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깊은 도시, 문화와 예술의 도시, 중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도시, 세계 패션의 중심 도시 등등 많은 수식어로 불리는 파리.
그러나 정작 스포츠와는 큰 연관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이미 파리에서는 과거 2번(1900년, 1924년)의 올림픽이 치러졌고 이번이 3번째 올림픽이다.
그런 파리가 올림픽을 개최한다 했을 때 호사가들의 상상의 나래는 다양하게 펼쳐졌다.
과연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다시 세계를 놀라게 할지 커다란 기대감과 함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유래 없는 독특하고 특별한 개막식을 보니 역시 프랑스다 싶다.
연일 방송을 통해 보는 파리의 모습은 문 열고 나가면 파리에 있을 거 같은 행복한 착각도 하게 한다.
1900년 2회 파리 올림픽 때 세워진 '알렉상드르 3세 다리'(37개의 센강 다리 중 가장 화려한 다리다), '에펠탑', '그랑 팔레(Grand Palais)'.
알렉상드르 3세 다리와 그랑 팔레
나폴레옹의 시신이 안치되어 더욱 유명한 '앵발리드'(Les Invalides:17세기 루이 14세 때 건설)의 황금 지붕과 에펠을 전망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 트로카데로 광장의 '샤이요 궁'( Palais de Chaillot:1937년 EXPO때 기존에 있던 트로카데로 궁(Palais du Trocadéro)을 재건축한 궁이다).
몽파르나스 타워 'Le Ciel de Paris Restaurant'에서 내려다본 파리 전경
에펠탑 앞에 펼쳐진 시원한 광장 '샹 드 마르스' 광장(Champ de Mars:18세기 루이 15세의 애첩 마담 퐁파두르가 제안하여 만든 사관학교(École Militaire)의 연병장이었다가 프랑스혁명 당시에는 혁명당의 집회 장소로 유명한 광장 )까지 모두 올림픽 경기장으로 변신하여 연일 모습을 보여주니 말이다.
샹 드 마르스 광장(에펠탑 뒤로 샤이요 궁이 보인다)
이번 올림픽에서는 경기장으로 운영될 예정인 파리 관광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파리 한복판의 콩코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
에펠탑에서 내려다본 콩코드 광장(위키미디어)
사방이 시원하게 트인 콩코드 광장에 서면 튈르리(Tuileries) 정원, 마들렌(La Madeleine) 성당, 센 강을 건너는 콩코드 다리 등 파리 시내 주요 볼거리들이 두루 보인다.
가히 파리 관광의 최고의 장소라 불릴만한 광장이다.
이 광장은 지리적 위치뿐만 아니라 광장이 가지고 있는 역사 또한 어마어마한 장소다.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이 광장이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콩코드 광장은 1748년 루이 15세의 기마상을 세우기 위해 만들어진 광장이다.
그래서 그때는 이름도 '루이 15세 광장’이었다.
1763년 루이 15세 광장의 모습(위키미디어)
그러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뒤로는 ‘대 혁명 광장’으로 불렸다.
혁명 당원들은 '루이 15세의 기마상'을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자유의 여신 상(1793년 8월)'을 만들어 놓았다.
바로 이 '자유의 여신상' 앞에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무시무시한 기요틴이 설치되었다.
이 '자유의 여신상'은 왕정이 복권된 후 1800년 철거되어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1793년 1월 루이 16세 처형'(비어 있는 기단은 루이 15세의 기마상이 서 있던 곳이다)(위키미디어)
'자유의 여신 동상 앞의 기요틴 처형', 작자미상, 까르나발레, 파리
혁명군 지도자 당통(Danton)과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도 기요틴 처형을 피하지 못했고 1,300여 명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마도 1793년 처형된 루이 16세(Louis XVI)와 마리 앙투아네트(Marie-Antoinette) 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결혼식을 올린 곳도 다름 아닌 이곳 콩코드 광장이었다.
당시 이들의 처형장면을 보기 위해 2만여 명에 이르는 인파가 몰렸었다고 한다.
지금은 전 세계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아름다운 광장의 피로 물들었던 아픈 역사다.
크리용 호텔 앞 루앙 동상(서명이 있는 자리가 기요틴이 있던 자리다)
당시 기요틴의 설치 위치는 현재의 '크리용 호텔( Hotel Crillon)' 앞에 있는 '루앙 동상(Statue of Rouen,1836년 설치)' 앞이었다.
현재도 왕가가 처형된 날에는 추모의 꽃이 놓인다고 한다.
우리가 광장 사진이나 콩코드에 세워진 동상이나 분수대등을 감상하기 위해 무심코 밟고 지나는 곳이 많은 사람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피로 물들었던 역사의 장소였던 것이다.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에선 상상하기 힘든 무거운 역사다.
1795년, 공포정치가 끝나면서 대혁명 광장은 화합의 장으로 '콩코드 광장'으로 명명되었다가 부르봉 왕가의 복권으로 참수당한 왕가를 기린다는 취지로 '루이 16세 광장‘으로 조성하려 했으나 1830년 2차 프랑스혁명인 7월 혁명이 일어나는 바람에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광장의 이름은 다시 '콩코드 광장'으로 되었다.
'콩코드'는 ‘화합, 조화’라는 뜻이라고 한다.
1836년에는 이집트가 프랑스의 루이 필립(Louis-Philippe)에게 선물로 준 이집트 룩소르의 오벨리스크가 운반에만 4년여의 세월이 걸린 끝에 광장에 세워지면서 현재의 광장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오벨리스크가 세워지는 날 콩코드 광장에는 20여만 명이 운집했다고 한다.
2024 올림픽 성화가 점화된 튈르리 정원의 연못과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
무서운 기요틴이 서 있던 콩코드 광장에선 이번 올림픽에서는 스케이트 보드, 3대 3 농구, BMX 프리스타일, 브레이크 댄스장등이 열린다고 한다.
200백여 년 전과는 전혀 다른 취지로 또 수많은 관중이 모일 것이다.
같은 장소가 전해주는 급변했던 역사 변천사다.
격세지감이랄까.
어울리는 표현일가 싶지만 딱히 마땅한 단어를 찾기 어렵다.
크고 작은 실수와 운영상의 미흡함이 속속 지적되고 있으나 모든 것이 완벽할 순 없지 않겠는가.
어쨌거나 파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자산을 총출동시켜 올림픽의 한가운데 멋들어지게 장식해 놓은 그들의 독창성에는 많은 이들이 감탄했다.
여기서 문득 1930년대 파리 예술계를 좌지우지한 소설가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의 말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