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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소금 Nov 24. 2023

초청장

이 세상에서 내가 경험한 가장 아름다운 마음, 경은이에게

  경은아, 안녕! 네가 비행기를 타는 날이 몇 날이나 남았는지 하루하루 꼽아보게 되는 이 시절에, 이렇게 첫 편지를 시작한다. 네게 하고 싶은 말들, 내 안에 있는 말들을 어떻게 하면 가장 갖춘 꼴로 전달할 수 있을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다가 결국은, 그냥 쓴다. 날들은 정해져 있고 말들은 그 안에 전해져야 하니까 말이야. 깊은 숨과 너른 마음으로 읽어주기를. 이 편지의 씨앗이 뿌려진 날에서부터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볼게.


  작년 겨울이지. 양재에서 식사를 하고 조명이 흰 어느 보통 카페에 갔던 날이다. 그날 너와 나는 우리 사이의 대화에 대해 말했었어. 요는, 대화에 막힘이 있다는 거였다. 질문하고 답하며 대화의 더 깊은 데로 들어갈 수 없는 한계가 느껴진다고. 처음엔 내가 그렇게 고백했고, 너도 너의 비슷한 느낌을 말해주었던 것으로 기억해. 대로를 걷는 것이 좀 추웠던 날이었고, 나는 예전에 네가 준 퍼장갑을 끼고 있기도 했었는데. 아무튼 우리가 느꼈던 담은 나의 변화 때문인 것 같았다. 내게 생긴 인생의 변화가 내 언어를 달라지게 했는데 그것들을 네 앞에서 정직하면서도 푹신푹신하게 표현하는 것이 나는 어려웠거든. 그렇지만 그날의 허심탄회한 대화가 꽤 멋지게 길을 터준 것 같지? 오늘 이렇게 너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었으니까 말이야. 너는, 직접 만들었다고 하며, 작은 육각 유리병에 블루베리 콩포트 담은 것을 선물해 주었었어. (아닌가, 작은 둥근 유리병이었나?) 그리고 우리는 호호 웃으면서 헤어지며 그랬어. 내 인생에 변화를 가져왔던 그 주제, 내가 말하기 어려워하는 그 주제에 오히려 맘 먹고 부딪혀 보면 어떻겠냐고, 그걸 가지고 뭔가 재미있는 걸 만들어 보면 어떻겠냐고. 너의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가득 묻은 그 제안이 바로 이 편지가 되었다. 너의 미국행으로 인해 이렇게 첫 번째 마감 시기가 쾅, 정해질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네가 가기 전에 무엇을 빼먹지 않고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이 이별 아닌 이별을 좋이 맞이할 수 있을까, 그렇게 물었더니 네가 그랬지. 만나고, 대화하고, 그냥 그런 거, 평소에 하던 거, 제일 그리워질 것들, 그런 걸 하면 되지 않겠냐고. 맞는 말이야. 정말 그렇다. 그런데도 나는 문득문득 조바심이 나. 당장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어떤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단어들을 만지며 책상에 가만 앉아 너를 보낼 준비를 해도 괜찮은 걸까. 친정어머니도 아닌데 공항에라도 따라가고 싶은 마음, 가라앉혀야 하는 거 맞지? 아무쪼록 이 편지가, 경은이의 떠남과 새 시작을 축복하는 나의 좋은 방법이 되기를 기도하며 쓴다. 


  어쩌면 네가 깜짝 놀랐을지도 모를 이 글의 부제, ‘이 세상에서 내가 경험한 가장 아름다운 마음’이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야. 경은아, 내가 너를 통해 발견하고 연마하게 된 마음들은 무엇과 바꿀 수 없이 소중하다. 그러니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의 마음이 한번 덜컥 내려앉은 적이 있었다는 것을 너는 이해할 수 있을까? 성경은 다윗과 요나단이라는 아름다운 친구 관계를 소개하고 있어.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사무엘상 18장 1절 말씀) 그런데 어느 날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묵상하는데, 아뿔싸, 이경은과 추수빈의 관계는 내가 믿는 하나님 앞에 다윗과 요나단 같을 수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 거야. 우리가 익히 알듯이, 너의 세상을 보는 눈과 나의 믿음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지. 그날의 묵상 이후로 너라는 존재가 얼마나 큰 내 기도의 동력이 되었는지 몰라.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나는 어느 시점 이후로 삶에 새것을 가지게 되었어. 아니, 이미 가졌던 새것을 새로이 인정하게 되었다고 하는 편이 좋을까. 너와의 우정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다면, 이 ‘새것’은 이 세상 위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전에 모르던 세상 위엣 것을 보게 된 사람이 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여기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본 것을 전할 수 없어 앓는 마음, 혹시 상상해 줄 수 있겠니? 네 것을 존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를 사랑해서.


