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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별 Mar 02. 2021

잠과 나

어렸을때는 새벽 시간을 잠으로 무심히 보내는게 아까워 딱히 할게 없어도 볼록한 모니터 앞에서 한참을 그냥 앉아있었다. 잠보다는 새벽에만 채울 수 있는 감성이 더 중요했던거 같다. 그 시간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들, 깨어있는 다른 사람들과 감성을 공유할 때의 묘한 기분. 잠을 자는 기쁨 보다 새벽의 시간들이 소중했기에 출결의 많은 칸을 지각으로 채웠다.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자느라 시간이 다 갔고 또 새벽을 뜬 눈으로 지새다 학교에 가고, 그렇게 밤낮은 바뀌어 있었지만 잠은 잘자는 사람이었다.


불면은 불시에 찾아왔다. 여름이었는데 피부속이 가렵고 벌레가 기어다니는 기분으로 시작됐다. 가려워서 참을수가 없었고 긁어도 긁어도 시원하지가 않았다. 긁느라 잠을 못잤고 밤을 꼴딱 새워도 다음날 잠이 안왔다. 한 두시간 자고 벌떡 깨어나길 며칠, 검색해보니 불면의 증상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긁느라 잠을 못자고 간지러움에 고통스러워 하다가 병원에 찾아가서 약을 먹기 시작하곤 했다. 나 역시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경정신과 라는 곳을 방문해서 약을 처방 받았다. 세가지 약이 들은 봉지 3일치중 하루분을 먹고 설레는 마음으로 잠에 빠지길 기다렸으나 그것은 그렇게 쉽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잠까지 도달하기에는 약을 먹은 뒤 일어나는 화학적 효과를 호기심 넘치게 지켜보는 나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간지러워 하는 나, 이 모든것들에 혼란을 느끼는 나까지 섞여 선뜻 잠에 들 수 없었다. 남은 이틀치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그 뒤로 병원을 몇 차례 바꾼 뒤 정착한 곳에서 맞는 약과 맞는 용량을 찾았고 간만에 잠을 기다리는데, 기분이 참 좋았다. 사실 몇년만에 처음이었다. 잠들려고 누우면 찾아오는 불행한 기억들, 무서운 생각들, 기괴한 상상들이 몇시간이나 나를 놓지 않은채 괴롭혔고 그러다 지쳐 잠든 다음날엔 피곤하기 일수였다. 꿈을 매일 꿨다. 아니,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매일 꾸고 있다. 개운한 잠을 마지막으로 잔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날 정도의 수면 장애를 갖고 있다. 그래도 곧 잠들것이라는 기대감에 행복하게 눈을 감았다. 예상대로 잠은 금방 찾아왔다. 문제는 자주 깬다는 것이다. 약을 먹고 딱 4시간 뒤에 한번씩 깬다. 자다 일어나 시계를 보지 않아도 시간을 맞출수 있을 정도로 규칙적이었다. 약을 증량하고 종류를 바꿔도 각종 수면 장애가 생겼다 없어지고 새로 생겼다.


결국 나는 잠을 아주 많이 자기로 했다. 상비약으로 받은 자나팜과 인데놀은 항불안제와 신경안정제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불안한 나를 편한 상태로 이끌어서 잠에 빠지게 해준다. 가끔 과용하기도 한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때에는 잠드는것 말고는 기분을 나아지게 하는 어떤 방법도 모른다. 한 두시간, 많게는 다섯시간까지 자고 일어나면 잠자기 전의 기분은 잊어리고 개운한 상태가 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자기 전과 자고난 후의 상태가 전혀 다른 사람 같다고 놀라는 친구도 있고, 어떻게 그렇게 잠을 많이 자냐며 놀라는 친구도 있다. 하루 온종일 침대에 누워있는 날도 있다. 자다 깨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현실보다 되려 꿈에 오래 머물고자 하는 욕망으로 다시 잠을 청하고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며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어 마음도 편하다. 잠이야 말로 내가 안정을 취할수 있는 완전한 세상이다.


병원에서는 도피라 말했다. 좋지 않은 방법이라고,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면 복싱이나 달리기, 종이접기나 뜨개질도 좋다고 했다. 뭐든 생각없이 움직일 수 있는거여야 한다고. 잠깐씩 피곤할 때 눈을 붙이는 잠이 아니라 그렇게 마음 먹고 약도 먹고 청하는 잠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고 했다. 바꾸고 싶은게 없다 말했다. 나는 아직 어떤식으로든 변할수도 바뀔수도 없는것 같다고 했다. 잠을 자지 않으면, 약이 없으면 아주 고통스러울것 같다고, 그나마 나의 하루 중 제일 행복한 시간이라 했다. 
의사는 말이 없었다. 다음주에도 그 다음번에도 뜨개질과 복싱 얘기를 했다. 약을 증량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약을 투여하는 환자였고, 상담치료도 입원도 거부 하는 골치 아픈 나 같은 사람에게는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았을거다.


엊그제도 잠만 잤다. 잠깐씩 일어나서 필요한 칼로리를 채우고 다시 잠을 자며 칼로리를 소모했다. 월요일 밤에 잠들어서 수요일 오전에 일어났다. 화요일을 온전히 잠에 바친 후 눈을 뜬 수요일은 마치 완충된 핸드폰 같았다. 뭐든 할 수 있고 뭐든 가능한 기분. 희노애락은 꿈에서 겪은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앞으로의 날들도 이토록 잠과 같았으면 좋겠다. 꿈처럼 살고 현실같은 꿈을 꾸면 그걸로 됐지 싶다. 더 바라는것도 없다. 그러니까 내게 더 많은 잠을 허락하라. 더 잘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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