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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안 Sep 07. 2021

여러분의 PTSD는 안녕하십니까

'암 걸리겠네'가 지고 'ptsd 온다'라는 말이 번지는 요즘

 음악을 사랑해 작사가가 되기로 결심했지만 정작 소리는 좋아하지 않는다. 청각이 엄청 예민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냐면 화장실의 환풍기 소리나 선풍기의 팬 돌아가는 소리도 참을 수 없다면 가늠이 되려나. 특히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소리를 유달리 못 참는 편인데, 누군가는 운치 있어 좋아한다는 빗소리마저도 싫다. 택시에서 나는 라디오 소리는 물론이고 집 주위의 공사 소리 때문에 구청에 민원을 넣은 건 어림잡아 일곱 번도 넘는다. 당시엔 인지하지 못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독립하기 이전, 그러니까 가족들과 사는 것도 고통이었던 이유가 이 때문인 것도 같다. 엄마가 요리를 하거나 설거지하는 소리,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 청소기를 돌리는 소리를 들으면 불안한 감정이 밀려들며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특히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난 아빠가 명상하려 틀어놓은 음악 소리나, 요리 이후 돌아가는 공기 청정기 소리는 내면에 잠재된 폭력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그래서 독립을 하고서 혼자 살 때는 음악조차 듣지 않는다. 적막한 집에 홀로 있어야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집안 살림에서 나는 소리는 내가 직접 할 땐 오히려 괜찮다. 그건 적어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소리이기 때문에. 샤워할 때 음악을 틀어놓거나 노래를 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엄청 많다던데 그들을 이해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음악을 사랑한다고는 했지만 정작 들을 때는 외출했을 때의 바깥 소음을 가리기 위한 정도인데, 그것도 볼륨을 아이폰 기준으로 3-4칸 정도 틀어놓는다. 큰 소리는 싫다. 같은 이유로 클럽이나 노래방도 가지 않는다. 클럽은 토끼굴에 사람들을 가둬놓고 음향도 안 좋은 스피커를 최대치로 올려 고막을 찢는 실험을 하는 것만 같고, 노래방은 못 부르는 내 목소리도 싫을뿐더러 못 부르는 사람들의 노래를 굳이 듣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귀가 터질 것 같고 정신이 나갈 것만 같다. 큰 소리를 용인할 수 있는 예외 케이스는 딱 두 경우뿐이다. 공연(콘서트, 뮤지컬 및 페스티벌 등)과 불꽃축제. 공연은 어쨌든 관객들을 위해 ‘최상의 음향’이 준비되어 있고 적어도 노래를 엄청나게 잘하는 아티스트들이 선사하는 ‘제대로 된 공연’이므로.

 그리고 의아하겠지만 불꽃축제는, 불꽃이 터지는 소리가 엄청나게 크지만 귀를 찢을 정도는 아니다. 가슴을 터지게 해주는 소리에 가깝다. 펑-펑- 하고 터지는 불꽃 소리는 마치 내 안에 있는 온갖 악과 응어리를 터뜨려주는 회개의 시간 같다. 그 이유로 1년에 한 번 하는 불꽃축제를 매해 기다리며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평생 히스테릭할 정도로 청각에 예민한 이유를 생각해본 적은 딱히 없었다. 그냥 타고나길 예민한 기질이겠거니 하며 살았다. 그리고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예민한 줄도 몰랐다. '다들 싫어하지 않나?' 라며 살았다. 하지만 내 동생의 핸드폰에 내 번호가 ‘예민 보스’로 저장되어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내가 예민해? 네가 둔한 게 아니라?’

아니란다. 나는 예민 보스였다.


 그러다 왜 이렇게 청각에 예민한지 최근 고찰하게 된 계기가 생겼다. 그리고 확신하게 되었다. 8할은 MRI 때문일 거라고.

 MRI는 방사선으로 뇌를 검사하는 기계인데, 거대한 원통에 서랍처럼 삐져나온 침상이 있다. 화덕을 생각하면 쉽다. 침상에 차렷 자세를 하고 누우면 샘이 목과 머리가 움직이지 않게 특수 장치로 고정한다. 침상 바닥은 정말 오금이 저릴 정도로 차갑다. 누워서 고정 틀로 머리를 고정하면 당장 교수형에라도 처할 듯한 공포가 밀려온다. 고정이 끝나면 침상은 오븐에 사람을 밀어 넣듯이 거대한 원통 안으로 밀려 들어간다. 그리고 거대한 원통이 360도로 돌아가며 뇌의 구석구석을 촬영한다. 촬영하며 발생하는 굉음은 상상 이상인데,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죽을 때까지 모를 경험이고, 겪어본 사람은 백번 공감할 고통이다.

