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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안 Jul 26. 2021

덕질이 밥 먹여준다.

쓸 데 없는 경험은 없다.

평생을 투병하면서 살아야 했다. 6살에 처음 뇌혈관에 이상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7살 한 해는 병원에서 산 기억밖에 없다. 완치는 없는 난치병이라고 했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었다. 수술을 받아도 진행을 늦출 뿐이라고 했다. 늘 예고 없이 찾아오는 두통은 밤새 구토를 하게 만들었고. 잠듦으로 잊을 수도 없었다. 잘 수가 없어 눈을 뜬 채 몸부림을 쳤다.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학창 시절 12년 동안 개근상은, 당연히 한 번도 못 받았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라는 생각을 일찍부터 했다. 세상에 재밌는 게 없었다.

 설상가상 11살 때 뺑소니를 당해 다시 뇌출혈이 일어났다. 정신 차려보니 중환자실이었다. 유급은 면했지만 또 한 번의 뇌 수술을 받아야만 살 수 있었다. 두 번째 삭발이었다. 무기력은 너무나 빨리 나를 집어삼켰고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튼 티브이에,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게 노래하고 연주하는 어느 아이돌의 무대를 보고 치였다. 입덕도 교통사고처럼 벌어진 일이었다.

 그때 내게 덕질은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방구석 덕질을 시작했다. 팬카페 활동을 하며 12살 때 포토샵을 독학했다. 같은 카페 회원들에게 축전과 시간표, 펜띠, 과목별 이름표 등을 만들며 나눠줬다. 감사하다며, 너무 예쁘다며 달리는 댓글들이 그저 좋아 계속했던 일이었다.

 손재주가 좋아 중학생 때는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에게 플랜카드를 만들어줬다. 당시 건당 5,000원. 재료비와 인건비를 빼면 사실상 적자였다. 그래도 친구들이 만족해하는 모습이 좋았고 뭔가 만들어내는 게 성취감이 되었다. 결석이 하루하루 쌓일 때마다, 진도가 늦어 교과서 안에서 허우적거릴 때마다 좌절과 죄책감, 무력감은 커지기만 했고 삶은 회의적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만큼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모든 걸 잊게 했다. 곧 전교에 소문이 났다. 다른 반 아이들도 찾아와 자기 오빠들 플카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일찍이 시작한 덕질이 쏠쏠한 성취감이 되어 나를 인간으로 키웠다.



 고등학생 때에도 물론, 한 달에 두세 번씩은 병원을 전전하느라 내신도 수능에도 집중하지 못한 3년을 보냈다. 병력을 이유로 체육 시간을 빠졌고, 야자를 유일하게 안 하는 일반계 학생이었다. (그 당시에는 예체능 학생들만 학원장의 인증서를 받아 야자를 뺄 수 있었다.) 남들이 야자 하는 그 시간에, 나는 덕질을 했다. 살기 위해 했다. 살고 싶어서 했다. 무기력하게 혼자 집에서 보내는 저녁 시간이 너무 싫어서, 약한 몸을 하고도 서울까지 가서 경기란 경기는 다 찾아봤다. 격한 운동이나 크게 우는 것, 뜨거운 것을 먹어도 안되고 흥분을 해서도 안된다는 의사의 소견을 무시하고 객기로 소리를 질러대며 우리 팀을 응원했다. 차라리 이러다 죽으면 더 행복하겠다 싶어서.

  10년 안에는 재발을 할 거라던 의사의 예언은 틀렸다. 17살, 두통은 계속됐지만 검사를 해도 결과는 같았다. 18살이 지나고 수능을 볼 때까지 재발하지 않아 의아했다. 수능을 치르고 대학에 입학한 날은 얼떨떨하기까지 했다. 이때까지 내가 살아있다니. 남들과 같은 평범한 새내기를 보냈다. 여전히 두통으로 결석한 날은 많았지만.

 방심한 틈을 타 다시 병증이 나타난 건 대학교 2학년, 스물한 살 때였다. 이미 상황이 걷잡을 수없이 커졌다고 했다. 당장 이 진료실을 나가서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 바로 원무과로 가 빠른 날짜를 잡아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다시 삭발을 할 바엔 그냥 나가서 술이나 마시다 죽고 말겠다며 부모님께 불효를 저질렀다. 처음 아버지의 오열을 보고 나서 결국 수술대에 다시 올랐다. 세 번째 수술이었다. 

 삶은 이어졌지만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매일 새 벽 네시 반에 채혈을 해야 했다. 혈관에 주삿바늘을 꽂으면 그 혈관은 다시 쓸 수 없다. 여기저기 찔리고 구멍 난 양 팔이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자 이제는 손가락에, 발등에, 쇄골에까지 바늘을 꽂았다. 이렇게 살 바에 죽는 게 낫지. 매일매일 기도했다. 하느님 제발 오늘요. 오늘 자는 동안 절 데려가 주세요. 하지만 매일 네 시 반마다 달그락거리는 메탈 트레이 소리와 간호사의 깨움에 눈을 떴다.

