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가 원래 왕궁이 었다는 것은 건물의 규모나 위치로 보아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루브르가 처음에는 파리 변두리의 요새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792년 프랑스 대혁명은 거대한 루브르에도 대대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하늘을 찌르던 절대 왕정이 무너지고 왕가의 안방이었던 루브르는 국민에게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 후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면서 많은 전리품들이 루브르로 모이기 시작하면서 나폴레옹의 집권은 세계 1위를 다투는 박물관 설립의 기반을 만들었다.
요새에서 시작해 세계 제1의 박물관이 되기까지 루브르가 거쳐온 격랑의 세월과 역사의 뒷이야기 들을 알아본다.
루브르 앞 광장의 루이 14세 동상
루브르가 요새였다고?
대부분의 관람 객들이 1,2,3층의 명화 감상에 빠른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나는 쉴리관 지하의 맨 구석진 전시관으로 향한다. 쉴리관 지하 1층에는 중세의 루브르 관(The Medieval Louvre)이 있는데 이 곳에는 12세기 당시 요새였던 루브르의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흥미롭다. 지금은 근사한 궁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루브르가 12세기 후반 처음으로 건물의 모습을 했을 때는 파리시를 지키는 요새(fortress )로 지어졌다고 한다.
1190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800여 년 전.
당시 프랑스의 왕 필립 오귀스트(Philippe Auguste)는 십자군 원정을 떠나면서 Anglo-Norman으로부터 파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파리시 둘레에 성곽을 지을 것을 명령하고 성곽 바깥에는 적들의 침공을 감시하는 요새를 짓게 했는데 이 요새가 바로 루브르의 전신이었던 것이다.
전쟁을 나가면서 자신의 나라엔 방어벽을 만들 걱정을 하는 약간은 모순적인 일이지만 타인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우스개 논리는 그때도 성립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당시 필립 오귀스트가 열심히 지었던 성벽 중 120여 미터는 아직도 파리 4구(Rue des Jardins Saint-Paul)에 남아 있다. 파리가 중세와 현재과 공존하는 도시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파리 시내 4구에 남아 있는 12세기 성벽 유적
4구의 성벽 유적 설명 현판과 필립 오귀스트 왕 때의 파리시 보호 성벽과 당시 루브르 위치
중세 루브르 관은 유적을 옮겨 전시장을 만든 것이 아니라 1984년 루브르 공사 중 발굴되었으며 발굴 장소를 그대로 전시실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전시실에 들어서면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시간 이동을 한 것 같은 묘한 분위기에 쌓이게 된다. 이 기둥들은 12~13세기에 지어진 것들이라 하니 루브르 건물 자체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지상의 각 층에서 아름다운 예술품들이 많은 관람객의 찬사를 받으며 뽐내고 있을 때 루브르 지하에는 이렇듯 수 백 년 된 유적이 세월의 흔적을 가감 없이 보이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돌들 여기저기에 그 당시 작업을 했던 인부들의 싸인이 새겨진 벽돌들이 보이는데 이 돌들을 몇 개 쌓았는가로 일당을 받았다고 하니 수백 년 전 인간의 고달픈 인간사가 800여 년 이란 시간을 훌쩍 넘어 가슴에 와 닿는다. 하트 모양의 인부들 싸인은 고달픈 삶 속에서도 일말의 여유를 보여주는 것 같다.
1984년 루브르 안' Cour Carree' 발굴현장 사진/루브르 중세 루브르 관의 유적들과 인부들의 하트 싸인이 남아 있는 벽돌
회화에 나타난 중세 루브르
1300년 중반 샤를 5세 때의 루브르 모습(위키미디어)
그 후 14세기 샤를 5세가 파리를 에워쌓는 좀 더 넓은 성곽을 지으면서 루브르는 변두리 신세를 면하고 성곽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성곽 안이냐 밖이냐 하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겐 아주 큰 의미가 있었다. 성 안에는 귀족과 같은 상류 충 사람들이 살고 성 밖에는 천민이나 하류층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단어인 부르주아(Bourgeois)의 뜻도 성안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만들어진 말이다. 지금도 비슷한 부류의 말들이 사용되는 걸 보면 우리의 삶은 그때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는 듯하다.
