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크리스천 여성께
안녕하세요, 평안하신가요? 어제도 오늘도 날이 춥습니다. 호시절이 언제였나 까마득한 요즘이지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언제나 우리의 이성과 마음과 영을 따뜻하게 비추는 꺼지지 않는 난로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문장을 둘둘 말아 담은 병을 물에 띄우듯 당신에게 편지를 적습니다. 당신이 누구인지 몰라 설렙니다. 이 편지를 받게 된 당신을 위해 기도해요.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기를, 하나님의 성전된 당신의 몸이 바로 서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충만하게 되기를.
이 글을 통해 당신에게 선물을 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지으신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발현하고 싶은 당신이라면, 힌트를 얻어가세요. 이 짤막한 분투기가 당신의 여정을 콕콕 쑤셔 주는 자그마한 힌트 단지이길 바랍니다. 여러 이유로 아름다움을 사치로 여길 수 밖에 없었던 당신께는 100일 간 성경 말씀을 붙잡고 담대히 아름다움을 구하며 하나님께로 나아간 이 기록이 응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정말 예쁜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소녀 같은 당신께는 제가 하나님께 설득된 일에 대해 말씀 드리고 싶어요. 매일 아침 자신의 아름다움을 믿으며 나가 싸우지만 저녁 즈음엔 세상 목소리에 생채기투성이가 되고 마는 당신, 이 편지를 읽고 우리의 변함 없는 소망을 한 번 더 기억해 준다면 그건 정말 기쁜 일일 겁니다. 혹시 이런 생각이 드시나요? ‘아니, 지금이 어느 땐데 갑자기 예뻐지기라니?’ 그런 당신께도 감히 축복을 드립니다. 괜찮으시다면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저를 따라와 주십시오. 물론 어떤 분께는 이것들이 그저 다 좌충우돌 투박한 부딪힘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우스꽝스러울지도요. 믿음으로 아름다워지는 지름길이 있다면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장 드리고 싶은 것은 짤막하더라도 조금은 시원한 공감의 순간, 그리고 우리가 함께 아름다워지자는 초청의 메시지입니다.
시작은 어느 아침이었어요. 그날의 묵상 본문은 악한 여자 이세벨이 살해되는 장면이었는데요, 이 여자는 죽는 날 아침에 아주 극적인 행동을 합니다. 아이라인을 그리고 마스카라를 올려요. 구르프를 말고 고데기를 합니다.*1 저는 이 심리 상태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어요. 통곡하며 회개하고 살려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마지막까지 콧대를 세우고 하나님과 자기 영혼 앞에 끔찍하게도 거짓된 태도를 보이니까요. 스스로에게 곰곰이 물었습니다. 나는 나를 속이는 부분이 없나? 영이 빤히 아는 진실을 모른 척 외면하고 있지는 않나? 나는 생활의 어떤 영역을 그냥 덮어 두고 있나?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불현듯 저에게 ‘아이라인을 그리고 마스카라를 올리자. 구르프를 말고 고데기를 하자.’는 생각이 찾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외모를 가꾸어야겠다는 다짐이 불끈 솟았어요. 이세벨의 단장을 혐오한다더니 무슨 말이냐고요? 네, 짐작하시는 것처럼 그것과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니까요.
외모가 무너질 때 믿음이 무너지는 것, 경험해 보신 일 있나요? 당시 저의 상황입니다. 기도하려고 눈을 감으면, 앗, 전보다 더 둥그런 배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고, 좋은 습관을 다짐하고 행동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내 외모는 안 좋아지고 있고, 하나님이 다른 건 다 들어주셔도 나를 날씬하게 해주시지는 못할 것 같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데 어찌된 일인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못난이처럼만 보이고……. 누구 다른 사람보다 못 생겼다는 말 아닌 거 아시죠? 느껴질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지금 내가 잘 가고 있는지 아닌지. 믿음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막아야 하는 틈이 바로 외모의 영역에 있음을 그날 인정했습니다. 외모가 보여주는 영적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맞아, 외모가 막히면 중보 기도도 막히지, 이 문제가 믿음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게 하자, 아름다워지는 건 정보, 계획, 결심으로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 달렸어, 이건 영적인 문제야.’ 그렇게 저는 외모지하주의 사고방식에 도전하는 믿음의 선포로 예뻐지기 100일 프로젝트를 작정했습니다.
