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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 Bleu Jul 10. 2024

68. 황금 지붕이 들려주는 이야기
      

합스부르크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황금 지붕


오랜만의 오스트리아 여행길.

나를 맞아준 건 인스브루크(Innsbruck)의 유명 관광 명소 황금 지붕(Goldenes Dachl/Golden Roof)이다.

그러리라 생각했지만 역시 이 지붕은 황금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황금 도금으로 만들어진 지붕이었다.

2,657개의 동판에 금도금을 한 타일로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외관은 일단 반짝이는 황금색을 띠고 있으니 보는 눈이 호사한다.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를 연결하는 요지인 티롤(Tirol) 주의 주도인 인스브루크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중심이었던 도시다. 

해발 3000m에 이르는 고봉에 둘러싸인 이 도시는  장엄한 자연과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져 있는 것이 큰 매력이다.

황금 지붕과 장크트야코브 대성당(Cathedral of St. James)이 있는 시가지 모습

인스브루크 구 시가지(Old Town)의 시작점인 수수한 건물에 왜 황금지붕을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야기는 600여 년 전으로 올라가야 한다.

이 건물은 원래 1420년 티롤 지역 영주를 위해 지어진 건물이었다.

그 후 당시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막시밀리안 1세가 1494년 자신이 두 번째 부인을 맞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황금 지붕을 짓게 되었다. 


여기서 잠깐.

우리는 막시밀리안 1세에 대해 좀 알고 가야 한다. 

막시밀리안 1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과 영토를 넓히는데 전쟁과 결혼등 수단을 안 가린 왕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이나 그녀의 막내딸 마리 앙트와네트도 합스부르크 왕가로 그의 후손이 된다.


막시밀리안 1세는 마리 드 부르고뉴(Marie de Bourgogne)를 첫 번째 부인으로 맞아 부르고뉴 지역의 땅을 차지했다. 당시에는 지참금으로 가져온 땅은 자식이 없이 이혼을 하거나 사별을 하면 다시 가져가는 식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아들과 딸을 남기고 단명하자 이번엔 앤 드 브르타뉴(Anne de Bretagne)를 아내로 맞으려 했으나 브르타뉴 지역을 소유하고 있던 그녀를 프랑스 왕가가 순순히 놓아 줄리 없었다.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서둘러 앤 드 브르타뉴와 결혼하는 바람에 막시밀리언 1세와의 혼인은 무효가 되었다.

그런데 말이다. 프랑스에서는 샤를 8세가 후손 없이 세상을 뜨게 되자 이미 기혼자였던 루이 12세가 본처와 이혼을 하고 서둘러 다시 그녀를 왕비로 맞았다. 앤 드 브르타뉴의 땅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이런 연고로 그녀는 두 번이나 프랑스 왕비가 된 여인으로 역사에 남았다.


이런 복잡한 왕가의 결혼 가계도로 앤과의 결혼이 무효화되자 막시밀리안 1세는 밀라노의 귀족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면서 이 황금 지붕을 지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 생활은 평탄치 못했다.

1494년 비앙카와 결혼하였지만 막시밀리안 1세는 첫 번째 부인이었던 마리 드 부르고뉴와 비교가 되면서 제대로 된 궁정 교육을 받지 못한 비앙카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부부 생활은 원만하지 못했으며 비앙카는 아이를 낳지 못한 채 1510년 인스부루크에서 죽었다.


그의 영토 확장 욕심은 한때 인스브루크의 서문이었던 건물에 자신이 소유한 지역의 가문 문장과 소유하고 싶은 지역의 가문 문장을 같이 새겨 넣었던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어 그의 영토 확장 야심을 엿볼 수 있다.

여러 가문의 문장들로 장식된 인스브루크의 서문

이런 생각은 자식대까지 이어져 그의 아들은 스페인의 공주와, 딸은 스페인의 왕자와 결혼하여 겹사돈을 맺고 결국 유럽에서 가장 세력 있는 왕가 합스부르크의 기초를 단단히 잡았던 왕이다.


황금지붕

그럼 황금 지붕의 구조를 한번 보자.

3층 구조로 테라스는 베이(Bay)식 창문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테라스에서 황제가 직접 아래 시가지에서 일어나는 행사를 관람하도록 지은 것이라 한다. 

베이 테라스에서 내려다본 구 시가지

건물 위의 황금 타일만 볼 것이 아니라 기둥에 새겨진 부조와 프레스코화들을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1층 난간의 부조는 황제의 통치 지역의 문장들이 정면에 6개, 측면에 2개 모두 8개의 부조가 새겨져 있다.

정면 6개의 문장(왼쪽에서 3번째가 그 유명한 쌍두 독수리 문장, 합스부르크 문장이고 맨 오른쪽이 두 번째 왕비 스포르차 가문의 문장이다.)

