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멜레아그로스와 운명의 여신 모이라이 자매
칼리돈의 왕 오이네우스의 아내 알타이아는 아들 멜레아그로스를 낳던 날, 운명의 세 여신 모이라이 자매가 아이를 찾아왔어요.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들의 팔자를 주관하는 그들은 첫째 클로토가 운명의 실을 잣고, 둘째 라케시스는 운명의 실을 감거나 짜는 역할을 하며, 막내 아트로포스는 가위로 실을 잘라 운명을 거두는 역할을 했어요.
클로토는 이렇게 찬양했어요. "칼리돈 땅에서 제 아비의 이름을 가릴 자가 태어났구나."
라케시스는 이렇게 노래했어요. "물의 강을 건너면 영광을 얻겠고, 피의 강을 건너면 어미를 슬프게 하겠구나."
그러나 아트로포스는 화로에 있는 장작 하나를 가리키며 "이 아이는 저 장작이 다 탈 때까지만 살 것이다!"라고 예언했어요.
알타이아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아트로포스가 가리킨 장작을 꺼내 불을 끈 다음 항아리에 보관한 뒤 자신만 아는 장소에 숨겨두었어요.
이후 멜레아그로스는 용감한 전사로 자라나 소년 시절 아르고 호의 모험에 참가하기도 했어요. 그 모험을 마치고 돌아와 이다스와 마르페사의 딸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여 폴리도라라는 딸을 두었어요.
'포도 사나이'라는 뜻의 멜레아그로스의 아버지 오이네우스는 디오뉘소스 신으로부터 처음으로 포도나무를 받아 기른 사람으로 전해졌어요. 그는 풍년이 들자 하늘에 계신 신들에게 두루 제사를 지냈는데, 그만 아르테미스 여신이 빠지고 말았어요. 여신은 이 사실에 분노했고, 즉각 칼리돈 왕국에 엄청나게 크고 난폭한 멧돼지 한 마리를 보냈어요. 녀석은 닥치는 대로 논밭을 짓밟고 다녀 곡식을 못 쓰게 만들었고, 가축뿐 아니라 백성들도 죽이고 돌아다녔어요. 이에 오이네우스는 그리스 전역에 전령을 보내 멧돼지를 죽이는 영웅에게는 그 가죽과 엄니를 주겠다고 약속하며 영웅들을 불러 모았어요.
2. 아탈란테와 아르테미스
이 소식을 듣고 수많은 영웅들이 칼리돈으로 모였어요. 테세우스, 이아손, 네스토르, 이피클레스, 펠레우스 등이었어요. 그중에 돋보이는 사람은 이아소스와 클레메네의 외동딸 아탈란테였어요. 아버지 이아소스는 아들이 태어날 것을 확신했지만 딸이 태어나자 갓난아기를 칼리돈 근처 파르테논 언덕에 버렸어요. 그러나 아르테미스는 그 아기를 암곰에게 보내 새끼처럼 품고 젖을 먹여서 키우게 했어요. 나중에 사냥꾼에게 발견된 아탈란테는 그들 틈에서 자라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했지만 결혼엔 관심이 없이 그녀의 수호신인 아르테미스 여신처럼 독신으로 살며 사냥하는 것만 좋아했어요. 그런 그녀를 보는 순간 멜레아그로스는 비록 결혼한 몸이었지만 첫눈에 반해 버렸어요.
"아, 저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생각했어요.
3. 멧돼지야, 게 섰거라!
오이네우스 왕은 몰려든 영웅들에게 9일 동안 극진하게 잔치를 베풀었어요. 열흘째 되는 날 드디어 멧돼지 사냥이 시작되었어요. 다들 멧돼지의 가죽과 엄니를 차지하기 위해 안달이 났기 때문에 사냥은 처음부터 체계가 없이 뒤죽박죽이었어요. 멜레아그로스의 중재로 영웅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달 모양의 호를 그리며 멧돼지가 숨어 있는 숲을 뒤지기 시작했어요. 수색에 쫓긴 멧돼지는 기진맥진하다가 포위망이 점점 좁혀오자 갑자기 은신처에서 튀어나와 날카로운 엄니로 두 명을 죽이고 또 한 명의 무릎을 못 쓰게 만들더니 나중에 트로이 전쟁에서 명성을 떨치게 되는 네스토르를 향해 돌진했어요. 그는 재빨리 근처 나무로 올라가 목숨을 구했어요. 이아손의 투창은 아르테미스의 보호를 받는 멧돼지를 빗나갔고, 이피클레스의 창도 어깨를 살짝 스치는 정도였어요. 실수로 나무뿌리에 넘어진 텔라몬을 펠레우스가 도와주려는 찰나 멧돼지가 그들에게 번개처럼 돌진했어요.
