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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Jan 29. 2022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상의 빛(幻の光, 1995)

죽음이라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을 생각하기 위한 도구가 아닐까


바다가 부른다고 그랬어

아버지가 전에는 배를 탔었는데

홀로 바다 위에 있으면 저 멀리 아름다운 빛이 보였대

반짝반짝 빛나면서 아버지를 끌어당겼다는 거야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이틀 전, 서울에서 학과 선배와 여러 이야기-주로 꿈과 영화와 관련된-를 하고 왔다. 다른 사람의 관점이나 취향을 들으면 들을수록 내 안의 취향이 확실하게 카테고라이즈되는 기분이 들곤 하는데, 이번에는 나도 스스로 내 취향을 뱉으며 신기한 기분이 되었다. 



언니는 블록버스터 급의 SF영화나 판타지 영화를 좋아하는데, 나는 보다 정적이고 평범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다루거나 철학적인 영화를 더 좋아해서 약간 대척점에 서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언니 역시도 소위 일본계 영화나 예술/철학 영화를 좋아하고, 나 역시 SF나 판타지 작품 중 좋아하는 작이 꽤 있다. 대표적으로 인터스텔라와 블레이드 러너(오리지널), 해리포터 시리즈 정도? 그리고 기예르모 작들도 정말 좋아한다)



 왜 그런지에 대해 서로의 취향과 현재 영화미술계에서의 기술의 발전/앞으로의 방향 등을 나누다 보니 내가 왜 인간 중심의, 정적인 영화들을 더 좋아하는지에 대한 큰 틀을 얼떨결에 잡게 되었다. 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 그 안의 감정들, 생각들... 이 사람은 이 상황에서 왜 이렇게 행동했고 그 생각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그 사람의 배경은 어떠했고 과거에 비슷한 일이 있었는지, 영화 안에서의 조도나 그 인물이 입은 옷의 색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것이 인물의 내면을 어떻게 투영하고 있는지 분석하고 깨달으며 감탄하는 것을 즐긴다.



 하지만 많은 SF나 판타지, 블록버스터급의 영화들은 요란하고 정신이 없기에(그리고 내가 피 튀기는 전투씬을 무서워하기에) 시각적으로 자극적이지 않은 정적인 영화들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게 한국 8-90년대 멜로 드라마/영화들이나 일본 영화, 그리고 소위 예술영화들을 좋아하는 이유가 아닌가 싶고. 나름 일본 영화를 좋아한다 소개하고 다닐 정도이기에, 히로카즈 감독의 처녀작인 [환상의 빛]의 존재는 알고 있었으나... 히로카즈의 최근 작들이 그렇게 취향이 아니었기에 감상을 미뤄두고 있었다. 



결과는... 

이런 작품을 해마다 하나라도 발굴해 낼 수 있다면, 왓챠에 매달 돈을 가져다 바치는 게 전혀 아깝지 않다. 진심으로 이 영화를 왜 이제야 보게 되었는지 후회가 될 정도로 마음에 꼭 들었다. 상실과 회복에 대한 105분짜리 에세이를 본 것 같은 기분. 시작부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그 순간까지, 이 영화의 모든 부분이 마음에 든다.







전반적으로 어둡고 뿌연, 빛바랜 느낌의 필터가 사용되었다. 작품 전반적으로 암녹색을 베이스 컬러로 하여 편안함을 더했다. 초록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색이기에, 눈 또한 정말 즐거웠다. 


 칸딘스키의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에서 설명하기로, 초록은 존재하는 모든 색 중에서 가장 평온한 색이라고 한다. 그는 모든 생명이 요동치는 탄생의 계절인 봄을 이겨내고 자기 만족적인 평온 속에서 침잠해 있는 여름의 지배적인 색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초록에 노랑이 더해지면 연두색이 되며 다시 상승의 힘을 얻고 능동적이고 젊은 성격을 띠게 되나 파랑이 섞이면 깊게 침잠하며 진지해지고 사색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는 후자를 메인 컬러로 정한 셈이다. 침잠해 있으나 평온하고 사색적인. 유미코가, 그리고 영화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형태와 닮아있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유미코의 어릴 적 집부터 단골 가게, 현재 집 등 대부분의 공간을 원목 가구들로 채워 영화 전반적으로 일관적이며 안정적인, 어둡지만 차갑지는 않은 이 영화만의 미장센을 선보인다. 




터널들



아마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겹쳐지는 구도가 아닐까 싶다. 터널 끝으로 달리는 사람, 또 터널 끝에서 달려오는 사람. 영화에서는 유독 상가의 골목길, 계단, 역사, 건물의 복도, 육교, 터널과 같은 좁은 통로가 배경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그렇지 않은 공간들도 깊고 좁은 느낌으로 담아내고 있다. 


