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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철희 Jul 31. 2024

홍콩 영화계가 내놓은 어쩌면 마지막 걸작

<무간도>

1990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홍콩영화가 할리우드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정도로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했다는 얘기를

믿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랬었다.

그 시절 한국의 젊은 남자들은

주윤발처럼 성냥개비를 입에 물고 다녔고

주윤발과 장국영과 왕조현은

TV 광고에 나와 싱글벙글 웃었다.

그런데 하늘 높은 줄 모르던 홍콩영화의 인기는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이유로 사그라졌고

지금은 “홍콩영화”라는 명칭을

듣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 돼버렸다.



유위강·맥조휘 감독의 2002년 영화 <무간도>는

<첨밀밀> 같은 수작을 간간이 내놓으며

명맥을 이어가던 홍콩영화가

마지막으로 활활 피워 올린 불꽃같은 작품이다.

<무간도>가 히트하고 속편들이 만들어지면서

<무간도>는 시리즈가 됐다.

나는 2003년에 나온 <무간도 Ⅱ: 혼돈의 시대>는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해에 나온 <무간도 Ⅲ: 종극무간>은

줄거리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별로인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수사관과 범죄자가 상대방의 얼굴을 얻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오우삼 감독의 <페이스 오프>에서

영감을 받은 <무간도>는

경찰에 잠입해 활동하는

삼합회 조직원 유건명(유덕화)과

경찰학교에서 교육받던 중에

삼합회에 잠입하라는 임무를 받고

조폭이 된 진영인(양조위)이

“언더커버”라는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받는 고통을 그려낸다.


진영인은 경찰학교에서 언더커버가 되라는 제안을 받는다.


범죄조직에 잠입한 수사관의 고충과 고뇌,

활약상을 다루는 “언더커버 장르”는

<도니 브래스코> 같은 수작을 틈틈이 내놓았는데,

<무간도>는 수사관은 범죄조직에 잠입하고

범죄자는 경찰이 된다는

이중의 언더커버 설정으로

이 장르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었다.

<무간도>가 없었다면

할리우드에서 만든 리메이크인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디파티드>는 고사하고,

경찰차 뒷자리에 앉은 최민식이

운전석에 앉은 이정재에게

“너, 나하고 일 하나 같이 하자”고 말하면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신세계>도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무간도>는

1980년대 중반부터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홍콩영화계를 대표하는 장르였던

홍콩누아르의 특징들이 집대성된 작품이다.

네온에 물든 홍콩 번화가에

싸늘한 분위기를 불어넣는 청색 색조,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에너지가 팽배한 화면구도,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들의 강렬한 연기,

급박한 속도감이 느껴지는 편집 같은 특징들 말이다.

이 모든 특징들이 어우러지면서

영화에는 시종일관 주인공들을 옥죄는 긴장감이 감돌고,

잠시라도 방심했다가는

정체가 들통나고 목숨이 위태로워질 위험에 처한 가운데에서도

원래 소속됐던 조직이 부여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주인공들이 느끼는 압박감이

영화에 제대로 구현된다.

황 국장(황추생)이

한침(증지위)의 조직과 태국 조직의 마약 거래 현장을

급습하려는 작전을 전개하는 동안

양측에 잠입한 언더커버들이

정체가 발각될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치열한 머리싸움을 펼치는 장면은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같은 세계에 공존할 수 없는 존재들이면서도

서로를 존중하는 묘한 관계인

황 국장과 한침은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러니까 각자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자존심 싸움을 벌이는 취조실 장면에서

상대 조직에 언더커버를 잠입시킨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러면서 진영인과 유건명은,

그리고 관객들은 무간지옥의 더 깊은 곳으로 내몰린다.

언더커버가 되는 것은

연기자가 맡은 배역에 몰입해 연기를 펼치는 것과 비슷하다.

유건명은 가끔씩 한침이 제공하는

잡범들을 체포하는 것으로

자신이 진짜 경찰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고,

진영인은 마약의 품질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마약을 흡입하는 것을 통해

자신은 뼛속까지 범죄자라는 걸 입증해야 한다.

두 사람은 주위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자신들에게 부여된 역할을 충실히 연기해야 하지만,

그 역할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바람에

자신의 진짜 모습을 망각해서는 안 되는

외줄 타기를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한침과 유건명이 접선하는 장소가

극장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주인공들과 관객들이 긴장감과 압박감에서 벗어나는 순간은

두 사람이 음향장비 매장에서

차이친(蔡琴)의 아련한 노래

<피유망적시광(被遺忘的時光)>을 듣는 순간,

진영인이 이심아(진혜림) 박사의 사무실에서 단잠을 잔 뒤

“나는 경찰”이라는 진실을 농담하듯 털어놓는 순간,

유건명이 소설가 아내 메리(정수문)와 오붓한 시간을 갖는 순간 정도일 뿐이다.


그러나 잠깐의 위안을 제공하는 그런 시간도

그들을 지옥에서 꺼내주지는 못한다.

영화는 결국 제일 유명한 장면을 향해 치닫는다.

황 국장과 접선하는 장소가 발각됐다는 걸 알게 된 진영인은

빌딩에서 도망친 후 언더커버 정체성으로 변신해서는

다시 빌딩으로 돌아온다.

그가 택시에서 내려 빌딩으로 들어가려 할 때 일어난 일이

그와 관객에게 안겨주는 충격은 정말로 어마어마하다.



내가 <무간도>에서 그 장면 못지않게 좋아하면서

인상적이라 생각하는 장면은

영화 막판에 진영인과 유건명이 만나 서로의 정체를 확인하는 장면이다.

그들은 황 국장과 진영인의 접선장소였던,

그러니까 지옥에서 약간이나마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인

고층빌딩 옥상에 있다.

유건명의 머리에 총을 겨눈 진영인은

진실을 밝히겠다며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한다.

그러나 그를 태운 엘리베이터는

지옥 밖으로 그를 데려가지 않는다.

엘리베이터는 그와 유건명과 증명하기 힘든 진실을 태우고는

지옥으로 추락하듯 하강한다.

총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빛줄기가,

엘리베이터 통로의 어둠을 제압하기에는

너무 가냘픈 빛줄기가 새 나온다.

그러고서 영화에 남는 것은

메리가 구상하는 소설에 등장한

다중인격을 가진 주인공이다.

선한지 악한지 알 길이 없는 주인공.



아강(두문택)은 관객이 그의 존재를 잊을만하면

등장하는 조역이지만

강렬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캐릭터다.

자신은 경찰을 알아보는 눈을 가졌다고 떠들어대던 아강이

죽기 직전에 진영인에게 하는 말은 진담일까,

아니면 진영인의 정체를 알면서도

그의 안위를 걱정해 돌려 말한 충고일까?

그의 충고는 <신세계>에서 이자성(이정재)의 정체를 알아차리고도

그를 지켜주려는 정청(황정민)이 했던 처신과 비슷하다.


나는 <무간도>는 그 자체로도 훌륭한 영화지만

<무간도>의 진정한 가치는

홍콩누아르의 마지막 걸작일 가능성이 큰

<무간도 Ⅱ: 혼돈의 시대>를 낳았다는 데 있다고 본다.

<무간도 Ⅱ>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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