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시계 이야기(1)
집에 시계가 하나 더 늘었다. 주방용 시계를 사는 김에 하나 더 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 집 방에 놓아두는 시계는 모두 8개가 되었다. 숙박업을 하는 것도 아닌데, 방이 8개나 된다고? 물론 그렇지 않다. 거실, 욕실 등에도 시계가 하나씩 있기 때문이다.
이번 일을 놓고 아내는 나를 시간에 집착하는 사람쯤으로 규정하였다.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개의치 않았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며칠 전 주방 시계가 갑자기 멎었다. 시계에 튀어나와 있는 것은 모두 눌러보고, 배터리도 갈아보았지만 ‘먹통’이다. 주방에 시계가 없으니까 영 불편하다. 음식을 만들다가 시간을 확인하러 움직여야 하니까 그게 또 하나의 일이 된다. 아니면 아내에게 물어야 한다. 묻는 것도 한두 번이다. 서둘러 시계를 사기로 했다. 인터넷을 이용하려고 마음먹었다. 평소 같으면 아내에게 사달라고 할 텐데 급한 마음에 내가 직접 나섰다.
‘탁상시계’로 검색했다. 수도 없이 많은 시계 사진과 정보가 뜬다. 편리한 건지, 놀라운 건지 알기 어렵다. 3만원대 쯤을 생각했는데, 그보다 싼 시계도 많다. 오래 사용할 물건이라 가격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도 3만원대는 비싸다고 느껴진다. 여기서 배턴을 아내에게 넘겼다. 그리고 가격을 1만원대 중반으로 낮췄다. 그래도 차고 넘친단다. 사는 김에 주방용 시계 하나, 욕실용 시계 하나 합해서 두 개를 사기로 했다.
한동안 검색하던 아내가 투플러스원이 있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2+1이라니. 무슨 식료품도 아니고. 알고보니 똑같은 개념이었다. 시계 2개를 사면 그 가격에 세 개를 준다는 것이다. 우스웠다. 하지만 두 개만 사기로 했다. 왜? 두 개만 필요하니까. 이렇게 철저한 나를 놓고 아내는 시계에 집착한다고 했다.
주문과 결제를 하고 나면 기다려야 한다. 조급증이 다시 시작됐다. 언제 배달해 준대? 며칠 걸린단다. 배송비가 없더니 그래서 오래 걸리나? 별 상관관계가 없을 듯한 일로 조급증을 표현하다가 할 수 없이 기다리기로 했다.
그날 오후 운동 끝에 다이소에 들렀다. 운동용 얇은 장갑을 사기 위해서다. 봐 둔 게 있어서 하나를 골랐다. 들른 김에, 다 있다는 다이소에 시계가 없을 리 없어 찾아보았다. 있다. 완전히 구석진 곳에 몰아놓았다. 많이 팔리는 품목이 아니란 뜻이다.
그런데 가격을 보고 깜짝 놀랐다. 탁상시계는 1만원씩이나 주고 사는 물건이 아니었다. 2천원 아니면 3천원을 주고 사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비싸지 않으리라는 건 짐작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오전에 인터넷으로 주문한 시계와의 가격 차이가 1만원을 훌쩍 넘는다는 사실에 나의 낭패감은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이런 때 ‘오래 쓸 물건은 비싸더라도 좋은 것으로!’라는 나의 지론은 ‘약’ 떨어진 시계 같은 소리였다.
옆에 있는 아내도 놀라기는 마찬가지. 아내에게 인터넷 주문을 취소할 수는 없느냐고 물었다. 한번 해보겠단다. 매장 한쪽 구석에서 핸드폰을 급히 두드리는 여성과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남성 ‘라떼’. 구석이라 주목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눈을 끌 만한 모습이다. 취소했단다. 방금 전의 낭패감 뒤에 찾아온 이 안도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본격적으로 시계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물건을 볼 수가 없다. 포장 종이상자를 테이프로 다 붙여놓았다.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배터리를 쓰는지만 확인한 후 두 개를 골랐다. 두 개를 고르자니 사이가 좋아졌다. 나 하나, 아내 하나. 하나에 3천원씩 합이 6천원. 장갑까지 포함해도 8천원이다. 이때 드는 만족감. 소시민의 기쁨인가.
시계는 언제쯤 세상에 생겨났을까. 전에는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는 답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찾지 않는다. 귀찮아서라기보다 의미 때문이다. 11세기에 나왔으면 어떻고 13세기에 나왔으면 어떤가. 쓰고 보니, 정말 라떼의 삶이다. 발명국가는 어디일까. 이것 역시 마찬가지다. 스위스면 어떻고 영국이면 어떤가. 중국? 중국은 아닌 것 같다. 유럽의 어느 나라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시계는 지금처럼 개인이 소유하는 물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도시 복판 광장에 크게, 아주 크게 걸어놓는 물건이었다. 서울 명동성당 중간 벽에도 둥그런 시계가 있다. 내 어린 시절에는 그 시계가 멈춰있는 일이 많았는데, 요즘은 잘 간다. 세월이 지나면 고장이 나야 하는데 이건 그 반대다. 그걸 보면 시계는 고도의 정밀성을 요하는 기계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가격도 한번 보라. 고도의 정밀성을 요하는 시계가 2천원에 하나, 3천원에 하나, 거기에 2+1일리는 없지 않은가.
외국에 나가보니 시계의 공공성을 더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성당에는 거의 빠짐없이 커다란 시계가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당이나 교회도 그렇지만 오래된 공공기관 건물의 탑에도 시계가 있었다. 한때는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이 주였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건물의 장식적인 기능이 주가 아닌가 생각되는 시계.
그런 시계 중에 기억에 확실히 남는 시계가 있다. 그곳에 가본 사람들은 누구나 비슷한 기억을 할 듯하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시계다. 프라하 구 시청사 건물 외벽에 있는 천문시계에서는 정시가 되면 여러 가지 상황이 펼쳐진다. 닭이 울던가(20년 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면, 인형들이 돌아가며 등장한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의 열 두 제자와 함께 해골 인형이 등장한다. 이 생뚱맞은 등장은 도대체 무얼까. 알아보았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들에게 “당신들은 유한한 존재다”라는 것을 일깨우려는 의도라고 한다. 정말로 그렇게 깊은 뜻이? 15세기에 만들어진 시계가 그런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이걸 한 줄로 정리하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 되시겠다. 아무리 잘났다고 해봐야 인간은 시간이 되면 소멸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까불지들 말고 겸손하게 살아라... 15세기보다 과학이 훨씬 더 발전한 요즘 세상에 오히려 더 필요한 교훈이 아닌가 싶다.
그나저나 3천원짜리 시계 두 개는 모두 잘 간다. 주방에서, 또 욕실에서. 재깍재깍(*). 재깍재깍.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욕실에 놓아둔 시계에서는 시계 가는 소리가 상당히 크게 난다. 그래서 어떤 시계 포장상자에는 ‘저소음시계’라고 써놓기도 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