그위 2층의 벽면에는 대형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는데 두 기사가 각기 신성 로마 제국과 티롤을 상징하는 깃발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왼편이 신성 로마 제국, 오른편이 티롤의 깃발이다.

3층으로 올라가면 정면 난간에 모두 6개의 부조가 새겨져 있는데 가운데 2개는 황제에 관한 내용이고 나머지 4개는 당시 유행했던 무어인(Moorish) 댄서들의 아크로바틱 하고 그로테스크한 춤들이 새겨져 있다.  14,5세기 유럽의 왕가에서는 이런 무어인들의 음악과 댄스가 유행이었는데 아쉽게도 악보나 댄스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기록 없이도 가히 현대의 브레이크 댄스의 시조라 할만한 포즈 들이다.


댄서들의 뒤에는 암호 같은 문자가 코드화되어 새겨져 있는데 최근에 와서 해석된 바로는 요한복음 8장 12절의 말씀인 것으로 해석된다고 한다. 

바로 이 구절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3층 정면의 6개 부조
부조된 무어인들의 댄스 모습 (왼편 부터 )

가운데 두 부조는 막시밀리안 1세에 대한 내용인데 왼쪽은 황제, 가운데는 사과를 들고 있는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이고 그 옆은 첫 번째 부인 마리 드 브루고뉴다.

재미있는 것은 오른쪽 부조의 내용인데 황제와 그의 Court Jester(광대)와 Chancellor(장관)가 그려져 있다. 이 부조가 의미하는 바는 정치를 잘하려면 듣기 싫은 소리도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막시밀리안 1세의 정치관을 나타낸 것이라 한다.

막시밀리안 1세와 두 부인(왼쪽), 막시밀리안 1세와 장관과 광대(오른쪽)안

3층의 벽면에 그려진 대형 프레스코화는 당시의 사회상을 배경으로 그려 넣은 것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스 신화에 영웅 이아손의 아르고 원정대 이야기가 있다. 왕위를 되찾기 위해 이아손이 황금 양털을 찾아 원정대를 이끌고 힘든 여정을 거쳐 결국 황금 양털을 찾아오는 이야기다.


그런데 막시밀리안 1세는 이아손처럼 힘들이지 않고 오로지 마리 드 부르고뉴와의 혼인만으로 황금 양털을 가지게 되는데 부르고뉴 지역 기사단의 상징이 황금 양털이기 때문이다. 

막시밀리안 1세가 물려받은 기사단의 수장은 현재까지 합스부르크 왕가가 이어받고 있다. 

기사단의 황금 양털 마스코트(황제의 왕관처럼 기사단 수장은 항상 이 마스코트를 목에 건다.)

이 황금 지붕의 건축은 당시 궁정 건축가였던 니콜라스 튜링(Nikolaus Türing the Elder)이 맡았고 프레스코화는 황제의 궁정 화가였던 요르그 퀠데러(Jörg Kölderer)의 작품이라고 한다.

막시밀리안 1세의 가족 초상화(막시밀리언 1세, 아들 필리페 1세, 첫 부인 마리 드 브루고뉴(뒷줄 왼편부터)/ 손주들(아랫줄))

황금지붕에서 멀지 않은 곳에 'Court Church Innsbruck'를 방문하는 것도 잊지 말자. 

그곳에는 이 위대한 황제를 기리는 그의 기념비(Cenotaph: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비너 노이슈타트(Wiener Neustadt)에 안치되어 있다)가 자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곳은 위 가족 초상화에서 막시밀리안 1세에게 안겨 있는 손자인 페르디난드 1세가 할아버지를 기리며 만든 공간이다.

 

막시밀리안 1세의 기념비(위키미디어)

당시 막시밀리안 1세의 전폭적 후원을 받던 알브레히 뒤러(Albrecht Dürer)는 황제의 멋진 초상화를 남겼다.

그가 합스부르크의 황제이고 황금 양털 기사단의 수장이라는 표시는 모두 왼쪽 상단에 모아 놓고 모든 장식을 일절 배제한 채 한 손에 석류를 들고 고급 스런 모피로 단장한 황제의 모습으로 그려냈다. 

석류는 페르세포네가 하데스에게 끌려와 명계에서 먹은 유일한 음식이기에 그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해석이다.


뛰어난 화가의 터치로 남은 멋진 황제의 초상화다.

막시밀리안 1세의 초상, 1519, Albrecht Dürer,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황금 지붕은 600여 년의 세월의 흐름 속에 인스브루크의 구시가지가 시작되는 시작점에 여전히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 옛날 유럽의 강력한 왕조 합스부르크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이야기를 찾아오는 이들에게 조분조분 전하면서.

짧지만 길게 본 것 같은 황금 지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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