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선재센터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세탁기에서 들려오는 비릿한 덜컹거림. 인류가 남기고 간 얼룩을 지워보려는, 그 기억을 빨아대고 있는 정직하고도 무력한 몸짓. 세탁기는 대체 무엇을 왜 빨래하고 있는가? 자연을 통제하고 거대한 문명을 세웠던 인간 역사는 쓰레기와 고철로 남아 인류가 사라진 뒤에도 거대한 폐허로 남는다. 세탁기가 아무리 물을 갈아치우며 돌아간들, 대지를 가득 채운 과오는 씻겨 내려가지 않는다. 정화되지 않는 폐허 곁에서 기계는 목적을 잃은 채, 그저 지워지지 않는 오만을 끝없이 되새김질 한다.
끝내 남아버린 잔해는 기괴한 생명력을 얻는다. 육신이 썩어 사라진 후 남은 해골과 척추를 연상시키는 골격, 한때 인간을 살아 숨쉬게 했던 혈관과 심장이라는 형상을 박제해놓은 덩어리. 조개 속살처럼 맨질거리는 빛깔과 살상 무기 같은 고철이 한 몸으로 엉킨 결정체는 인간이 사라진 빈자리에 무기물과 유기물이 엉긴 응어리가 써 내려간 낯선 진화론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를 위협하는 적군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실상은 인간이 버린 쓰레기와 마구잡이로 쏟아낸 데이터가 스스로 살아남으려 처절하게 진화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새빨간 빛을 내뿜던 직사각 전등은 이제 차게 식어버린다. 무채색 격자에 갇힌 모닥불이 새로운 인류 탄생을 알리는 불씨로 보이는가? 이 또한 결국 똑같은 선택을 되풀이하며 스스로를 멸망으로 몰아넣은 또 다른 미래를 예고한다. 창조자를 자처했던 이가 만들어낸 새로운 지능, 자신이 세계에 군림하는 주인이라 오판한 별종이 빚어낸 알고리즘. 이 거대한 타자가 수행하는 마지막 임무는 인류라는 데이터를 완전히 소거하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이 모든 풍경을 우아하게 관람하는 인간은 변하지 않을 테다.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우리가 손에 쥐고 있던 것은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에 못 이기듯 몸을 맡기는 이 세대가 가진 지독한 권태를 찌르는 가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보라는 명목 아래 도래할 파괴와 재난에도 끝내 눈을 감는다. 보라, 이제 이곳에는 아무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