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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 Bleu Nov 27. 2017

벨레포크의 국민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



'여신'이라 불린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1876>,조르주 클라랑,쁘티 팔레


파리의 중심, 샹젤리제 옆에 자리한 그랑 팔레(Grand Palais)와 마주 보고 있는 쁘티 팔레(Petit Palais)는 '쁘티(작다)'라는 이름 과는 달리 많은 명작을 소장하고 있는 반짝이는 파리의 박물관 중 하나다. 그곳에 들어서면 입구에서 가장 처음으로 만나는 작품이 바로 이 여인의 초상화다. 매우 매력적인 여인이다.

그녀가 누구인지를 모르면 그저 아름다운 모델 중 한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녀는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파리의 상징 중 하나인 오페라(Opera Garnier) 옆에는 우리에게는 '평화 다방'이란 애칭으로 불리는 'Cafe de la Paix'가 있다. 이 카페가 있는 유명한 특급호텔 그랑 인터콘티넨탈 로비에도 화려한 장식 가운데 바로 이 여인의 동일한 초상화가 걸려 있다.


                                          <호텔 로비에 걸린 그녀의 초상화와 오페라 야경>


누구일까? 

궁금할 수밖에 없도록 신경을 자극하는 여인이다. 그래서 알아보았다. 

엄청난 그녀의 이야기를...


그녀는 19세기 최고의 여배우로 평가받는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 1844~1923)였다. 

파리 시 곳곳에 남겨진 그녀의 발자취는 그냥 지나 칠수 없는 강한 포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명성과는 달리 그녀의 출생은 평탄치 않았다. 유대인의 핏줄을 이어받은 그녀의 어머니는 코르티잔(Courtesan, 고급 창녀)이었으며, 아버지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65년의 사라>,펠릭스 나달

자라서는 코미디 프랑세즈(Comédie-FranÇaise)에서 공부했는데, 재학 중 선배 여배우를 때려 퇴학을 당하게 된다. 이후 벨기에로 건너가  귀족(Henry Prince de Ligne)의 정부가 되었는데, 두 사람은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되어 결혼하기를 원했으나 남자 집안의 심한 반대로 뜻을 못 이루고 다시 파리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사라는 이 귀족과의 사이에 그의 외아들 모리스(Maurice)를 얻게 된다. 늘 그렇듯이 귀족과 신분이 다른 여자의 사랑은 해피엔딩이 힘들다.

파리로 돌아온 사라는 다시 코르티잔 일을 하다가 1866년부터 연기를 시작해 명성을 얻어 갔다. 그러나 프러시아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녀가 연기하던 오데옹 극장(Théâtre de l'Odéon:파리 6구에 있는 코미디 프랑세즈 공연장으로 마리 앙트와네트에 의해 1782년 오픈했다) 이 병원으로 차출되는 바람에 그곳에서 간호사로 일하기도 했다. 전쟁 후, 그녀의 연기는 날로 인기를 얻어 다시 코미디 프랑세즈로 컴백하게 되는데.




19세기 최고의 사진작가, 펠릭스 나달(1820~1910)


펠릭스 나달,위키미디어

사진 기술의 발달과 함께 19세기 파리의 거의 모든 유명 인사의 초상 사진을 찍은 인물이 바로 펠릭스 나달(Félix Nadar)이다. 그는 쥘 베른의 소설에서 영향을 받아 풍선 기구를 타고 최초로 공중사진을 찍었으며, 인공조명을 최초로 사용함으로써 사진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또한, 1874년 첫 번째 인상파 전을 파리에 있는 자신의 스튜디오(35 Boulevard des Capucines)에서 개최함으로써 회화 역사에도 영원히 이름을 남긴 당대 최고의 사진작가다.











1872년에 연기한 볼테르의 5막 연극 <자이르(Zaïre)>에서의 주연은 그녀에게 배우의 명성을 되찾아 주었고, 그 덕분에 미국과 쿠바 등으로 순회공연을 가기도 했다.

1899년에 열연한 셰익스피어의 <햄릿(Hamlet)>은 장장 네 시간짜리 공연이었음에도 그녀에게 ‘여신 사라(The Divine Sarah)’라는 애칭을 주었을 만큼 대단한 성공작이 되었다. 그녀는 춘희를 비롯 수많은 연극과 영화에 다양한 배역으로 출연했다. 그녀는 얼굴이 아니라 연기로 인정받는 진정한 여배우였다.

나중에 사라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받게 되었는데, 이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훈장을 받으려면 반드시 프랑스 인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급히 가짜 부모를 내세워 자신의 출생을 위조하여 훈장을 받았다는데, 이를 두고 '춘희(La Dame aux camélias)'의 작가 뒤마는 “그녀는 믿을 게 하나도 없는 여인이다.”라며 사라를 폄하하기도 했다고 한다.