 헤모글로빈이 정상수치로 돌아오지 않아 퇴원을 한 주 더, 또 한 주 더 미뤘다. 그렇게 겨우 퇴원하고서 세상으로 나왔는데, 차창 밖으로 보이는 세상이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세상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반년을 칩거했다. 동기들에겐 내 연락이 없으면 죽은 줄 알라고 일러뒀었다. 히키코모리처럼 먹지도 씻지도 않고 침대에만 틀어박혀 누워있었다. 잠이 오면 자고, 잠이 오지 않으면 그냥 천장을 보며 누워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티브이 소리에 거실로 나갔다가 자연스럽게 어느 배우에 빠졌다. 그게 다시 세상으로 나온 계기가 됐다. 배우를 따라다니며 영상을 찍었다. 한 커뮤니티에서 이름깨나 날렸다. 다들 대포만 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고 보정하는 동안 나는 풀캠을 찍어서 올렸다. 반응도 좋았다. 스케줄만 끝나면 온라인에서는 다들 내 영상만 기다렸다. 그때 영상 촬영과 편집을 배웠다.



 덕질을 하는 순간만큼은 아픈 현생을 잊었다. 행복했다.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하는 사랑 이래도 주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이게 사는 거구나. 이렇게 사는 거구나를 느꼈다. 여러모로 덕질을 통해 정체성과 가치관이 형성되었다.

 내 돌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을 때같이 힘든 시간을 보내며 이겨낸 인내심과 끈기, 누군가를 대가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순수한 마음, 선착순으로 입장 가능하던 경기 결승전을 보기 위해 같은 팬덤과 함께 노숙해가며 밤샘하던 열정, 그로 인해 생긴 사회성, 그리고 테크닉 적으로는 포토샵, 영상, 글쓰기 등의 실력이 다져졌다. 결론적으로 내가 지금 콘텐츠 업에 종사할 수 있는 이유의 시발점은 덕질이다.

 마지막으로 한 검사에서 경과가 좋아지고 있단 소견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외면했던 삶을, 남들보다 뒤처진 삶을 부랴부랴 쫓아가느라 바빴다. 덕질을 할 새가 없었다. 그럼에도 콘텐츠를 만들던 경험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긴 휴덕 기간 동안엔 그저 블로그에 이것저것 만들어 올렸다.



 12년간 개근상 한 번 타보지 못하고, 학부 생활 급격하게 찾아온 시한부 선고로 투병을 하느라 대외활동은커녕 인턴 경험도 전무했던 터라 취준생인 날 대기업에서는 받아줄 리 없었다. 4학년 2학기, 정말이지 간절했던 마지막 상반기 공채 결과마저 탈락임을 확인하고 나서, 한껏 좌절한 마음으로 카페 아르바이트 이력서를 쓰고 있었던 때였다.

 마침 로켓으로 급부상하고 있던 스타트업 콘텐츠 회사에서 에디터를 채용하고 있다는 내용이 페이스북 피드에 떴다. 재밌어 보이는데? 대기업도 다 떨어진 마당에, 카페 아르바이트 전에 그냥 재미 삼아라도 써보자, 문서를 열었다. 세상에, 문항은 대기업 자소서 항목보다 많았다. 다섯 문항을 1,000자 이상씩 써야 했는데, 그 어떤 자소서를 쓰는 것보다 재미있었다. 그냥 내가 살아온 인생을 친구에게 얘기하듯이 썼다.

그런데

붙었다.

 1차 서류 과정을 통과하고 나서의 채용 과정은 어느 대기업 공채보다 힘들었다. 2차 온라인 과제 제출, 3차 오프라인 시험, 4차 면접까지 거쳐 최종 합격해 에디터로 합류하게 되었다. 소소하게 일상을 기록했던 블로그가 큰 포트폴리오가 된 셈이었다.

 그 회사에서 나는 무대에서만 봐왔던 내 가수들을 인터뷰하고, 라이브 영상을 촬영하고, 그들을 마케팅하는 콘텐츠를 만들었다. 마침내 덕업 일치의 순간이 온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애초에 나는 콘텐츠 쟁이로 살 운명이었나 보다.

나의 아픔도, 현실을 회피하고 싶어 덕질이란 동굴로 숨어버린 것도, 어떻게 보면 다 지금을 있게 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16살, 덕질이란 단 하나의 공통분모로 친해진 한 친구와 연락한 지 이제 꼬박 16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덕질 이야기를 한다. 산만큼을 더 살았는데도 말이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 가장 순수한 마음이 된다.

 지금도 덕질을 하는 자녀가 못마땅한 어느 부모님들은 덕질이 밥 먹여주니?라고 묻고 있겠지.

하지만 나는 말하고 싶다.

덕질이 밥 먹여준다고.

사회생활 8년 차인 지금도, 내가 회사에서 받은 좌절과 스트레스를 덕질로 해소할 수 있다고.

적어도 회사를 때려치우지 않게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라도 되어주지 않느냐고.

 그래서 오늘도 덕질을 한다.

잔인한 현실에서 나를 웃게 해주는 요소가 하나 더해진 셈이니까.

게다가 무엇보다, 밥 먹여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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