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끝났다. 형체 없는 명절은 이번에도 음식으로 형체를 얻었다. 아내가 아주 오랜만에 갈비찜을 만들었다. 나는 토란국과 나물을 만들었고, 잡채는 처형에게 얻었다. 명절 상 차리기에 충분한 음식이었다. 일찍 얻어서 냉동실에 들어간 송편은 관심권에서 잠깐 밀렸다.
위의 언급에서 빠졌지만 추석 음식의 백미는 햅쌀이다. 요즘은 쌀이 하도 흔해서 햅쌀의 의미도 예전 같지 않다. 그래도 햅쌀이 농부의 땀과 정성으로 수확한 것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최근에 나는 추석에 햅쌀로 밥을 지어 먹었다. 작년에도(추석은 9월 21일), 그러께(추석은 10월 1일)에도 나의 계획은 차질없이 시행되었다. 하지만 올해는 추석이 빨랐다. 9월 10일이다. 지난해보다 열흘 이상 빨랐다.
올해도 햅쌀을 사기 위해 추석 일주일 쯤 전에 우리가 쌀을 구입하는 온라인 마트를 찾아보라고 아내에게 부탁했다. 도정을 최근에 한 거 말고, 올해 나온 햅쌀이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금방 답이 돌아왔다. 없단다. 다시 찾아보라고 했다. 마찬가지다. 없단다. 그렇게 올해의 햅쌀 프로젝트는 실패했다.
달력만 염두에 둔 나의 계획은 자연의 계획과는 달랐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달력과 날짜도 인간 계획의 범주에 속하지, 자연의 원대한 계획과는 차이가 있는가보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던 금요일(9일) 아침. TV 뉴스는 이날의 탑 뉴스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서거 소식을 전했다. 영국 시각으로는 9월 8일 오후였다. 1926년 생이니까 향년 96세다. 가끔씩 여왕의 소식을 들을 때면 워낙 건강해 보여서 어렵지 않게 100세를 넘기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4년이 남은 때에 여왕의 시계는 멈췄다.
이날 나는 가끔 보는 EBS 영어 채널의 영어 뉴스를 보았다. 실제 발생한 사건을 대략 2개월쯤 후에 전하는 뉴스(News), 아니 ‘올즈(Olds)’다. 이날 영어 뉴스 첫 아이템은 '엘 2세' 여왕 소식이었다. 두 달의 시차가 있으니 당연히 서거 소식은 아니다. 여왕은 올해로 즉위 70주년(플래티넘 주빌리. Platinum Jubilee)을 맞았는데, 그에 관한 소식이었다.
그 뉴스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즉위 축하에 때맞추어 꽃이 피라고 꽃씨를 ‘왕창’ 뿌린 모양이다. 런던 중심가인 런던 타워 주변에 무려 2천만 개의 꽃씨를 뿌렸다고 한다. 2천만 개라니 정말 왕창이다. 그러나 춥고 메마른 날씨 때문에 기대와 달리 3주 정도 늦게 꽃이 피었다고 한다. 그 바람에 관광객들만 눈 호사를 했다는 소식이었다.
이 뉴스에서 내 관심을 끈 문장이 하나 있었다. 꽃씨를 뿌릴 때의 사람의 계획과 자연의 시간에 따라 꽃이 필 때 생긴 시간 갭(gap)에 대한 이야기다.
But nature had a different idea.
뉴스 교재의 번역을 그대로 옮겨 오면 ‘그러나 자연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자연의 생각은 인간의 욕심과 달랐다. 나는 왜 여기서 욕심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까. 햅쌀을 먹고 싶던 내 마음이 기억에서 다 지워지지 않아서일까.
엘 2세 여왕의 장례일은 결정이 되었다. 9월 19일이라고 한다. 즉위 70주년 꽃 축하는 어그러졌지만 이번 장례일의 날씨는 인간의 희망과 잘 맞을지 궁금하다. 아직도 기억에 남은 한 달 전의 물난리와 지나간 태풍의 상흔이 커서 영국 여왕 장례일의 날씨까지 걱정한다. ‘오지랖도 넓다’는 영어로 뭐라고 하나.
*표지사진 : 출처-pixabay. 사진을 고르다가 고개숙인 익은 벼와 익지 않은 벼가 뒤섞인 사진을 보았다. 내 마음이 통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