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번가의 아름다운 서재 '알베르틴'
뮤지엄을 제대로(?) 방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그것이 세계 3대 뮤지엄 중 하나인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주어진 시간 안에 그 많은 작품을 보고, 이해하고, 감상하고, 소화한다는 것이 아무리 예술에 조예가 깊고 관심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렇다.
입장료도 만만치 않은데 방대한 뮤지엄을 헤매다 시간과 체력에 쫓겨 원하는 작품을 감상은커녕 찾지도 못하고 나올 수도 있다.
요즘은 뮤지엄의 작품보다는 그것을 배경으로 인생샷을 남기려는 적지 않은 관람자들 덕(?)에 주요 작품 앞은 제대로 감상이 어려운 경우도 종종 생긴다.
그러나 뮤지엄 멤버십은 그런 고민과 악조건을 아주 시원하게 해결해 준다.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양만큼만 보면 되니까.
관람자인 내가 칼자루를 쥔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거대한 뮤지엄을 앞에 놓고는 망설이지 않고 일단 멤버십을 끊는다.
어차피 한 번으론 안 될 것을 알기에.
물론 단기간 방문하는 이들에게는 한번 방문도 어려운데 그림의 떡 같은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뮤지엄 방문이 주목적이라면 말이다.
시간과 체력에 쫓기지 않는 이런 여유는 감상자에게는 감상의 깊이를 더해줄 수 있어 작품에 더 몰입할 수 있는 큰 혜택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안다.
하나를 봐도 제대로 보자는 생각이라면 이 방법을 강력 추천한다.
조금은 부담이 되는 액수의 멤버십이라는 생각은 멤버십을 끊을 때 잠시 들뿐 그 후 갖게 되는 여유로움에 잘했다는 생각이 두고두고 들것이다.
방대한 뮤지엄을 관람하다 보면 가끔 '나는 누구? 여긴 어디?'인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받아들여야 할 양이 초과한 경우다.
이럴 때 뉴요커 들은 뮤지엄 감상으로 지친 몸을 뮤지엄 뒷마당인 센트럴 파크에서 쉬어 간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은 천혜의 위치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뉴욕에 머무는 동안 거의 매일 같이 이곳을 찾게 되는 이유 중 하나다.
그런데 말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근처에 아주 좋은 쉼터(?)가 있다.
뮤지엄 관람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5th 애비뉴에 펄럭이는 프랑스 국기를 보고 우연히 들어갔다 알게 된 아주 특별한 장소다.
생땍쥐베리의 '어린 왕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앉아 있는 곳.
뉴욕 프랑스 문화원(Cultural Services of the French Embassy) 안에 있는 조그만 서점 '알베르틴'이다.
혹시 '알베르틴', 이 이름을 기억한다면?
당신은 대단한 분이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문호 마르셀 푸르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에 나오는 주인공 마르셀의 연인 이름이라 서다.
아름다우면서 활동적이고 현대적인 젊은 여성으로 묘사된 그녀.
작품에서는 승마를 하다 사고로 치명적인 중상을 입고 결국 세상을 떠난 여인이다.
학창 시절 한 번쯤 도전해 봤을,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을 어려운 작품의 주인공이 사랑했던 여인
이름이 이 서점 이름이다.
2014년 오픈한 '알베르틴'은 미국 내에서 프랑스 서적을 가장 많이 취급하는 작지만 알찬 서점이다.
'알베르틴' 서점은 뉴욕시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는 '페인 휘트니 저택(Payne Whitney House)'의 1층 맨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서점의 2층이 바로 내가 찾아가는 멋진 곳이다.
'마르셀 푸르스트의 서재'라고 이름 붙은 코지한 서점 2층은 조용히, 그러나 멋지게 찾아온 손님을 맞아준다.
푹신한 소파와 여러 분야의 책들은 이곳에 들어선 순간부터 우리를 또 다른 세계로 인도한다.
소파에 앉아 천장을 보면 우아~~.
너무도 아름다운 천체도가 장식되어 있어 목 아픈 줄도 모르고 올려다보게 된다.
