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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철희 Sep 04. 2024

"인간답게 살기 위해" 나치에 "저항"한 유대인들

<디파이언스>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2008년 영화 <디파이언스>와

엘렘 클리모프 감독의 1985년 영화 <컴 앤 씨>는

나치가 2차 세계대전 당시 벨로루시에서 자행한

잔혹한 만행과 그에 따른 여파를 다룬다.

벨로루시를 침공한 나치는

“자신들은 힘이 세고 벨로루시는 약소국이다”는 이유 하나로

벨로루시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하는

야만적인 행위를 저질렀다.

육식동물도 배고픔을 달래는 데 필요한 정도의 살생만을 할 뿐

재미 삼아 살생을 하는 일은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영화들에서 묘사됐듯 자신들보다 약한 이들을,

특히 유대인들을 끔찍하게 괴롭힌

나치의 작태는 짐승보다 못한 짓이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에게 덤벼들고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 하는 법.

나치와 그들의

꼭두각시 신세인 벨로루시 군경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무기력하게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것만 같던 유대인들은

결국 비굴하게 무릎 꿇고 죽음을 기다리기보다는

“저항(defiance)”이라는 영화 제목처럼

분연히 떨쳐 일어나 목숨을 건 투쟁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비엘스키 형제(다니엘 크레이그, 리에브 슈라이버, 제이미 벨)의 주도 아래

무장을 한 유대인들은

나치와 꼭두각시들을 향한 반격에 나선다.



나치가 인공위성으로 지상에 있는 유대인들의 피신처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훑어볼 수 없던 시대라서,

그리고 첨단 미사일로 원하는 장소를

정밀 타격하지는 못하던 시절이라서

벨로루시의 울창한 숲으로 피신한 유대인들은

숲 속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어렵사리 연명할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의 숲 속 생활은 순탄하지 않다.

생전 총을 잡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자위를 위해 익숙하지 않은 군사훈련을 받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모이면

각자의 생각과 욕구가 다른 탓에 갈등이 빚어지기 마련이니

목숨만 간신히 부지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분란과 의견 충돌은 끊이지를 않는다.

식량을 비롯한 생필품도 턱없이 모자란 상황에서

전염병까지 번지면서 상황은 더욱더 힘들어진다.

형제간의 갈등 끝에

둘째와 그를 따르는 이들이 이탈해서는

반격에 나선 소련 정규군에 가세하면서

가뜩이나 부족한 병력은 더 줄어든다.



그래도 유대인들은 식량 부족과 한겨울의 혹독한 추위,

전염병을 어찌어찌 이겨내는 데 성공하지만,

결국 공중에 모습을 드러낸 독일군 비행기는

이들이 숲 속에 마련한 터전을 공습해 불바다로 만든다.

불길에 휩싸인 거처를 포기하고 도망 길에 오른 유대인들은

그들을 가로막은 호수를 목숨을 걸고 건너는 데 성공하지만

이번에는 여러 대의 전차를 앞세운

나치 병력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다.



<가을의 전설>과 <라스트 사무라이>,

<블러디 다이아몬드> 등을 연출한 에드워드 즈윅 감독은

안정적인 비주얼을 통해 매끄럽게 이야기를 전개하는 동시에

사회적 메시지를 전하는 데에도 능한 감독답게

실화가 바탕이 된 <디파이언스>에서도

깊이 고민해 볼 만한 화두를 관객에게 던진다.

그 화두는 유대인 저항세력이

독일군을 생포해 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치의 횡포에 시달린 탓에

고통스러운 기억을 적어도 하나쯤은 갖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둘러싸인 비무장상태의 독일군은

“처자식이 있다”라고 호소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들에게 그와 비슷한 호소를 했을 때

나치는 그들을 어떻게 대했던가?

그걸 기억하는 유대인들의 귀에

독일군의 간절한 호소가 들어올 리가 없다.

게다가 만약 그 호소에 마음이 약해져 독일군을 풀어줄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 독일군이 중화기로 무장한 동료들을 데리고 돌아와

유대인들을 공격할 가능성은 몇 퍼센트일까?



나치에게 당한 아픔이 많은 데다

나치 군복을 입은 독일군을 신뢰하지 못하겠는 유대인들은

집단적으로 그 독일군을 구타해 죽인다.

하나같이 “정의”를 부르짖던 이들이

비무장상태의 무력한 적군을 잔인하게 죽인 것이다.

싸우면서 닮아간다고 했던가?

이제 유대인들은

자비를 호소하는 무력한 이의 목숨을 빼앗았다는 점에서

나치와 다를 바가 없는 존재가 돼버렸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그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당신은 그 입장이 되면 그들처럼 행동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나?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는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는,

설령 전쟁을 반대하려는 의도로 만든 영화라 할지라도,

스펙터클한 전투 장면을 제시해 관객을 흥분시키기 때문에

은연중에 관객을 전쟁에 찬성하는 입장에 서게 만든다고 주장한 바 있다.

<디파이언스> 역시 관객을

적극적으로 나치에 저항하는 비엘스키 형제의 편에 서게 만든다는 점에서

트뤼포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즈윅 감독은

“생포된 독일군을 어떻게 대하는 게 옳은가?”라는 화두를 던지는 것으로

<디파이언스>를 평범한 전쟁영화의 대열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디파이언스>의 인상적인 장면은 이 장면 말고도 또 있다.

개인적으로 <디파이언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 장면은

유대인 저항세력의 리더인 투비아 비엘스키(다니엘 크레이그)가

이후 계획을 놓고 사분오열된 피난민들에게 호통을 치고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장면이다.

“짐승처럼 쫓길망정 짐승이 되지는 맙시다.

우리는 인간답게 자유롭게 사는 걸 선택했습니다.

자유는 신념을 갖고 지키는 겁니다.

죽게 되더라도 적어도 인간답게 죽읍시다.”


실제 비엘스키 팔치산의 사진


우리는 이후의 역사를 안다.

나치에게 인간 취급을 못 받고 박해받던 유대인들은

많은 이들의 목숨을 희생해야 했지만

결국 이런 마음가짐을 통해 2차 대전을 견뎌냈다는 것을,

그러고 나서도 찾아온 여러 고난을 이겨낸 끝에

비엘스키가 밝힌 “인간답게 사는 나라”를 중동에 건설했다는 것을.

나라를 세운 이후로도 거듭해서 분란에 휩싸였다는 것을.


<디파이언스>는

자신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도 않고 인간 대우를 할 생각도 없는 자들이

자신들을 멸종시키려는 냉혹한 생각을 품고는

전차와 비행기를 비롯한 첨단무기를 앞세워 무자비한 공격을 가할지라도,

보잘것없는 무기와 부족한 병력으로

그런 적들과 맞서야 하는 중과부적인 상황에 처했을지라도

언젠가는 “인간답게 사는 나라”를 건설한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장차 그런 세상을 건설하게 될 것이라는,

그런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런 꿈을 품고 “저항”에 나선 이들을 자연스레 응원하게 된다.

우리는 다름 아닌 인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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