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질 기억과 살아질 기억, 그 사이

영화 '슈퍼노바' 리뷰

2.jpg '슈퍼노바' 스틸 컷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기억이란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기억의 성분에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감촉, 행복했던 날의 냄새, 그리고 달콤한 미각이 포함된다. 게다가 차곡차곡 쌓아온 사회생활과 경력 모두가 오롯이 내 머리 속의 기억에 의존한다. 그러니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어떻게 펼쳐질지 모를 미래까지 한 번에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내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미래가 있다면 그 시간을 끊어내 버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


사라질 기억을 위한 배려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최고의 친구이자 가장 사랑하는 연인으로 지내온 피아니스트 샘(콜린 퍼스)과 작가 터스커(스탠리 투치)는 작은 밴을 몰고 잉글랜드 북부를 여행한다. 평범한 연인처럼 가족을 만나고 친구들과의 파티에 참석한다. 사실 터스커는 조기 치매판정을 받아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두 사람은 더 좋은 기억을 서로에게 남기기 위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여행을 한다. 그리고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여행은 결국 끝나간다.

해리 맥퀸 감독의 ‘슈퍼노바’는 치매로 그간 쌓아온 시간이 무너지는 순간을 맞이한 스터커와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연인 샘의 내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과거와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잃어버리는 순간을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끔찍하다.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더 잃어버리게 될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더 잃어버리게, 혹은 잊어버리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은 더 잔인하다.

기억이 사라진 순간, 나 자신도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차마 사라지지 못하고 남아있는 타인의 기억 속의 나는 어떨까. 나의 기억은 여기서 멈추지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미래 속에서 나는 가장 안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아 두렵다. 주인공은 그토록 갈급하고 분주한 갈등을 겪지만 카메라의 시선은 주인공을 동정하지도 휘두르지도 않고 무덤덤하다.

배우 출신인 해리 맥퀸 감독은 가족의 치매로 고통 받는 친구와 치매로 세상을 떠난 직장 동료를 겪으면서 치매에 관한 시나리오를 직접 썼다고 한다. 더 세밀한 내용을 담기 위해 의료기관에서 3년간 봉사 활동을 하면서, 치매 환자를 그려야 하는 윤리적인 문제까지도 고민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슈퍼노바’는 조심스럽고 신중하면서도 우아하고 정확한 영화가 되었다.


살아질 기억을 위한 선택

우리말로는 초신성이라 불리는 영화의 제목인 ‘슈퍼노바’는 보통의 별보다 만 배 이상 빛나는 별을 의미한다. 제목처럼 해리 맥퀸 감독은 인간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 언제인지를 되묻는다. 그리고 기억을 잃어가는 미래의 나 대신, 가장 빛나는 현재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은 터스커의 선택은 인간의 존엄한 삶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스탠리 투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고 싶어 인간으로 시켜야 하는 존엄함을 선택하는 터스커가 되어 관객들 앞에 섰다. 콜린 퍼스는 존엄함을 택한 연인의 선택을 존중할 것인지,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할 미래를 선택할 것인지 고민하는 샘이 되었다. 두 배우는 감정의 과잉을 최대한 자제하고, 애써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호들갑을 떨지 않는 두 배우 덕분에 꾹꾹 눌러 담은 배우들의 감정이 관객들의 마음에도 꾹꾹 눌러 담긴다.

신경쇠약 직전의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두 배우는 단단하게 서서 크게 움직이거나 절규하지 않는다. 감정의 소동을 단단하게 딛고 선 연인의 복잡한 심리를 사소한 움직임과 눈빛으로 전달한다. 캐릭터가 느끼는 내적 갈등은 흔들림 없이 마지막 절정의 순간까지 도달한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끝을 내려는 연인의 선택마저도 관객들은 이해할 수 있다.

극중 인물인 터스커는 작가다. 과거와 현재를 기록해 미래에 남기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기억을 기록했던 사람이다. 그에게 기억상실은 일종의 사망선고와 같다. 하지만 기억을 잃는다고 삶이 바로 멈춰버리는 것은 아니다. 절망과 좌절의 순간에 박제되어 있을 수 없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행하다고 느끼는 지금 시간 속에서도 그들은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사랑을 나누고 사람들을 만난다.

각자의 기억에 갇힌 채 죄의식으로 살아남을지, 각자의 기억 속에서 자유롭게 빛나야할지, 어떤 선택이 세상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선택인지 두 사람은 신중하게 결정한다. 그리고 그 선택을 존중한다. 기억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에 기억은 더 간절하고 소중한 것이 된다.

떠나려는 마음에겐 용기가 필요하고 떠나보내려는 결심에는 책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가장 빛나는 시간을 나에게도 담고, 너에게도 담겠다는 터스커의 선택과 그 선택을 용서하고 동의해주는 샘의 사랑은 그 어떤 별보다 빛난다. 떠나는 이에게는 사라진 기억이, 남은 이에게는 살아질 기억이 되는 법이라…….


글·최재훈

영화평론가. 칼럼니스트.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제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였다. 2019년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다. 2018년 이봄영화제 프로그래머, 제3회 서울무용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객석, 문화플러스 서울 등 각종 매체에 영화와 공연예술 관련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영화에세이집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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