<Théâtre de la Ville>,위키미디어

현재 샤틀레(Chatelet)에 있는 'Théâtre de la Ville'은 한때 그녀의 이름이 붙은 극장 'Théâtre Sarah Bernhardt'으로 운영되었다. 그녀는 많은 객석을 보유하고 있는 이 극장을 파리 시로부터 임대하여 썼다고 한다. 관람객이 많으면 그만큼 수입도 많아져 재정적인 면도 도움이 되겠지만 한 예술인을 위해 파리 시가 극장을 임대해주었다는 것은 그녀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그것도 25년 임대 계약이었다고 한다. 사라의 나이 55세 때의 일이다. 

그녀는 프랑스 인이 가장 존경하는 작가 빅토르 위고(Victor Huge:1802-1885), 쇼팽의 연인이었던 조르즈 상드(George Sand:1802-1876), 그녀의 초상화를 멋지게 그려낸 조르주 클라랑(Georges Clairin:1843-1919), 아르누보의 대가 알폰스 무하(Alphonse Mucha:1860-1939)등 수많은 예술인들과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화려한 여배우였던 만큼 스캔들도 많이 달고 다녔던 그녀지만 결혼은 단 한 번으로 11살 연하인 그리스 배우(Jacques Damala)와 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무책임한 남편으로 평탄치 않았으나 그녀는 끝까지 그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듯하다. 남편이 마약 과다 복용으로 먼저 세상을 뜬 뒤에도 각종 서류 사인에 '사라 베르나르, 다마라의 미망인'이라고 기록했다니 말이다.

사라는 죽기 직전까지도 연기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고, 79세의 고령임에도 새 연극의 드레스 리허설을 하던 중 쓰러져 불과 며칠 뒤 세상을 떴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3만에 이르는 애도객들이 그녀의 운구 행렬을 따랐다고 한다. 그녀는 파리의 페르 라세즈 묘지에 잠들었는데 묘비명은 간단히 'Bernhardt'다.

숨 가쁘게 열정적으로 오직 연기에 모든 것을 걸었던 그녀의 묘비명. 

역시 그녀 답다.



그림 속에 살아 있는 여배우


            <오르세 뒷길에서 발견한 ‘무하 카페’. 카페 이름 아래 그림은 무하가 그린 사라다>



책방이나 부키니스트에서는 알폰스 무하가 그린 그녀의 포스터를 많이 볼 수 있다. 

사라는 자신의 공연 포스터를 체코 출신 화가 무하에게 그리도록 했다는데, 그녀의 성공에 힘입어 포스터 역시 많은 인기를 얻었고, 더불어 무하도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고 한다.

무하가 그린 사라 베르나르 포스터

파리에서 자주 보던 그의 작품을 프라하의 무하 박물관에서 보면서 유럽 나라들이 문화적으로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EU(European Union)’의 탄생은 이미 예정되었던 수순이었던 것이 아닐까.

사라 베르나르는 우리에겐 생소한 배우였지만, 파리에 사는 동안 곳곳에서 그녀의 아르누보 포스터와 이름을 자주 보고 듣게 되었다. 그녀와 관련된 작품을 그저 예쁜 그림 등으로 보고 지나쳤다면 어땠을까? 물론 프랑스인들의 사랑을 받는 여배우를 모른다고 파리 생활에 지장이 올리는 없겠지만 이왕 그곳에 사는 거라면 알고 말하지 않는 것과 몰라서 말하지 못하는 것은 천지 차이 일터. 거기에 담긴 내용을 알고 본다면 작품에 대한 반가움과 기쁨은 더 커질 것은 자명하다. 나의 파리 생활은 이런 과정의 연속이었다.

유행의 첨단을 간다는 파리 사람들이 오래된 자신들의 추억을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은 당당한 자존심으로 보여 얄미울 정도로 부럽기까지 하다. 세계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도시 파리가 중세를 품을 수 있는 여유다.


한편, 리옹 역에 가면 화려한 실내 장식으로 유명한 식당 ‘르 트랑 블루(Le Train Bleu) ’가 있는데, 그곳에는 ‘사라 베르나르 메뉴(Sarah Bernhardt Menu)’가 있다. 그녀와 특별한 인연이 있나 싶어 물어보았더니 그곳 수석 주방장 이름이라고 한다. 

기대가 너무 컸나 보다.


                            <르 트랑 블루 내부와 사라 베르나르 메뉴>




다음 글은 <*무엇이 다른 걸까?  파리의 가게 이름들:카페에서 에피스리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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