실제로 일을 진행하는 동안 이세벨의 단장, 즉 세상의 나르시시즘과 내가 하려는 노력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역시 진실함이 가장 중요할 것인데, 다음의 말씀이 힌트가 되었어요.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전서 6:13,18-20)
음란한 것, 스스로 우상이 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예뻐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인 걸 하나님께 구해?’ 사람의 핀잔을 듣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것은 두려운 일도 아니요, 진짜로는 하나님께 멸절을 당할 것입니다.*2 그러나 성령의 전인 나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한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들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달려갈 수 있습니다. 뻔뻔하다는 생각이 자꾸 나를 공격해와도, “예뻐지게 해주세요.” 정확한 말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런 기도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자꾸만 입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궁금하시지요? 그래서 결국 얼마나 예뻐졌는지 말이에요. 웬걸요, 100일만에 저는 굉장한 미녀가 되었답니다! 봄철 빛나는 목련 나무와 같은 압도적인 아름다움으로 이 세상 딱 한 남자에게 그가 받고 싶은 모양의 사랑을 건네는 여성이 되었어요. 정말이냐고요? 네, 정말요. 다만, 하늘에서 확실히 그렇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저는 100일의 싸움 끝에 믿음을 얻었어요. 내가 아름답다고 하는 선명한 믿음을 경험해 소유하고, 그 믿음을 따라 살아갑니다.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구하며 매일 싸워나가는 것입니다. 이 기간 중 공예배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예배를 올려드릴 때 예수님만이 나의 궁극의 기쁨 되심을 깊이 고백하며 말할 수 없이 행복했던 날이 있었는데요, 아름다움에의 믿음을 주시는 말씀도 그와 결이 같습니다. 예수, 우리 주, 더 이상 이렇게는 안 살게 하시는*3 구주께서 설레는 사랑의 고백을 주십니다. 자꾸만 ‘너 예뻐, 너 예뻐’ 다독여 주십니다. 그러니 당신께 소문내지 않을 방도가 없었지 뭐예요!
그 중 한 가지 하나님의 고백은 호세아서의 프러포즈 말씀이었어요.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호세아 2:19-20)
하나님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나를 신부로 삼으시겠다고 합니다. 나를? 왜? 이런 나를? 정말? 왜? 믿어지지가 않고 가슴이 두근두근 뜁니다. 나는 이렇게 깨끗하지 않은걸? 나는 우상을 버렸다 다시 주워왔다 하는 음녀인걸?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의 새신부가 되어 그분과만 교제하고 그분만을 사랑할 때, 말씀으로 분명히 말하시건대, 내가 그분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렇다고 하시니 나는 그분의 신부가 될 수 있지요. 하나님의 새신부가 되어 운전하고, 새신부로서 먹고, 새신부로서 가르치고, 새신부로 컴퓨터 앞에 앉아 타자를 치고, 새신부룩을 입고, 체육관에서도 새신부의 새로운 정체성으로 내 몸을 소중히 여기며 움직이기로 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새신부처럼 조심조심 말하기를 시작했어요. 물론 이 새 정체성을 홀라당 잊는 날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에 기록된 사실로서 제게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기반이 됩니다. 글을 적는 지금 이 순간도, 신랑 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쓰던 것을 잠시 멈춥니다. 그리고 내게 예수면 충분하다는 사실을 기억해내어 봅니다.
