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젊은 남자> 리뷰
거리에서 문득 만나게 되는 종이인형, 낡은 장식품, 불량식품을 보면 자연스럽게 빙긋 미소 짓게 된다. 어쩌면 징그러웠을 가난과 무지, 소통불능의 기억을 매끄럽게 걸러내고, 폭력과 탄압의 역사를 감춰낸 복고에는 현실과 유리된 매끄러운 낭만만이 오롯이 담긴다. 복고는 꽤 오랜 시간, 우리의 일상 속에서 꽤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살짝 비틀어 보자면 팍팍한 현실을 과거에 대한 낭만적 기억으로 묻어보려는 현실도피로 읽힐 수 있겠지만, 여전히 복고의 감수성이 전달하는 따뜻한 위안의 힘은 치유의 순기능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복고는 그렇게 감수성의 외피와 그 내면이 다르기 때문에 부서지기 쉬운 정서이기도 하다. 추억 가득한 회고담 속 그 시절이 지긋지긋한 기억으로 남은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마냥 밝고 유쾌하기엔 시대적 상처가 크고, 시대적 아픔만을 말하자면 진부해질 수 있다. 그래서 복고적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속이거나, 믿게 하거나, 혹은 설득해야 한다. 당연히 이야기의 진정성도 필요하다.
이정재가 드라마 <모래시계>로 얼굴을 알린 후 1994년 개봉한 그의 영화 데뷔작 <젊은 남자>가 28년 만에 디지털 리마스터링으로 재개봉하였다. 80년대를 대표했던 배창호 감독이 삐삐와 오렌지족, 락카페와 데킬라가 유행했던 시절, X 세대의 방황과 아픔을 그린 청춘영화다. 처음이라 어색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이정재의 연기와 지금은 중년배우가 된 신은경, 이응경, 고(故) 전미선의 풋풋한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다. 이정재는 이 영화로 대종상,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영평상 등 국내 4대 영화제에서 신인상을 휩쓸었다.
줄거리로만 보면 이 영화, 상상 가능한 클리셰로 가득하다. 젊은 남자 이한(이정재)은 부유층 여성들과 즉석 만남을 즐기는 인기 없는 패션모델이다. 그는 재이(신은경)와 연애를 하지만, 어느 날 로데오 거리에서 만난 연상의 여인 승혜(이응경)에게 반한다. 하지만 그는 성공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 한다. 결국 그는 톱 모델이 되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두지 않는다.
영화 <젊은 남자>가 흥미로운 것은 당시 신세대 영화를 표방했지만, 개봉 당시 청춘의 고민을 직선적이고 단순하게 그렸다는 평을 받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2022년, 다시 보는 <젊은 남자>는 클리셰로 가득한 영화라기보다 당시의 시대상과 당대 최고의 인기 배우들을 담아낸 다큐멘터리 필름 같다. 배우들의 고르지 못한 연기와 현실성이 떨어져 서걱거리는 이야기의 톤이 눈에 띄지만, 90년대라는 시대를 보는 소소한 재미가 이야기의 느슨함을 채워준다.
1994년 이후, 참 많은 것들이 변했다. 필름 영화는 디지털 영화로 바뀌었고, 영화계의 지형도도 변했다. 오렌지족과 X세대, 그리고 삐삐는 과거의 물건이 되었다. 20세기가 끝나가고 있고, 21세기라는 미래를 상상하지만 누구도 시간을 확신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잘생겼지만 어설픈 느낌의 이정재가 세계적인 배우이자 감독이 될지는 누구도 몰랐다. 영화 속 인물인 이한은 미래가 불투명했던 불안정한 청년이었지만, 이정재는 반듯하게 나이 들어 성공한 남자의 삶을 살고 있다.
재개봉된 <젊은 남자>는 달짝지근하게 현재를 에둘러 잊고 복고의 기억상실에 기대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과거의 청춘을 박제하고 있지만, 나이 들었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우리의 시간은 삶의 중심에 있다. 과거를 떠올리면 시간이 성숙시킨 인생이라는 본질 앞에 서게 된다. 그래서일까? 영화가 끝나면 묘하게 아련하고 아득한 기분에 빠져드는데, 이 영화가 우리들의 과거와 현재를 마치 타임 슬립을 하듯 이어주기 때문이다. 새롭지는 않지만 그립고 반가운 그 기묘한 감정을 우리는 추억이라 부르는 건지 모르겠다.
글 최재훈
영화감독이 만들어낸 영상 언어를 지면 위에 또박또박 풀어내는 일이 가장 행복한 영화평론가. 현재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며 각종 매체에 영화평론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