  기독교인들의 오만한 태도, 나는 알고 너는 모르니 내가 너를 문명화해줄게, 그런 태도들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었지. 네가 맞다. 이런 태도를 네가 보아왔다면, 겪어왔다면, 그건 전적으로 신앙을 가진 사람들(나를 포함하여)의 잘못이야. 하나님은 무례하지 않으시고 인격적이신 분이기에 그분에 대한 이야기는 그런 식으로 전해지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해. 다만 나는 네가 이 편지를, 너와 나 사이의 이야기로 받아들여 주기를 부탁해. 어쩔 수 없이 ‘나’인 내가, 하지 않을 수 없는 내 얘기를 내 사랑하는 친구에게 들려주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해 주면 좋겠다. 그리고 또 너의 이야기를 들려줘.


  내가 도대체 어떤 마음의 중심 때문에 네게 이렇게도 편지를 쓰고 싶어 하는지 나 자신에게 물었던 때가 있어. 그런데 노래 하나가 생각나더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3장 16절”     


  지금 세어보니 13마디 정도 되는 짤막한 어린이 찬송가인데, 결국 이 노래 때문에 내가 이렇게 간절하구나 싶었어. 어린 시절 교회에서 배운 노래, 그 속에 담겨 있는 이치가 내게 깊이 새겨져 있는 거였어. 에베소서 1장 3~14절 말씀으로 부연하면 이렇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지으시기도 전에 이미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선택해 우리를 기꺼이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는데, 그게 왜인가 하면 첫째로 우리를 흠없는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이고, 둘째로는 그 예수 안에서의 공짜 사랑을 기억하고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야. 우리는 예수님의 풍성한 은혜 덕분에 (너도 알고 있겠지만, 예수님은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지.) 죄를 용서받게 되었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어. 그런데 또 놀라운 것은 다음 대목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모든 지혜를 주셔서 이 신비와 비밀을 알게 해 주셨어. 하나님은 모든 일을 당신의 뜻과 결정대로 하시는데, 바로 그런 분의 계획 안에서 위에 적은 저 동요가 내게 새겨진 거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에베소서 1장 13절 말씀.) 복음, 그러니까 바로 저 압축적인 13마디 동요 가사를 듣는다는 것은, 그리고 또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성령이라는 또 다른 지위를 가지신 하나님으로부터 도장을 꾹 받는 일이었던 거지. 수빈아, 너는 내가 찜한 사람이란다, 이렇게 말이야.


  네가 나를 처음 알던 대학 시절에도 이미 기독교인이었던 나인데 지금부터 예수님 중심으로 살겠다는 것이 무슨 특별한 변화냐고 네가 그랬지. 내 삶에 변화가 있어, 했더니 네가 한 마디로 되물었었거든. “(넌 원래도 독실했잖아,) 변화야?” 하고 말야. 맞아, 어떻게 보면 본질적인 것은 뭐가 달라지거나 한 게 아닌 것 같다.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찜’을 당한 사람이었고 지금도, 언제까지나 그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요 몇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그 둘의 자리를 서로 바꾸어 놓는다는 걸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달라. 많은 것 중 한 가지 변화는 ‘자아실현’에 대한 갈망이 더는 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지 못한다는 거야.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것들, 노래를 만들거나 글을 쓰거나 내가 되어야 할 것만 같은 멋진 ‘나’가 되거나 하는 모든 것들은 ―물론 습관처럼 그런 욕구가 내 발목을 잡을 때가 많지만― 이제는 때때로 집어 쓸 도구가 될 뿐 결코 나의 최고 목표가 될 수 없단 걸 알았다. ‘나를 세우고 나를 지키는 것을 그만두고 오히려 나를 무너뜨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내가 바라 볼 가장 멋진 꿈이 되었어. 나를 실현하지 않고 예수님을 실현하는 것. (세례요한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거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한복음 3장 30절 말씀)


