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생의 계급표

by 수안


어린 시절 읽었던 《어린 왕자》의 한 구절이 어른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됐다. 생텍쥐페리는 이렇게 썼다. "창가에는 제라늄 화분이 놓여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놀고 있는 장밋빛 벽돌로 지어진 아름다운 집을 봤어요"라고 말하면 어른은 알아듣지 못한다고. 대신 "10만 프랑짜리 집"이라고 말해야 비로소 고개를 끄덕인다고. 처음 읽었을 때는 그저 어른들을 향한 가벼운 풍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집을 구하러 부동산을 전전하고, 이사를 거듭하고, 아파트라는 단어에 가슴이 뛰던 내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나도 어느새 10만 프랑짜리 집을 꿈꾸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자취를 시작하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암묵적인 계급표다. 원룸, 투룸, 쓰리룸, 그리고 아파트. 이 순서는 단순한 평수의 나열이 아니다. 자취생의 세계에서 이것은 하나의 사다리다. 어느 단계에 있느냐가 곧 그 사람이 사회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가늠하는 척도처럼 통용된다.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모두가 그렇게 느낀다. 나 역시 그랬다.

나의 첫 번째 집은 4평짜리 원룸이었다. 계급표의 맨 아래 칸. 거기서 나는 출발했다. 그 때 나는 우스갯소리로 종종 그 집을 남의 집 화장실 보다 작은 방이라고 했다. 그래도 한 몸 건사하기엔 충분했다. (*아파트 탈출기 2화 : 4평짜리 우주 참고)


두 번째 집은 가로수길을 마주한 벽돌 건물 1층, 8평 원룸이었다. 4평에서 8평으로 넘어오던 날, 나는 이 집에 딸린 작은 베란다에 오래 서 있었다. 베란다가 있는 집이 나에게 이리도 빨리 허락되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이 집은 나에게 묘한 선민의식을 심어주었는데, 언제든 편한 차림으로 문을 나서면 트렌디한 번화가를 누릴 수 있었다는 거였다. 게다가 회사까지는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되는 도어투도어 10분의 완벽한 직주근접성을 자랑했다. 나는 분명 사다리를 한 칸 올라갔다고 느꼈다.

하지만 집의 조건이 나아졌다고 해서 삶의 모든 면이 평온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눈이 오는 날이면 집으로 향하는 가파른 언덕길이 두려웠고, 이웃집은 주말 밤마다 파티를 벌였다. 그 때마다 잠들지 못해 침대에서 몸부림치며 베개를 얼굴 위로 덮어야 했다. 무엇보다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방향이었다. 북향인 그 집은 낮 세 시가 넘도록 해가 들지 않았다. 빛이 없는 공간은 나를 빠르게 우울로 몰아넣었다. 해 질 녘 서쪽으로 넘어가는 햇살 한 줄기가 겨우 창가를 스칠 때면, 나의 마음도 함께 어두워졌다. 화려한 동네의 이면에 숨겨진 어둡고 시끄러운 방. 마침 서쪽에 위치한 대기업으로 이직하게 되면서, 나는 미련 없이 계약 연장을 포기하고 그 어둠을 탈출했다.


세 번째 집은 이직한 직장 근처의 9평 원룸이었다. 비록 이전 집처럼 베란다는 없었지만, 방 자체가 널찍하고 채광이 눈부시게 좋아서 나는 그 집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화장실이 넓었고 싱크대가 컸다. 커다란 냄비와 후라이팬을 동시에 두 개 올릴 수 있는 가스레인지 앞에서 요리다운 요리를 처음 해보며, 나는 비로소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동네는 평화로웠고, 아침에 일어나 영어 공부를 하고 출근할 정도로 내면의 여유가 넘쳤다.

그러나 평화는 외부의 충격으로 쉽게 바스러졌다. 회사가 인수합병을 겪으며 조직이 개편되었고, 버스로 20분이던 출근길은 졸지에 버스와 지하철을 환승해 1시간 10분을 가야 하는 고단한 여정으로 변해버렸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다시 짐을 싸야 했다. 하지만 그사이 차곡차곡 모아둔 돈이 생기자, 마음속에서 새로운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 '원룸 월세'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투룸 전세'로 올라가겠다는, 이전에는 감히 품지 못했던 맹렬한 욕심이었다.


