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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 Bleu Nov 04. 2017

시대의 흐름을 탄 천재 화가
다비드를 아시나요?


시대의 흐름을 탄 천재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                                               (1748~1825)


<자화상(1794)>,다비드,루브르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다비드는 그림 솜씨만큼이나 처세술도 뛰어난 화가였다. 다비드는 26세 때인 1774년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모든 화가들의 로망인 로마 연수 기회를 잡았을 정도로 그림 실력이 출중했다. 이런 그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자, 자코뱅 당원이 되어 왕정에 정면으로 대항한다. 혼란스럽고 긴박한 정치 상황에서 천재 화가는 어떻게 처신했을까?


프랑스 대혁명 


다비드는 혁명 당시 공포 정치를 펼치던 로베스피에르와 가까운 사이였으며, 국민의회 의장직도 맡았다. 왕정 타도의 선봉에서 루이 16세를 처형할 것인지 결정하는 투표에 기꺼이 찬성표를 던진 그는 이 일로 부인과 마찰을 빚다가 결국 이혼까지 하게 된다. 1793년 1월에 루이 16세가 처형당하고, 그 6개월 뒤인 7월에 혁명 정부에서 민중을 선도하는 신문을 발간하던 마라(Marat)가 반대파에 의해 암살당하자,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을 애도하는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은 마라를 마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Pietà)> 속 예수에 비유하듯 그렸다는 평을 받고 있다.

 <마라의 죽음(Marat, Martyr de laRevolution, 1793)>, 다비드,루브르

마라가 살해당하고 3개월이 지난 10월에는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당하게 되는데 이때 군종 속에 섞여 있던 다비드는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왕비의 모습을 포착해 스케치 한 점을 남겼다.

그림 속 왕비는 기요틴 처형에 방해되지 않도록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잘린 상태로 짐승을 실어 나르는 짐마차 위에 꼿꼿이 앉아 있는데, 굳게 다문 입술과 지그시 감은 눈에서 모든 것을 체념한 그녀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 이 작품 역시 다비드의 천재성이 엿보이는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좋든 싫든 한 나라의 왕비였던 여인을 과거와 너무 다른 모습으로 묘사하여 여인으로서 치욕을 느낄 정도로 그려 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라의 죽음은 성인의 죽음에 비유하고, 옛 왕비는 이렇듯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깎아내린 것이 무척 대조적이다.


 <단두대로 이송되는 마리 앙투아네트(Marie-Antoinette conduite à l’échafaud, 1793)>,다비드

 나폴레옹 시대 


그런데 얼마 못 가 다비드에게 큰일이 벌어진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된 이듬해에 굳게 믿었던 동지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고 만 것이다. 이후 다비드 역시 감옥에 갇혔다가 간신히 풀려났다. 세상이 변하자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충성스러운 화가가 된다. 나폴레옹은 자기 초상화를 멋지게 그려 주는 다비드를 당대 최고의 화가라고 칭찬하며, 자신의 대관식 장면을 그릴 것을 명하고, 다비드는 무려 4년에 걸쳐서 대관식 그림을 공들여 완성했다. 이 그림이 바로 오늘날 루브르에서 두 번째로 큰 그림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이다. 당시 다비드는 루브르에서 가장 큰 그림으로 완성하여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보여 주려 했는데, 그만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의 작품 <가나의 결혼식>의 크기를 잘못 측정하는 바람에 1위 자리를 놓치는 황당한 일을 당했다고 한다. 참고로 <가나의 결혼식>은 높이 6.77미터, 폭 9.94미터이고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은 높이 6.21미터, 폭 9.79미터다. 간발의 차이다.

 <가나의 결혼식(TheWedding Feast at Cana)>,베로네세,루브르


처세술의 대가 다비드가 나폴레옹에게 얼마나 충직한 화가였는지를 잘 보여 주는 작품이 또 있다.

바로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이라는 그림이다. 이탈리아를 침략하고자 말을 타고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표현한 이 그림은 우리가 학창 시절 책받침이나 공책의 겉표지로 수도 없이 보았던 바로 그 그림이다. 그림 속 나폴레옹은 무척 영웅적이다. 승리를 장담하는 장군의 기세가 저절로 느껴진다. 게다가 그림의 왼편 아래쪽에는 나폴레옹과 한니발의 이름까지 새겨 놓았다. 다비드는 이 그림을 모두 다섯 가지 버전(version)으로 그렸는데, 첫 번째 작품은 말메종에 있으며, 독일의 샬롯텐부르크(Charlottenburg), 오스트리아 빈의 벨베데레(Belvedere), 베르사유 궁에 두 점 보관되어 있다.  그림은 거의 비슷하고 망토와 말의 색과 나폴레옹의 미묘한 표정 정도만 차이가 있으니 ‘이 그림 본 그림이다.’ 하고 섣불리 예단하지 말자.



첫 번째 그림부터 시계방향으로 말메종, 샬롯덴부르크, 벨베데레, 베르사유(1), 베르사유(2) 소장이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을 때의 실제 상황은 이 그림과는 전혀 달랐다고 한다. 우선 나폴레옹이 실제로 탄 것은 말이 아니라 노새였다. 험악한 산악 지방에서는 노새가 추위에도 더 강하고 균형을 잡기도 좋다. 다비드의 그림처럼 기세 등등한 나폴레옹의 모습이 나올 수가 없었다는 해석이다. 나폴레옹 사후 30년 정도 지나서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 가 그린 그림은 당시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불행히도 나폴레옹을 대표하는 그림으로는 한 번도 채택된 적이 없다고 한다. 모나리자는 나귀를 타고 프랑스로 왔는데, 그로부터 수백 년 뒤의 프랑스 왕은 나귀를 타고 알프스를 넘었다니, 묘한 대조가 재미있다.

다비드 작품의 경우, 물론 나폴레옹이 멋지게 그려 달라고 주문하기도 했겠지만, 그래도 초상화를 이렇게나 미화한 것을 보면 다비드의 처세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이 간다. 매사가 그렇듯이 처세술이 너무 뛰어난 사람은 말년이 그다지 좋지 않다. 다비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나폴레옹이 실각하자 벨기에로 망명하여 브뤼셀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는다. 삶은 이래서 공정하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누가 뭐래도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수석 화가가 될 정도로 빼어난 재주를 지닌 화가임은 틀림없다. 단지 격동하는 세상에 대처하는 그의 태도가 놀라울 뿐이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1850>,폴 들라로슈,루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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