이 당시 루브르의 모습은 지금과는 좀 다른 모양으로 여러 회화 작품에서도 당시 루브르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어 흥미로운데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파리 근교 샹티 성(Chateau de Chantilly)에 있는 림부르그 형제의 그림과 루브르가 소장하고 있는 익명의 독일 화가가 그린 두 편의 그림을 보고 가자.
1. 림부르그 형제의 10월 달력
샤토 브리앙과 레카미에 부인(5. 명장 다비드가 그리다 만 여인, 레카미에 글 참조)이 밀회를 즐기던 샹티 성(Chateau de Chantilly)에는 이 성이 소장하고 있는 장서 중 아주 귀한 책으로 ‘Tre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가 있다. 직역하자면 ‘풍요로운 시간들’ 정도가 될까?
이 책은 프랑스 고딕 문화의 중요 자료가 되는 책으로 1412년에서 1416년 사이에 림부르그 형제(Limbourg brothers)가 만든 것인데 계절에 맞는 농사 법이나 행사 등을 그려 넣은 일종의 중세 달력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이 책의 10월에 해당하는 달력에 신데렐라가 살 거 같은 성이 그려져 있는데 알고 보니 당시 루브르 성을 그린 것이었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재미있지 않은가?
<Tre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October>에 그려진 루브르,1413-1416,샹티성
2. 루브르의 옛 모습이 그려진 루브르 소장품
<생 제르망 데프레의 피에타,1500년 경>,독일 화가, 루브르
1500년 경의 파리 외곽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 제목에 들어있는 생 제르망 데프레(Saint-Germain-des-Prés)는 지금은 '카페 되 마고', ' 카페 플로르'등 유명 카페와 고급 가게들이 즐비한 파리의 가장 세련된 번화가다.
생 제르망 데프레 성당(위키미디어) '프레(prés)'는 넓은 벌판을 뜻하는데 지금의 화려한 생제르망 데프레의 모습으로는 상상이 안 가는 이름이다.
그러나 그림을 보면 1500년 경의 이 곳에는 초원이 있었고 왼편에는 현재도 건재한 생 제르망 데프레 성당이 그려져 있는 걸로 보아 왜 '데프레'란 지역명이 붙은 것인지 이해가 간다.
그림의 왼쪽 뒤편 언덕(현재의 몽마르트)아래로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루브르 성이 그려져 있다.
예술 작품은 예술성으로도 평가받지만 역사적 사료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말이 실감 나는 두 작품이다.
드디어 왕궁의 모습으로
그렇게 요새로 출발한 루브르는 1500년대 중반, 프랑스 문화의 르네상스를 연 프랑스와 1세(레오나르도 다빈치를 프랑스로 초청한 바로 그 왕이다.)가 증축하기 시작하여 그의 며느리 카트린느 드 메디치(2. 프랑스 왕비가 된 이탈리아 여인 글 참조)를 거쳐 약 100여 년 후인 루이 14세에 와서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된다.
루브르 앞 광장에 말을 탄 루이 14세 동상이 우뚝 서 있는 이유다. 카트린느 드 메디치는 파리의 가장 핵심 장소인 현재의 튈르리 정원 자리에 튈르리(Tuileries) 궁도 지었으나 튈르리 궁은 1871년 파리 코뮌 때 완전 전소되어 궁은 없어지고 현재는 튈르리 정원만이 남아 있다.
현재의 모습과 거의 흡사한 루이 14세 때의 루브르(위키미디어)
루브르 쉴리관 입구 왼편 현판에 프랑수아 1세, 카트린느 드 메디치의 이름이 보인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이라는 역대 최고의 성을 짓고 거의 모든 귀족들이 왕을 따라 그리로 이전하게 되어 루브르는 왕이나 가족이 잠시 파리를 방문할 때 거처하는 별궁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왕가 소유의 예술품들을 보관하거나 왕족들의 후원을 받는 예술가들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루이 14세가 베르사유로 왕궁을 옮긴 진짜 이유는 어릴 때 겪은 지방 귀족들의 반란인 '프롱드의 난'으로 파리를 떠나 있어야 했던 아픈 기억 때문 이란 설이 유력하다고. 그 일로 파리를 무척 싫어했으며 지방 귀족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더더욱 절대 왕정을 지향하게 된 것이라 한다.