그렇게 네 번째 집에서 드디어 투룸의 세입자가 되었다. 방과 거실이 분리된다는 것, 자는 공간과 생활하는 공간이 나뉜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큰 변화인지는 원룸에서 살아본 사람만 안다.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밥을 먹지 않아도 되고, 잠을 자는 공간에, 행거에 걸린 옷에 음식 냄새가 배지 않았다. 거실은 물론 방마다 커다란 창문이 있고 심지어 싱크대 앞에도 작은 창문이 있어 환기에 용이했다. 기본 옵션이 없는 빈집이었기에 내 취향의 가전제품을 하나둘 직접 채워 넣는 기쁨도 알게 되었다. 이 집에서 엄마 잃은 고양이를 구조해 가족으로 맞이했고, 상경한 동생에게 작은 방을 내어주며 1년이나 함께 살기도 했다. 후에 이 방은 고양이 전용 방이 될 만큼 공간도 내 마음의 품도 넓었다.


하지만 공간이 넓어졌다고 해서 삶의 기반까지 단단해진 것은 아니었다. 집주인의 재정 상태가 악화되면서 빌라 건물 전체가 경매로 넘어가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살던 곳은 7층 건물의 꼭대기 층이었는데, 관리 주체가 사라진 엘리베이터는 한 달 넘게 고장 난 채 방치되었다. 매일 7층 계단을 오르내리며 육체적으로 지쳐갔고, 밤이면 내 전세금마저 저 아래로 추락할까 봐 두려움에 떨었다. 이사하는 날 몇 시간의 실랑이 끝에 기적처럼 보증금을 돌려받았지만, 그 안도감은 나를 문제의 다섯 번째 집으로 밀어 넣는 서막에 불과했다.


다섯 번째 집은 쓰리룸이었고 화장실이 두 개였다. 빨간 벽돌 빌라의 꼭대기 층. 그 집을 처음 보러 갔던 날을 기억한다. 화장실 두 개를 번갈아 열어보면서, 진짜 내 집은 아니지만 어쨌든 당분간은 내 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내가 이룰 수 있는 선에서 꽤 높은 자리까지 올라온 것이었다. 그 집에서 전세 사기를 당하기 전까지는.


그리고 여섯 번째. 드디어 아파트에 입성했다.

독립 후 10년, 여섯 번의 이사. 돌이켜보면 나는 이 계급표를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충실히 따랐다. 더 넓은 집으로, 더 높은 단계로. 그것이 곧 더 나은 삶이라는 등식을 나는 굳게 믿었다. 믿음이 아니라 거의 신앙에 가까웠다. 집 주인이 증발해버린 탓에 계약이 끝났음에도 집을 빼지 못하고 6개월을 보내면서도 이 악물고 견뎌낼 수 있었다 그 신앙 덕분에. 아파트에 가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아파트가 끝이라고.

아파트에 입성하던 날, 나는 실제로 눈물을 찔끔 흘렸다. 20년 된 구축 복도식 아파트였지만 상관없었다. 한국에서 '아파트'라는 글자가 함축하는 것들을 나는 너무 잘 알았다. 도착했다는 감각. 증명했다는 감각. 계급표의 꼭대기에 올라섰다는 감각.


2년 반이 지났다.
나는 요즘 자주 이 질문을 한다. 아파트에서 사는 삶을 성공이라고 볼 수 있는가.


옆집이 끝나면 아랫집, 아랫집이 끝나면 앞동에서 이어지는 드릴 소리와 사다리차 소리에 카페로 도망치고, 출처를 알 수 없는 냄새에 창문을 닫으면서. 작업실로 완벽하게 세팅해둔 내 집에서 일을 못 하고, 억지로 짐을 챙겨 나가면서. 집순이가 집에 가기 싫어하는 이 상황을 나는 무어라 불러야 하는가.

계급표는 넓이를 말해주고, 층수를 말해주고, 브랜드를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내가 얼마나 온전할 수 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묻지 않았다. 아니, 묻는 법을 몰랐다.

자취생의 계급표는 틀리지 않았다. 다만 불완전했다. 그리고 나는 그 불완전한 지도를 손에 쥔 채, 더 나은 곳을 향한 갈증과 예상치 못한 불만 사이를 오가며 10년을 달렸다.


아침부터 이사 두 배 이벤트에 당첨돼 서둘러 카페로 나갔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