이 놀라운 말씀을 받아들였더니 그 다음 통째로 제게 굴러 온 성경은 바로 아가서였어요. 한 권 전체가 사랑의 노래인 이 책을 저는 몹시 속상한 날 밤 오디오 녹음으로 들으며 잠들곤 했습니다.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아가1:9-10)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아가 2:2)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구나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오는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네 목은 무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방패 천 개,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어린 사슴 같구나(아가 4:1-5)
이 밖에도 아가에는 사랑하는 이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구절들이 아주 많지요. 어떤 날 내가 몹시도 못났다고 여겨질 때, 말씀이 믿어지지 않아서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만큼 의심 가득한 날에도, 저는 믿기로 작정한 채 아가서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끝없이 예쁘다고 하시고 나는 쉼 없이 거기에 반박하고,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차츰 저를 녹이셨습니다. 한 예로, 100일의 끄트머리 어느 날엔가는 ‘내 다리, 예쁘다!’ 하고 스스로 말하기에 이르렀어요. 사춘기 이후부터 내 몸에서 다리는 늘 싫은 부분이었거든요. 좀 더 가늘어야만 예쁘다고 말할 수 있는 내 다리, 어딘지 마음에 안 드는 내 다리, 보고도 싶지 않은 미운 내 다리! 그렇지만 내 안의 이 목소리들이 왜곡이고 거짓말임을 이제야 힘주어 말합니다. 몸의 어딘가가 예쁘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곳을 예뻐 보이게 해요. 손이 예쁘다고 믿는 사람은 자기 손이 예쁜 표정을 짓게 할 줄 알고, 허리가 예쁘다고 믿는 사람은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습관을 놓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 다리가 예쁘다는 것을, 성경이 사실이라고 분명히 말하는데도, 그렇게 믿기는 커녕 쳐다보지도 않으니 예쁘게 서기란 영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한 번 쳐다보시겠어요? 당신의 예쁜 어딘가를?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세계에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팔자 좋게 외모 타령하며 몸이나 들여다 보겠냐고요. 네, 정말 맞습니다. 그런 한 편 또 틀리기도 하고요. 질문이 올라올 때마다 우리는 방향을 잘 잡아야 합니다. 우리의 노력이 사치스러운 치장이 아닌 소박함과 정절, 단정함과 선행으로써 하는 단장이 되길, 온유하고 평안하고 영원한 것들로 내면을 꾸미는 단장이 되길 기도하면서요.*4 성경은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고 말씀합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 (잠언 31:30a)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아름다움은 단지 화려해지는 것만은 아니지요. 저는 당신과 제가 같은 아름다움,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현숙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고 믿습니다. 강인하고 수완이 좋고 잘 베풀고 어질며, 자기를 위해서는 아름다운 이불을 짓고 세마포와 자색 옷을 입는 바로 그 현숙한 여인이요.
…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잠언 31:30b)
이쯤 해서 저는 당신께 조심스럽게 권하려 합니다. 예뻐지시라고, 아름다워지시라고, 여자로 일어나시라고, 지금 이 때가 아니면 언제 그렇게 하시겠냐고 말이지요. 거듭 말씀 드리건대 저는 당신을 모릅니다.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고통 중에 있는 여성일 수도 있고, 내 어머니와 같은 분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이제 막 예수 따르는 길을 선택한 꼬마 아가씨인가요? 아니면 이미 훨씬 높은 경지에 닿은, 밝고 맑고 아름답고 자유로운 여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저를 괴롭게해 온 여성일 수도 있고, 이런 말들이 다 와닿지 않아 제 글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누군가일 수도 있습니다. 가끔은 당신의 말갛고 무구한 얼굴이 제게 반사적인 질투심을 일으키는지도 모르지요. 아니, 어쩌면 당신은 제게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제 1단계부터 차근차근 가르쳐 주신 선생님일지도 몰라요. 엄청 바쁘실 수도 있고, 심지어 당신은 지독스럽거나 극악한 환경에 처하여 그저 울며 예수님을 부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여성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당신께라도 저는 말하고 싶어요. 예뻐지십시오. 아니 정확히는, 당신이 아름답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믿고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세요. 예뻐지느라고 세상을 외면하지 마시되 사느라고 아름다움을 잊지 마세요. 당신의 아름다움이 지금 당신에게, 당신의 사랑에게, 당신의 집에, 당신의 이웃에게, 당신의 나라에 절실히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어째서? 나의 아름다움이 이 나라와 대체 무슨 상관이지? 이는 당신만이 답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세상은 어둡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틀림없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교만하고 몹시도, 몹시도 서로를 비방합니다. 거룩에 대해서 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정하고 원통함을 풀지 않고 모함하고 무절제하며 사납고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배신하고 조급하고 자만하고, 쾌락을 추구하는데 그게 얼만큼이냐 하면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추구합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말씀의 능력을 진실로 믿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돌아서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나요?*5 그러니 당신은 당신만 알고 있는 당신의 죄악으로부터 돌이켜야 합니다.