바로 그 순간 아탈란테가 화살을 날려 보기 좋게 멧돼지의 귀 뒤로 날아가 꽂혔어요. 멧돼지는 피를 흘리며 달아나기 시작했어요. 그 광경을 본 멜레아그로스가 소리쳤어요.
"그대의 용기는 칭송을 받을 것입니다. 그대의 용기는 칭송받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앙카이오스가 아탈란테를 조롱하며 사냥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겠다며 사냥용 도끼를 흔들며 멧돼지 앞으로 다가갔지만, 멧돼지는 한발 앞서 앙카이오스의 급소를 물어뜯어버렸어요. 친구의 죽음에 펠레우스가 창을 던졌지만, 그 창에 장인 에우리티온이 절명했어요. 암피아라오스의 화살은 멧돼지의 눈을 뚫어 방향 감각을 잃게 만들었어요. 테세우스의 창은 빗나갔지만, 멜레아그로스의 창은 그대로 멧돼지의 오른쪽 옆구리에 박혔고, 멜레아그로스는 재빨리 다가가 창을 밀어 넣어 반대편 옆구리까지 관통시켰어요. 멧돼지는 한참을 버둥거리다 마침내 하얀 배를 드러내고 대자로 뻗고 말았어요.
4. 멜레아그로스, 운명이 실현되다
멜레아그로스는 칼을 꺼내 멧돼지의 가죽을 벗겨내고는 멧돼지를 처음 맞힌 것이 당신이라며 그것을 아탈란테에게 건넸어요.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멜레아그로스의 외삼촌들은 심한 모욕감을 느꼈고, 큰외삼촌 플렉시포스는 승리의 전리품은 조카 멜레아그로스가 차지해야 하며, 그가 갖지 않겠다면 사냥에 참가한 영웅 중 그와 가장 가까운 친척인 우리 형제가 가져야 한다고 소리쳤어요. 작은 외삼촌 에우리필로스는 멧돼지를 처음 맞힌 사람은 아탈란테가 아닌 이피클레스로서, 그의 창이 멧돼지의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다고 덧붙였어요. 이 말을 들은 멜레아그로스는 그만 이성을 잃어버렸고, 그 자리에서 단숨에 두 사람의 목을 칼로 베어버렸어요.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알타이아는 제정신을 잃고 헤매다 운명의 여신들의 말을 듣고 숨겨두었던 장작을 꺼내와 불속에 던져버렸어요. 장작이 타오르자 다른 곳에서 쉬고 있던 멜레아그로스는 갑자기 온몸이 불타기 시작하더니 가족들의 이름을 외치다 고통스럽게 죽어갔어요. 한편 다 타버린 장작을 보고 나서야 정신이 든 알타이아는 그 불길에 뛰어들어 자살했고, 멜레아그로스의 아내 클레오파트라도 목을 매 그들을 뒤따라갔어요. 아르테미스 여신은 그제서야 분노를 거두고 그들을 멜리아그리데스라는 뿔닭으로 변신시켰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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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여신들은 태어난 아기들에게 찾아가 운명을 점지해 주었어요. 사람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오로지 이 여신들만 할 수 있었어요.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제우스도 어쩌지 못했어요. 그러나 자신의 운명을 알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며 열심히 살아갔어요. 그렇다고 해도 인생의 변수는 늘 존재했어요.
멜레아그로스의 영웅 이야기를 통해 신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요?
알타이아가 운명의 여신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멜레아그로스는 엄마의 손에 의해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했을까요?
일부러 여신들이 엄마에게 운명을 흘려 지금 당장 죽을 수도 있는 아이의 생명을 연장시켜 멧돼지를 죽인 영웅으로 만든 것일까요?
알타이아는 장작을 불에 던지기 전, 배 아파 낳고 기른 자식의 얼굴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을까요?
오라비를 얼마큼 사랑해야 자식보다 더 소중히 여길 수 있을까요?
오라비들은 멧돼지 사냥에서 한 게 뭐가 있다고 가죽을 달라고 저렇게 뻔뻔하게 이야기할까요?
평등사상이 투철한 서양에서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부터 보이는 여성을 차별하는 저 태도는 어떻게 설명이 될까요?
그저 멧돼지를 죽였을 뿐인데 나에게는 온통 의문스러운 것 투성이었어요.
그러나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해서 나의 운명을 알고 싶지는 않았어요.
모이라이 여신들도 큰 틀만 제시할 뿐이에요.
얼마든지 세세한 일들은 나의 의지로 바꿀 수 있어요.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지 후에 나에게 주어진 운명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