MRI를 처음 찍은 건 6살 때였다. 나는 이유 없이 자꾸만 두통을 겪었다. 뜨거운 걸 먹거나 리코더, 단소, 풍선을 불면 특히 기절을 할 정도로 어지러웠다. 두통이 오는 날이면 하루 종일 구토를 해 학교도 갈 수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손발이 저렸다. 병원에 가봐도 특정한 원인도, 주기도 없었다. 1차 병원에서는 도저히 이상을 발견하지 못해, 2차 병원으로 갔다.

 6살이었던 1995년에는 원통 안에서 그 굉음을 듣는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그땐 그럴만한 그런 나이였다. 시간 개념이 없을 나이. 시계를 습관처럼 보지 않는 나이. 그래서 검사가 한 시간이 걸리는지 두 시간이 걸리는지도 모르는 시간 동안 그 어마어마한 소음을 생귀로 감내해야 했다. 관짝 같은 그 안에서  시체처럼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했다. 아무도 나에게 검사 소요시간을 알려주지 않았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그 안에서 빨리 이 고통이 끝나길 눈을 질끈 감고 참아낼 뿐이었다. 온갖 CT와 MRI로 몸을 괴롭혀가며 추적한 끝에 난치병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살면서 세 번이나 뇌를 여는 대수술을 받았다.


 스물한 살, 마지막 수술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열린 귀로 통 안에 들어가 촬영을 했다. 체감시간은 거의 1시간 반. 적어도 안에 있는 동안은 이 굉음의 시간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성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고막과 뇌혈관과 온 핏줄이 다 터져서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없던 폐소 공포도 생길 정도. 도대체 이 고통이 언제 끝날까. 혀를 깨물고 싶어질 정도다.


 MRI를 마지막으로 찍은 건 2년 전, 완치는 없는 병에 진행만 막아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항상 경과를 추적해야 했는데 다행히 2012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찍으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해 한참 잊고 살았다. 그러다 회사 스트레스로 여기저기 온몸이 고장 나며 전혀 다른 증상으로 방문한 병원에서 뇌하수체 이상일 수 있으니 MRI를 찍을 것을 권고받았다. 그때 문득 궁금해졌다. 검사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검사를 받으러 들어가려면 온몸에 금속 덩어리가 없어야 해 액세서리는 물론 시계까지 전부 푸르고 들어가야 한다. 들어가기 전 시간을 체크했다. 그리고 나오니 20분이 지나있었다. 


 최근 회사에서 지원해준 건강검진 덕에, 그리고 최근 두통이 잦아진 터라 오랜만에 경과도 확인할 겸 MRI도 선택했다. 선택하는 순간부터 심장이 두근거렸다. 괜찮겠지, 최근 두통이 생겨도 자주는 아니었으니 별 거 아닐 거야. 스스로를 다독이며.

 당일 모든 검진을 끝내고 MRI 대기를 하면서부터 공포가 밀려들더니 침상에 누울 때는 없던 폐소 공포마저 생긴다.

 그런데 2년 만에 과학은 놀랍도록 발전했다. 기술과 더불어 꼼수(?)도 생겼다. 제공해주는 이어 플러그를 꽂고 그 위로 클래식이 나오는 헤드폰을 착용했다. 통에 들어가기 전 선생님이 말씀해주셨다. “촬영 시간은 5분이 채 안 걸릴 거예요. 조금만 참으세요.” 내가 그렇게 많은 검사를 받을 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검사시간이, 사실은 5분이었던 거다. 뭐, 시간이 흐르면서 과학도 발전했고 그 덕에 소요시간도 짧아진 거겠지. 허탈함에 웃음이 나왔다. 선생님이 알려준 소요시간 덕에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침상에 누워 이어 플러그와 헤드폰을 착용했다. 그런데도 원통으로 들어가는 순간 클래식 음악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고막을 찢는 굉음만이 머리를 울린다. 이어 플러그와 헤드폰, 그마저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뇌의 안녕을 확인하는 작업인데, 그 과정이 뇌를 괴롭힌다. 실제 촬영 시간은 5분이라고 했지만 체감으로는 5분? 어림도 없었다. 서른두 살을 먹은 지금도 체감시간은 15분을 넘었다.