오래 묵은 원한이 있다면 그 관계를 깨끗하게 하여 자유롭고 맑은 표정을 얻으세요. 원망하는 체질을 바꾸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으세요. 야고보서 4장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6 가족에게 사랑과 친밀함으로 행하고 싶다면 TV나 영상 매체 대신 좋은 대화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도록 준비해 보는 것은 어떠세요? 말씀을 단단한 구심점 삼아 대화를 열고 닫는 거예요. 먼저 말씀 한 부분을 선별하고, 잠시 함께 묵상하고,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을 주시는지 순서대로 나눕니다. 처음에는 좀 어색할지 몰라도 형식보다 나눔의 질을 우선으로 하다 보면 내 가족을 한층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돼요. 평범한 일상도 말씀을 통과하면 풍성한 나눔의 소재가 되니까요. 그러다 보면 배는 안 고픈데 마음이 허해서 냉장고 문을 여는 저녁 습관이 뚝 끊어질지도 모릅니다. 매일의 소중한 만남 가운데 가장 환한 미소로 누군가를 환대하고 싶다면 컨디션을 관리하세요.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께 한 것이라고 하셨잖아요.*7 집안을 정리하고 책상을 정리하세요. 불필요한 일은 과감하게 포기하고 대신 푹 자세요. 규칙적으로 식사하세요. 중요한 분들이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 정해진 시간에 식사하는 나라는 복 있는 나라랍니다.*8 나태함이 당신의 고질적인 죄라면 몸을 움직이세요. 맡겨 주신 사역을 감당할 힘이 부족해 슬픈 당신께도 힘써 체력을 기르실 것을 추천합니다. 신체 활동이 몸과 마음에 활기를 주는 것은 저 자신이 늘 기억해야 하는 사실이에요. 평소 하던 운동에 조금 더 정성을 들여도 좋고, 운동 일지를 기록하는 것도 좋습니다. 운동할 때 들을 즐거운 노래들을 플레이리스트로 구성해두는 것도 좋더라고요?*9 어떤 애티튜트가 참되고 아름다운가 궁금하시다면 디모데전서 2장을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조용히 이끌리고, 믿음, 사랑, 거룩함에 거하는 것이지요. 또는 진리에 순종하여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 거짓도 거리낌도 없이 형제를 사랑하는 태도,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태도*10는 어떤가요? 무정한 시대에 다정함의 본을 보이는 여성이 되는 목표를 갖는 건 어떠세요? 그런 여성을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하루를 마무리 하면서 세수할 때 ‘오늘의 다정함 점수 몇 점?’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볼 수도 있겠습니다. 얼굴을 마주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예쁜 언니들을 가까이 알고 지내는 행운아시라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예뻐질 수 있는지 직접 한번 물어보세요. 생각보다 많은 언니들이 진지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당신의 발걸음에 따뜻한 응원을 얹어줄 것 같다고 슬며시 전망해봅니다. 온 마음을 눈 주변 근육에 담아 환하게 웃는 법을 배우게 될지, 상대를 향해 몸을 돌려 앉아 적극적으로 경청하고 항시 섬기는 태도를 배우게 될지 또 누가 알겠어요! 성전된 몸*11에 어울리지 않게 맛만 좋고 건강하지 않은 나쁜 음식을 선택하고 있었다면 차근차근 음식 습관을 바꿔보세요. 다만 이 일은 단번에 되지 않잖아요. 에스라 시대에 이스라엘 족속 중의 이방 여인을 끊어내는 데에는 100일 정도의 시간이 걸린 것 같습니다.*12 아주아주 천천히, 그렇지만 분명한 방향을 가지고 습관을 교정해 보세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십니다.*13 우주 쓰레기인 나를 대신해서 처참하게 돌에 맞아 죽으시는 예수님을 볼 때 나쁜 즐거움들이 저절로 끊어지는 신기한 일이 생길지도 몰라요. 어쩌면 재래 시장에서 저렴한 값에 케일, 양배추, 마카다미아, 아몬드를 구입하는 소소한 즐거움에 웃게 될지도요! 탐식의 습관이 절제되지 않는다면 먼저는 이성을 동원할 수도 있습니다. 