이 천체도는 독일의 화가 '프란츠 폰 슈투크(Franz von Stuck :1863-1928)'를 기념하는 뮤지엄인 뮌헨에 있는 'The Villa Stuck'의 음악실 천장 장식을 모델로 하여 그린 것이라 한다.
묘한 파란색 하늘에 그려진 천체도는 없던 상상력도 마구 솟아오르게 할거 같다.
정말 멋진 곳이다.
이런 곳이 대중에게 열려 있으니 발 아프고 지친 이들이 잠시 쉬어 재 충전하고 가기에는 너무 럭셔리하지 않나 싶으나 불만은 전혀 없다.
서점 1층에는 볼테르(Voltaire),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데카르트(Descartes)의 흉상이 책장 위에 진열되어 있어 분위기를 더욱 업 시켜준다.
'알베르틴'은 프랑스어 책과 영어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책, 영어 책들을 판매하고 있지만 가끔 프랑스어 실력과 무관하게 재미있게 볼만한 책들도 있어 둘러보는 눈이 마냥 낯선 것만은 아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 중 '장 자크 상페(Jean-Jacques Sempé; 1932-2022)'와 '르네 고시니(René Goscinny:1926-1977)'의 팬인 난 이곳에서 그들의 책을 보면서 혼자 싱긋이 웃다 나가곤 했다.
'르네 고시니'는 우리도 잘 아는 '아스테릭스(Astérix)'와 '쁘티 니콜라(Le Petit Nicolas)'를 집필한 작가이고 '장 자크 상페'는 슬며시 미소 짓게 하는 프랑스식 유머 넘치는 삽화로 유명한 삽화가다.
(아서왕 전설의 주인공들:https://brunch.co.kr/@cielbleu/57 참조)
'쁘띠 니콜라'는 1950년대 두 사람이 공동 작업한 어린이용 책으로 프랑스인들에게는 필독서 처럼 된 유명한 시리즈다.
그런데 내가 봐도 재미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30명의 셀럽을 모아놓은 책도 있다.
누가 뽑혔을까 궁금해서 이 책도 슬쩍 열어보았는데.
나폴레옹이 발견한 로제타석의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한 샹폴리옹(Jean-François Champollion)을 선두로 샤넬, 에펠, 샤를 드 골 대통령, 빅톨 위고, 잔 다르크, 루이 14세, 마티스, 몰리에르, 모네, 생텍쥐페리, 에디트 피아프, 볼테르 그리고 마지막에 프랑스의 축구 영웅 지단(Zinedine Zidane)까지.
전 분야에서 우리도 잘 아는 이름들이 주욱 쓰여 있다.
영어로 쓰여 있어서 프랑스어 못해도 책 보는데 전혀 지장 없다.
하물며 재밌기까지 하다.
그래서 한 권 사 갖고 나왔다.
뉴욕에 '센트럴 파크'가 있다면 파리에는 '불로뉴 숲'이 있다.
'불로뉴 숲'에 있는 5,6월이면 장미로 유명한 정원, '바가텔(Bagatelle)'에 관한 책도 보인다.
파리 시절 즐겨 갔던 곳이라 보는 눈이 반갑다.
(파리의 힐링 캠프 불로뉴 숲: https://brunch.co.kr/@cielbleu/50 참조)
찬찬이 둘러보면 재미있는 주제의 책들이 많이도 전시되어 있다.
책을 파는 책방이라기보다는 모두 내 집에 소장하고 싶은 책들만 모아놓은 개인 도서관 같은 안락함과 편안함을 주는 '알베르틴'이다.
소파에 푹 눌러앉아 프랑스 관련 책들을 보다 보면 여기가 파리인지 뉴욕인지 '나는 어디?'하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
멋진 장소를 친구에게 말했더니 '그런데가 있어?' 한다.
뉴요커라고 다 아는 건 아닌가 보다.
하긴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지 싶다.
'알베르틴'이 있는 이 저택은 1909년 올리버 페인이라는 사업가가 조카의 결혼 선물로 지은 집이라고 한다.
'뉴욕의 당시 부호들은 결혼 선물로 뉴욕 맨해튼 5th 애비뉴에 집을 지어 줬구나.'