*프롱드(La Fronde)의 난(1648-1653)
프롱드의 난은 중앙 집권체제에 불복하는 지방의 힘 있는 귀족들이 일으킨 반란이었는데 루이 14세는 이 반란으로 파리에서 쫓겨 나는 신세가 되었다. 난이 평정되어 다시 파리로 돌아오게 된 루이 14세는 원래 사냥터의 쉼터 역할을 하던 베르사유를 왕권의 막강함을 표현하는 최고의 성으로 재건한 것이다. 프롱드는 나무에 줄을 매단 새 총의 일종이다.*
다시 루브르 얘기로 돌아오면 튈르리 궁으로 왕족들이 다시 이전해 오면서 루브르는 재 조명을 받게 되고 현재 루브르에서 가장 긴 전시관인 그랑 갤러리는 루브르 궁과 튈르리 궁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하던 곳이다. 왕실 소유의 많은 예술품을 보관하고 있었기에 루브르의 뮤지엄 전환 의견이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드디어 뮤제 루브르(Le Musee Du Louvre)가 되다.
그러던 중 1792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그다음 해인 1793년 8월 10일.
드디어 루브르는 대중에게 'Musee'로 서 오픈되었다.
루브르에서 가장 화려한 아폴론 전시관 입구에는 이러한 내용이 기록된 현판이 남아 있다.
아폴론 관 입구위에 걸려 있는 루브르 박물관의 개관 기록
그러나 이 당시만 해도 말이 대중 에게 공개였지 예술가 들이나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만 제한적인 공개를 했다고 한다. 공개되는 공간도 '싸롱 카레(Salon Carree)'와 '그랑 갤러리(Grand Gallery)' 일부에 제한되어 있었다.
<1861년의 싸롱 카레>, Giuseppe Castiglione, 루브르 <1789년경 그랑 갤러리>, Hubert Robert, 루브르
현재의 싸롱 카레와 그랑 갤러리
그 후로 200여 년의 세월이 더 걸려 지금과 같은 모습의 루브르가 만들어진 것이다. 루브르를 안내하던 프랑스인 가이드의 말을 생각하면 지금도 혼자 씁쓸하게 웃음이 나온다.
"우리는 뭐가 좋다 하면 그냥 정복해서 가져오면 됐어요. 돈 주고 살 필요 없이~ "
점입가경으로 그나마 자신들이 가져다 관리를 잘해서 보존상태가 좋은 거라면서 현지에 그대로 방치했다면 아마도 파괴되거나 사라져 버렸을 거라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파르테논 신전의 반을 떼어가 영국의 품에 안긴 '엘긴 마블(Elgin Marbles)'이 문뜩 생각난다. 지금은 고향인 그리스가 아닌 런던의 대영박물관에서 관람객을 맡고 있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인 파르테논 신전의 그 마블들 말이다.
상당히 과장되고 설마 그렇게 까지야 하면서도 당시 강대국들의 위상(?)을 생각게 한다.
1793년 불과 600여 점의 전시물로 개장한 이래 200여 년 만에 현재 소장품이 3만 개다, 4만 개다를 설왕설래하고 있으니 가히 장족의 발전이라 하겠다.
루브르의 소장품 증대에 큰 일조를 한 인물은 바로 나폴레옹이었고.
격랑의 시간을 거치며 왕궁을 차지하던 왕가는 사라지고 우여곡절 끝에 루브르에 안식처를 마련한 많은 예술 작품들이 오늘날의 루브르를 세계 최고의 박물관으로 만들고 있지만 명작들 못지않게 멋진 프랑스 왕궁의 흔적들은 루브르가 우리에게 주는 덤이다.
덤은 받아야 맛이다.
명작들 뒤에 가려진 루브르의 매력적인 장소들과 그들이 들려주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차례로 찾아가 보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