동쪽의 고속도로를 타고 한탄강을 따라 올라가서 연천에 다다랐습니다. 북쪽 동네도 시월엔 추위 소식이 도착하긴 아직 일렀는지, 정오부터 세시까지는 호들갑을 떨며 껴입은 옷들이 무안할 정도로 따뜻한 날씨가 이어졌습니다.


우리가 연천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들른 곳은 허름한 분식집이었습니다. 가게에 테이블을 두 개나 붙이고도 의자를 하나 더 갖다 끼어 앉아서, 한 줄에 오천 원이나 한다는 김밥은 대체 무슨 맛일지, 라면을 시켜야 할지 우동을 시켜야 할지, 혹은 라볶이를 시킨다면 면류는 하나 빼는 것이 좋을지 등, 시시콜콜한 고민으로 머리를 맞댔습니다. 다들 고개를 쫑긋 들고 한쪽 벽에 붙어있는 메뉴판을 쳐다보는 모습이 마치 어미 오리의 궁둥이만 보고 졸졸 쫓아가는 새끼 오리들 같아 보여서 웃음도 났고요.


오늘 우리가 연천으로 간 까닭은 임진강 유역에서 자란다는 댑싸리들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댑싸리는 본래 초록색 이파리인데 10월이 되면 오늘처럼 붉고 보랏빛을 띠는 단풍이 든다고 합니다. 공원에 즐비하게 늘어선 댑싸리들은 멀리서 봐도 곱고 가까이에서 봐도 예뻤는데 특히 오묘한 건, 살짝 떨어져서 보면 마치 침엽수처럼 뾰족해 보이는 댑싸리 잎이, 실제로 가까이에서 만져 보면 털처럼 부드럽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오늘 해야 할 일은 이 댑싸리들을 슬며시 손으로 쓸어보거나, 사이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거나, 그 옆을 휘적휘적 걸어 다니는 일이었습니다.


이곳의 댑싸리들은 이제 곧 빳빳하게 말라서 시들 것이고 그중의 몇몇은 비를 엮는 데 필요한 재료로 쓰인다고 합니다. 머지않은 날에 겨울이 온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말이 어떤 비유처럼 느껴져서 조금 헛헛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옆에서 ‘내년에도 또 같이 와야지’하는 장난 섞인 목소리가 괜히 쓸쓸하게 들리기도 했고요. 그러나 오늘은 우리의 여행에 대해 쓰기로 했으므로 그런 먼 날의 그리움에 대해선 쓰지 않겠습니다.


연천 기행을 끝으로 앞으로 있을 단풍놀이나, 묵호로 가보자는 계획이나, 아예 저기 멀리 따뜻한 나라로 떠나보자는 기약 없는 약속들에 대해 더 적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냥 이렇게 제 여행을 적어나가는 것이 제가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저 이것들을 묵묵히 쓰기로 했고요.


예전에 어떤 이가 제게 '외딴섬에 있는 너에게 가 닿고 싶다.' 고 했던 말이 떠올라요. 그 당시에 저는 그것이 ‘널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와 같이 들리기도 했습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저는 그런 방법 같은 건 잘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이 사랑에 실패하거나, 힘든 일을 겪거나, 모종의 아픔들로 인해서 잠깐 손을 내려놓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이제 다시 남은 이야기를 마저 적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해 볼까 합니다.


아마 당신은 오래 지쳐있었기 때문에 어디부터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울먹이실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괜찮다며 당신을 달래드릴 것이고요. 그리고 여행부터 써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해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다녀온 연천이라는 곳은 잔물결이 치는 내라는 뜻이래요.’로 시작한다고 운을 띄워 드리고 싶기도 하고요.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일렁이는 마음으로 당신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는, 아직 오지 않은 그런 날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당신이 쓰시는 이야기의 절반쯤은 읽는 이의 몫일 테니 어떻게 쓰셔도 괜찮을 것입니다.

웃으면서 써도 슬픔은 슬픔이고요, 잔잔하게 써도 격랑은 격랑이에요. 사랑은 사랑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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