포만감 척도*14를 기준으로 삼아 내가 어떤 상태인지 판단한 다음,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상태’나 ‘배고프다는 느낌이 살짝 드는 상태’에서 먹고, ‘중립적인 상태’, ‘그냥 만족스러운 상태’, ‘연료 가득 충전 상태’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거예요. 그러나 추천하는 방법은 이 일 또한 오직 성령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인정하고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저는 <다니엘 21일 금식기도>*15 라는 책의 도움을 얻어 탐식의 속박과 세상 문화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분명한 절식의 이유를 세워 볼 수 있었어요. 영적 각성, 영적 전쟁, 값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친밀함과 헌신도 제 행동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한편, 하나님 앞에 정직한 마음을 다잡으며 소리 내 기도하다 보면 목소리 미녀가 될 겁니다. 올바른 어조, 적당한 톤으로 말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집중력이 필요한 일이잖아요. 만왕의 왕이시며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그 분이 받으시기에 충분한 겸손을 우리 목소리에 담아 말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그런 기도를 드리려고 하다 보면, 내가 결코 할 수 없는 일임을 깨닫게 되어 곧 눈물이 터지고 맙니다. 성경을 낭독하는 것은 언제나 좋겠지요. 우리는 혼란한 이 사회의 답이 역시 성경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니까요. 누군가에게 사랑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것도 좋겠습니다. 마음의 정결을 사모함으로써 덕이 있는 입술을 가지세요.*16 매 순간 매 호흡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되도록! 당신의 작은 몸짓도 하나님께는 다 소중합니다.
눈치채셨는지 모르겠지만 위에 적은 실천의 제목들은 지난 100일 간의 저의 노력과 조금씩 관련이 있어요. 당신의 상황에는 맞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너무 당연하거나 너무 어렵거나 속 편한 소리 같거나……. 또 저는 이 행동 목록이 하나님 나라를 명분 삼아 예뻐지기 욕심을 채우는 일에 이용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니 결국 핵심은 한 가지입니다. 당신과 나의 교차점,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교회의 절반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세상과 구별되어 예수님 앞에 아름다운 여성이 되어 간다면, 자기 있는 자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아름다운 일상, 아름다운 선택을 이어간다면 교회가 바뀌겠지요. 나라도 바뀝니다. 복음이 전해지고 생명을 얻습니다. 죽음의 십자가를 택하시고 부활하신 예수, 하나님의 지혜가 영광을 얻습니다.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17 깨어나 당신의 아름다움을 위한 여정을 계속 가세요. 예수를 보며 가세요. 저는 가겠습니다.
제 방 문 앞 벽면 수납장에는 작은 박스 하나에 들어갈 분량의 노트들이 모여 있습니다. 아홉살 때 쓴 일기도 있고, 수험 시절 일정과 다짐들을 빼곡이 정리한 다이어리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저를 괴롭게 하는 녀석들이 있어요. 진로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하던 시절 신랄할 정도로 솔직하게 쓴, 그래서 추하고 냄새나는, 그러나 온 정성과 바람을 담아 썼기 때문에 찢어버릴 수 없는 메모 조각들입니다. 그 속에서 나는 다짐을 합니다. 이러저러한 사람은 되지 말고 이런 건 꼭 기억하자고 말합니다. 내가 아닌 어떤 사람들의 부러운 모습을 스크랩해 붙여놓고는 그것이 마치 내 추억인 양 곱씹습니다. 책임질 수 없는 양의 계획을 남발합니다. 내게 닥친 하루의 사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몰라 그것에 관한 인상을 모조리 기록합니다. 한 톨의 감상도 흘리지 않으려 하면서요. 무엇이 되겠다고 말하다가는 곧 그런 말을 한 나를 멍청이라고 합니다. 고상한 척 음란하고 노력하지만 외롭습니다. 