 개중에서도 터널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며, 주의깊게 보아야 하는 이유는 어둡고 좁고 긴 공간임과 동시에 공간과 공간 사이의 매개이자 그 자체로도 공간이고, 그 끝과 끝은 아주 환한 빛으로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공간 하나에 함축한다면 터널에 빗댈 수 있을 것이다. 110분 내내 은근하게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어둡고 긴 자책의 길을 걷는 유미코의 모습을 조명하고 있으며, 종지에는 그녀도 희미하게나마 빛을 발견해 그 길에서 벗어나고자 걷기 시작했으니까.

근경에는 어둠, 원경에는 빛. 또한 대부분의 장면에서 그 빛들은 프레임 안에만 존재하지 않고, 물이나 광택등을 통해 잔잔하고 넓게 퍼진다. 정말 환상적인 미장센이다.


  위에 첨부한 세 터널들의 끝은 각자 다른 풍경으로 빛나고 있다. 그것들은 가장 상단에 인용한 영화의 클라이맥스 대사, 그리고 이 영화의 제목과 명확하게 상통한다. - '환상의 빛'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다양한 문학과 회화와 매체예술에서는 누군가의 추락으로, 비통함이자 누군가의 각성 계기로, 해방이며 동시에 새로운 시작으로 등등 다양한 시점에서 미지의 영역을 조명하고 있다. 하지만 [환상의 빛] 에서는 그 어떤 시선과도 겹치지 않게 죽음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에서 죽음은 타인의 것, 그것도 철저히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존재하지 않음'을 설명하고 있음과 동시에 이끌림이자 이상향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타인의 죽음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 역시도 권장하고 있다.






슬픔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대사가 많지 않으며, 정적이고 절제된 영화 속에서 그 슬픔은 은유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되며 우리의 상상 속에서 감정은 극대화된다. 이 영화는 고상한 슬픔을 담고 있다. 울고, 소리지르고, 가슴을 쥐어뜯는 상업 신파 영화보다 더욱 마음을 울리는 것이다. 계단을 닦다 풀썩 주저앉는 유미코를 보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 어떤 원망의 말도, 슬픔도 표현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아직 슬픔으로부터 회복되지 않았다. 제 실수로 실종된 할머니와 어릴 적 소꿉친구이자 둘 사이에서 아이까지 만든 남편의 자살을 제 안에서 담고 살고 있는 그녀는 영화 내내 상복처럼 검은 옷을 입는다. 폭풍우 치는 날 바다에 나간 옆집 할머니를 보며 걱정하고 그녀가 돌아옴에 안심하며 남편과 함께 갔던 가게들을 찾고 비슷한 상실을 겪었던 재혼한 새 남편에게 사라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위의 인용은 이 대사에 대한 새 남편의 답이다. 


'그 사람이 왜 자살을 했고 왜 철로 위를 걷고 있었는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게 돼. 그 사람이 왜 그랬을 것 같아?'


그녀가 잃었던 그 사람들은 앞으로도 평생 유미코의 안에서 살아가겠지,


  영화의 말미에서 그녀는 흰 옷을 입는다. 다른 색도 아닌 흰 옷이라는 것이 그녀가 치유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치유되기 위해 그들을 잊지도 않을 것이며 전처럼 슬픔과 기억을 피하거나 껴안고 매몰되는 것을 반복하지도 않을 것이며 다만 문신처럼 그들을 새긴 채로 살아갈 것이다. 그들은 하강하지 않았으며, 외로움과 절망으로 향하지 않았기에. 저들이 끌리는 빛과 이상향을 향해 여정을 떠난 것이기에. 


 긴 통로는 떠난 이들에게는 삶과 죽음을 잇는 연결이었고,  그녀에게는 그로 인한 슬픔이었다. 그들에게 끝, 빛이 죽음이었다면 영화 속 유미코의 끝은 새 남편의 작은 위로가 아니었을까. 길고 긴 자책과 원망, 그리움과 같은 질척이고 어두운 감정에서 벗어나 밝은 곳을 볼 수 있게 해 준. 




초회 포스터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 영화에 '죽음이라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을 생각하기 위한 도구가 아닐까. 죽음 자체보다 상실의 아픔을 안고 그럼에도 살아가는 남겨진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앞으로 우리에게도 수많은 타자의 죽음들이 닥칠 것이고, 어떨 때는 다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슬프고 절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환상의 빛' 은 모범적인 교과서를 영화에 녹여낸 것 같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마냥 잊지는 않아도 슬픔에 매몰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슬픔을 승화하여 그 기억들을 몸에 새기고 흡수해 나를 이루는 하나의 요소가 되도록. 


흘러간 사람이 절망이 아닌 희망과 빛을 찾아 떠나간 것이며 우리도 언젠가는 빛으로 흘러가리라는 위로를 가슴 한 켠에 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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