20년 전엔 이걸 어떻게 참고 맨 귀로 촬영했을까.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꼼짝 않고 누워서 이 찢어지는 굉음을 감내해야 했을까. 신경쇠약이 걸릴 법하다.


 나의 청각적 예민함은 어렸을 적부터 겪었던 소음의 트라우마, 폐소의 트라우마, PTSD인 셈이다.

불과 몇 년 전, 어쩌면 지금도 어느 커뮤니티와 미디어에선 사람의 감정이 ‘극대노’에 이르렀을 때 ‘암 걸리겠다’ ‘발암이다’라는 표현이 공공연히 쓰였다. 그만큼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비유적 표현이었지만, 실제 암 투병 환자와 그 가족들의 호소로 지금은 그 표현이 많이 쓰이지는 않는 것 같다. 대신 요즘에 그 표현을 대신하는 용어로 ‘PTSD’가 떠오르고 있다.

스트레스받는 상황이 온다면 ‘아, PTSD 온다’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쓴다.


 PTSD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뜻으로, 어떤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 비슷한 상황에 처해졌을 때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착각을 하며 생기는 스트레스다. 극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는 여성이 미디어에서 비슷한 상황을 보기만 해도 공황이 생기거나, 학교폭력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 뉴스만 보고도 발작하는 증상이다. 즉, 트라우마를 전제하는 장애다. 다 잊었다고 생각한 트라우마가 어떠한 트리거를 통해 다시 살아날 때 쓰는 정신질환이라는 뜻이다. 단순히 이 상황이 역겹고 힘들어 피하고 싶을 때 쓰는 용어가 아니다.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D.P를 본 군필자라면 모두가 하는 말이 있다. PTSD 온다고.

그 말엔 공감할 수 있다. 적어도 내가 겪은 일은 아니지만, 옆에서 봐왔기 때문이다. 친한 동기가 군대에서 조석봉 같은 캐릭터였다. 착하고 순하고 여리던 아이가 군내 가혹행위로 인해 관심병사로 분류되고 끔찍한 나날을 보낸 걸 안다. 자신이 죽고 싶을 때마다, 혹은 자신이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때마다 그는 나에게 전화를 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묵묵히 들어주는 일, 그리고 매주 편지를 보내주는 일뿐이었다. 앉은자리에서 정주행을 하며, 어쩌면 그 아이가 실제로 겪었을 일을 내가 간접적으로 마주치는 순간 문득 그 시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친구는 부디 이 드라마를 보지 않길 바랬다. 10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까지도 나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는데, 그 친구에 가 이 드라마를 본다면 PTSD가 충분히 올 법한 내용이었으므로.


그러니 진짜 트라우마라는 게 어떤 건지 겪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 PTSD를 운운한다면 그저 우습기만 하다. 그게 뭔지나 알긴 하냐고. 그 공포가, 그 혐오가, 생각만 해도 사람을 좀먹는 그 순간을 겪어보기라도 했냐고.


 PTSD란 단어조차 몰랐을 때 나는 단순히 그냥 기질이 우울하고 예민한 사람인 줄 알았다. 수십 년 간 방치한 결과, 공황장애, 사회 공포, 중증의 우울증으로 번졌다. 나는 이제 하루에 알약을 스무 알씩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난치병과는 별개의 문제로 말이다.


 음악을 시작하며 소리의 질감, 레이어, 코러스 등을 민감하게 듣기 위해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의 음량을 최대치로 올리며 듣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예상치 못한 또 다른 고통이 나를 덮친다. 헤드폰을 벗으면, 이명이 들린다.


 몸도 만신창이인데, 정신도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트라우마는 무엇인가, PTSD는 어떤 것인가. 나는 이 세상의 굉음들, 그리고 내면의 소리를 극복하지 못해 나쁜 생각까지 했다가 이내 고쳐먹었다. 이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음악의 힘이 크다.

 지금은 그냥 곡 하나만 내고 싶다. 책 하나만 내고 싶다. 그 마음으로 산다. 이제 PTSD 조차 내겐 글감이 되었다.

어쩌면 나는

마치 조개가 흙을 끌어안아 진주로 만들어내듯, 평생 나를 괴롭히던 고통과의 공조를 선언하고 그 고통을 창조로 치환하고 분출해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나 보다. 어느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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