나를 둘러싼 세상이 달라지는 것을 눈치 빠르게 알아채지는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진리를 왜곡합니다. 건강하지 않고, 혼자입니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저는 오늘 당신에게 이 편지를 발송하면서 그 노트들을 내어다 버리려고 해요. 왜냐하면 그것들은 이제 완전히 지난 시즌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 속 글자들이 아깝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 이 편지는 바로 그 메모들의 단권화 노트이며 더 이상 혼자의 세계에서 끄적끄적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공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바로 지금, 제가 저 자신을 아름답다고 믿으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세요. 지금껏 당신의 세계 속에서 어떤 특별한 존재도 아니었던 제가, 세상의 잣대로 보아 뭐 그렇게 빼어난 구석 없는 것 같은 제가 ‘저는 예쁩니다, 같이 예뻐집시다.’ 하며 당신에게 첫마디를 건네고 있는 이 상황을요. ‘이런 건 좀 더 예뻐진 다음에 할 수 있는 말이야, 난 못 해, 나는 좀 더 나은 사람이어야 해…….’ 아니요, 내 안의 이 목소리들을 저는 거부합니다. 나는 충분히 아름답고, 죄인이지만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하루는 메이크업 클래스에도 다녀왔지 뭐예요? 프로젝트의 끝을 기념하는 사진도 찍었습니다. 어쩌면 이 글과 함께 제 사진을 보실 것 같아요. 네, 바로 접니다. 볼펜을 손에 들기로 결정한 사람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중한 달란트, 땅에 묻지 않습니다. 바람만 살피다가는 씨를 못 뿌리고 구름만 쳐다보고 있다가는 거두지 못하지요.*18 이 편지를 당신께 보내드리는 것은 제 오랜 소원의 성취입니다. 마음이 달콤하네요.
이번엔 제가 상상을 해요. 아름다운 여성의 머리띠를 당신에게 넘기는 장면을 말이에요. 당신의 아름다움은 기도의 영적 전쟁 중에, 손녀의 고사리 손을 붙잡고 인형으로 놀이하는 아이 같은 웃음 속에, 한결 같이 예배당 뒷자리를 지키는 다소곳함 속에, 벽면의 말씀 액자를 바라보고 누운 병석에서, 신앙을 드러낼 수조차 없는 곤궁함 중에, 모두와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듯 애써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몸부림 중에,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간절함 중에, 크나큰 결정의 무게 앞에서 겸손히 무릎 꿇은 경외함 중에, 당신의 선교지에서, 어제와 같은 오늘을 묵묵히 살아내는 순종 가운데, 아직 입을 열지 않은 당신의 두 손 안에 팔딱팔딱 뛰고 있는 하나님의 비전 가운데, 사랑으로 희락으로 화평으로 오래 참음으로 자비로 양선으로 충성으로 온유로 절제로 꽃 피고 열매 맺고……. 그리고……. 제 상상 이상의 일들이 펼쳐지겠죠? 아휴, 정말 복작복작 사람 냄새 나는 달리기가 될 것 같네요. 아니면 뭐, 그냥 웃고 지나가셔도 좋아요. 누가 더 예뻐? 내가? 네가? 힘껏 겨뤄 봅시다. 그리고 이 담에 천국에서 만날 땐 마주 보고 한바탕 꺄르륵 웃어보자고요!
건투를 빌어요.
샬롬, 그리고 아 듀!
2025.02.
서초구 더사랑하는교회 5층 카페에서, 추수빈 드림.
<주>
*1 "예후가 이스르엘에 오니 이세벨이 듣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 (왕하 9:30)
*2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신 6:14-15)
*3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4 베드로전서 3:3-4, 디모데전서 2:9-10
*5 디모데후서 3:1-5
*6 토머스 파, <당신의 관계는 안녕하십니까?> (생명의말씀사, 2024)
*7 마태복음 25:40
*8 전도서 10:17
*9 그레고리 얀츠, <마음이 웃다> (두란노, 2020)
*10 베드로전서 11:22
*11 고린도전서 6:19-20
*12 에스라 10:1-17
*13 로마서 14:17
*14 홍석윤, <눔 마인드셋> (SEEP, 2024) p.185-187
*15 김다위, <다니엘 21일 금식기도> (규장, 2024)
*16 잠언 22:11
*17 요한복음 4:35
*18 전도서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