  그러니까 도대체 그게 뭐니?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다니? 만약에 이렇게 물어준다면, 나는,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답하고 싶다. 내가 어떻게든 망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칠 때, 예수님께서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셨어. 죽음을 향해 묵묵히 가신 거야. 내가 신학자는 아니지만, 기독교의 십자가는 그런 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묵묵히 죽는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의 다시 사는 능력.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 여전히 훈련 중이고 앞으로도 언제나 훈련 중일 것이지만, 결국 나는 내가 이미 죽었다는 믿음으로, 예수님 죽음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살기를 선택한 거야. 그게 바로 내가 믿는 도(道)야.


  네 앞에서 낭독했던 간증문의 일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마음을 알고 보니) 가장 반짝거렸던 우정(=이경은)도… 이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는 문장도 이런 맥락에서라면 좀 더 쉽게 너에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날 카페에서 그렇게 장난쳤었잖아. “경은이 빠이! (이제 난 예수실현하러 간다… 기타 등등)” 그 말은 내가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고, 또 무모하게 내 일상과 모든 관계들을 방기하고 무슨 이상세계를 향해 돌진한다는 뜻도 아니고, 다만 예수,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정하고 좇는 삶을 살겠다는 거야. ‘속이는 사람 같지만 참되고 이름도 빛도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영향력 있고 죽은 사람 같이 불쌍하지만 생생하게 살아있고 벌이란 벌은 다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끈질긴 생명력이 있고 걱정이 많아 보이지만 항상 기뻐하고 돈은 없는 것 같은데 많은 사람을 풍족하게 만들어주고 가진 게 쥐뿔도 없어 보이는데 실상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의 삶. (고린도후서 6장 8~10절 말씀)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기로 선택하지 않는 삶. (마태복음 7장 14절 말씀)


  경은아, 

  이런 게 나의 믿음이야. 어떠니? 이번에도 역시 좀 무리한 데가 있니? 그렇지만 다음엔 네 차례가 되길 바라. 너를 초청한다. 나의 믿음에 대한, 아니라면 또 너의 세상을 보는 눈에 대한 대화의 장으로 너를 초청해. 묻어두고 피해만 갈 수는 없는 이야기들을, 조곤조곤, 시간을 가지고 나누자. 그러면서 너는 나를 알고, 나는 너를 알고, 그런 긴 레이스를 함께 달려보지 않겠니? 나의 이 편지가 네 얼굴을 또 한 번 붉어지게 했을지도 모르지만 너라면 이 문장들 사이에서 내가 고른 단어들을 알아채 주고, 그래서 나를 한 번 더 용서해주고, 또 언젠가 휘저어진 마음의 불순물이 가라앉으면 그때 나에게 답장하기를 한번 고려해보아 주지 않을까, 그렇게 기대해. 그래, 기대한다.

      

  그나저나,

  미안한 질문. 네가 가는 지역이 어디라고 했더라? 들어도 들어도 까먹는 게 계속 창피하네. (이번에 알려주면 적어놓을게.) 이제 중대한 얘기들을 다 쏟아놓았으니 조잘조잘 생활의 문제를 나눌 수 있겠다. 아, 시간이 허락될까? 꼭 그랬으면. 나는 이 편지를 어서 발송하고, 너에게 카카오톡 같은 걸로 연락을 하고 싶어!


  그리고 나의 마지막 야심, 떠나기 전 우리 교회 주일예배에도 다시 한번 초청해! 하하.     


  안녕, 경은아.

  남편에게도, 훈기에게도 평안함이 가득하길.          



  사랑을 담아, 

  2023.11.24.

  추수빈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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