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와 친해지기
파리에 살면서 제일 먼저 친해져야 한 것은 숫자였다. 전화번호야 한국에서도 필수로 알고 있어야 하는 번호지만(요즘이야 핸드폰이 대신 외워 주지만), 파리에서는 건물로 들어갈 때와 신용카드를 사용할 때도 생소한 숫자들을 기억해야만 했다. 집에 들어가려면 두 가지의 짧지 않은 번호를 외우고 있어야 했다. 하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번호, 또 하나는 집으로 들어가기 위한 번호라 생각하면 된다. 일단 건물로 들어갔어도 다시 한번 코드 번호를 입력해야만 각자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다. 코드 번호가 짧지도 않다. 알파벳까지 섞여 있어서 한동안은 적어서 가지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프랑스 인들은 이 번호를 다 외우고 있는 것일까? 물론 그러니까 집을 드나들겠지만 말이다. 코드 번호에 익숙하지 않았던 우리는, 한 번은 초대받은 집 앞에 도착은 했으나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다행히 우리를 발견한 친구들 덕에 무사히 들어간 경험도 있다. 습관이 무서운 것인지 외우지 않으면 안 되어서인지, 외우는 것이 아주 어렵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숫자를 달고 사는 프랑스 사람들이 참 신기하게 느껴졌다.
반드시 외우고 있어야 하는 또 한 가지는 현지에서 발급받은 신용카드의 비밀번호다. 프랑스에서는 신용카드로 결제할 때 꼭 비밀번호를 눌러야 한다. 그래서 레스토랑에 가면 종업원들이 조그만 기기를 들고 다닌다. 바로 여기에 카드 주인이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결제가 되는 것이다. 종업원들은 손님이 비밀번호를 입력할 때는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려 비밀을 지켜 준다. 그런데 이것이 잘 안 지켜져 비밀번호가 유출되는 바람에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된 적이 있다. 그 당시 누가 보는 데서는 절대로 번호를 입력하지 말라는 경고 방송이 나오기까지 했다. 심한 사람은 손으로 가리고 비밀번호를 입력하기도 하는데, 상대는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고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카드 비밀번호를 사용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기에 가끔은 생각이 안 나서 당황한 적도 있는데, 옆에 있던 지인이 겁을 준다. ‘비밀번호를 잊어버리면 은행에 벌금 40유로를 내고 다시 발급해야 한다’고.
정말이지 정신 바짝 차리고 기필코 기억해야 하는 번호였다.
문 옆에는 항상 키패드(표시 부분)가 있어 비밀번호를 눌러야지만 육중한 문이 열린다.
0층과 1층
집 구조에도 그들만의 특이성이 보이는데, 층수 이야기다. 파리에 가 본 사람이라면 다 겪어 보았을 ‘0층’이 그것이다. 우리로 치면 1층이 이곳에서는 0층이다. 프랑스식으로 3층이면 우리는 4층이 되는 셈이다. 우리 집은 2층이었는데 한국식으로는 3층인 셈이다. 집으로 찾아온 손님이 그만 한국식 2층으로 생각하고 남의 집 벨을 누르는 바람에 웃었던 기억이 몇 번 있다. 그 뒤로는 집으로 오는 친지들에게 꼭 층수에 관한 설명을 덧붙이곤 했다.
층수가 하나씩 밀려 기록된 루브르 안내지도
달팽이를 닮은 파리의 행정구역 ‘아홍디스망’
파리는 크기가 서울의 영등포구 정도 되는 크기이며 인구는 200만, 그중 한국인은 2만 정도라 한다.
파리는 20개의 아홍디스망(Arrondissement:자치구)이라는 행정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파리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1구의 루브르를 시작으로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달팽이 모양의 구역을 가지고 있다.
이 행정 구역은 나폴레옹 3세와 오스만(Haussmann) 남작의 파리 재 건축계획으로 1860년부터 시행되었다. 1860년부터 시행된 20개의 아홍 디스 망 이전에는 12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우리는 파리가 처음부터 오늘과 같은 아름다운 도시였던 걸로 생각하기 쉬운데 재건 전의 파리는 중세도시의 흔적을 그대로 유지한 채 오래된 건물 들 사이의 좁고 비위생적인 길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오스만 남작의 파리 재 건축 이후 길은 넓혀지고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섰지만 지금도 파리는 중세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각 아홍 디스 망마다 ‘메리(Mairie)’라고 부르는 구청(town hall의 개념)이 자치구의 행정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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