이 저택이 지어지던 시기를 미국에서는 '도금 시대(Guilded Age:1873~1893)'라 부르는데 남북전쟁이 끝나고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발전하다 불황기를 맞기 시작하는 19세기말까지의 시대로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곪아 터진 미국사회를 풍자하는 마크 트웨인의 책 제목 'The Gilded Age: A Tale of Today '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우리도 잘 아는 철강왕 카네기, 석유왕 록펠러, 금융왕 JP 모건, 광산왕 구겐하임, 철도왕 밴더빌트와 스탠퍼드 등 모두 이 시대가 배출한 왕 재벌들이다.
건축은 뉴욕의 또 다른 명소 '모건 라이브러리(Morgan Library)'를 지은 'McKim, Mead & White'가 맡았다고 한다.
'모건 라이브러리'의 '모건'은 금융왕 'JP Morgan' 맞다.
(금융 재벌의 특별한 서재: https://brunch.co.kr/@cielbleu/289 참조)
'McKim, Mead & White'회사는 이 시절 뉴욕 재벌들의 건축을 도맡아 지은 회사로 이 당시 지어진 건물들은 현재 뉴욕시의 역사적 건물로 관리되고 있다.
뉴욕 명문 컬럼비아 대학 캠퍼스도 이들의 작품이다.
뉴욕에는 이런 역사적 건물들만 찾아다니는 투어도 따로 있을 정도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페인 휘트니 저택'은 수십 년 후인 1952년에 프랑스 대사관 소유가 된다.
1층에 들어서면 원형 로톤다가 있는데 여기에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판명된 조각품이 전시되어 있다.
'Young Archery'란 작품으로 미켈란젤로의 초기 시절 작품이라고 한다.
대단하다. 문화원에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라니.
'그런데,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이렇게 호젓하게 전시되어 있어도 되는 건가?' 잠시 갸우뚱하는데 여기에 얽힌 뒷이야기가 재미있다.
이 저택의 인테리어를 위해 당시 유명 건축가였던 '스탠퍼드 화이트(Stanford White: 1853~1906)'가 런던 경매에서 직접 미켈란젤로 작품을 샀던 것.
그러나 1944년 안주인이 세상을 뜨자 모든 예술품이 경매를 거쳐 처분되었는데 왜 그런지 이 조각품만 팔리지 않고 이 집에 남아있었다고.
그 후 이것이 미켈란젤로 작품이라는 것은 잊혀지고.
50여 년이 지난 1995년 이곳을 자주 방문하던 뉴욕대학 교수가 작품의 심상치 않음을 알아보고 집요하게 추적한 결과 이것이 미켈란젤로의 진품임을 밝혀 냈다고 한다.
그 뒤 진품은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대여해 가고 대신 여기는 복제품을 전시해 놓았다는 것.
얼마나 예술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면 이것이 진품이란 걸, 그것도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란 것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을까 싶다.
미켈란젤로의 대리석 동상을 지나 알베르틴 서점으로 가다 보면 오른편에 매우 화려하게 장식된 방을 볼 수 있다.
오랜 기간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이 방은 2018년 복원 작업을 거쳐 대중에게 공개된 것이다.
'베네치안 룸(Venetian Room)'이라 부르는 이 방은 금과 거울로 섬세하고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데 페인가의 안주인이 즐겨 쓰던 접견방이었다고 한다.
천장의 꽃장식과 금의 세밀한 세공법이 과거 이 집안의 부를 말해주고 있다.
벽에 걸린 초상화 들은 18세기, 19세기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그려진 작품들로 이것 역시 유럽에서 직접 사 온 것이라고 한다.
100여 년 전 뉴욕 부호의 접견실에서 유럽 성(Chateau)의 화려한 방을 보는 듯하다.
로비 왼편, '베네치안 룸' 반대편엔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 앙리 마티스의 작품이 걸려있다.
1946년 작으로 제목은 'Polynesie: Le Ciel'이다.
큰 부담 없이 흥미로운 이런 것 저런 것들을 만날 수 있으니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길 건너에 있는 멋진 저택 방문이 조그만 루틴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외롭게 앉아 지나는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어린 왕자와 사진만 찍고 지나가지 말고 한 번쯤 들어가 보면 좋을 '알베르틴'이다.
프랑스 인사 'Bonjour~'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