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년 여생을 보낸 외할머니 추모글

1923.1.3. ~ 2025. 10. 29.

by TWOG

1923.1.3. ~ 2025. 10. 29. (103세) 외할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나에게 외할머니는 야생화 같은 분이셨다. 어떤 산들에서도 견고하고 고아하게 꽃 피우고 향기를 낼 수 있는 존재 같았다. 할머니가 살아온 시절들이 그러하였고 내가 봐온 모습 또한 그러했다.


내가 10대이고 할머니가 80대이던 시절까지 할머니는 가족의 생일이 되면 꽃다발을 사들고 우리 집에 방문 하셨다. 가깝지 않은 거리인데도 항상 오셔서 현관문을 열면 꽃다발을 들고 곱게 웃으셨다. 아마 내가 처음으로 받은 꽃 선물도 외할머니가 주신 걸거다.


거동이 불편해지시고 난 후에도 할머니는 우리 가족의 생일에 엄마 계좌로 맛있는 거 먹으라 꼬박 용돈을 주시고 전화를 주셨다. 수십년째 그 사랑은 변치않고 한결같아 든든한 거목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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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7월 16일, KBS 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에 출연하신 할머니. 그리고 그때 출연을 위하여 남기신 가족에 대한 기억 기록

또한 한결같이 항상 감사해 하셨다. 우리를 봐서 감사하고 우리가 잘 자라서 감사하고 밥을 꼭 잘 먹어서 감사하다고 했다. 103년 동안 일제강점기를, 해방을, 전쟁을, 피난 중 가족과의 헤어짐을, 당신보다 이른 자식의 죽음을 겪어 오시면서도 범사에 감사하시고자 했다.


할머니는 감사를 포함한 모든 것에 기도하셨다. 한국 기독교 1세대에 가까운 역사를 갖고 계신만큼 버릇처럼 기도하셨다. 할머니의 짐을 정리하던 중 발견한 빼곡한 메모에 남은 기도, 성경구절이나 찬송가 가사가 여러번 되내이셨을 그 기도의 마음을 전해준다.


나를 위해 남겨놓으신 짧막한 기도 메모 또한 발견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기도로 살아간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지금 내 삶을 지탱하는 기도의 큰 지분은 할머니께서 갖고 계실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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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미국에 갈때, 2022년 볼리비아로 갈때, 2025년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할머니가 남기신 나에 대한 메모. 세월이 지나면서 할머니의 글씨도 변해가는 것이 보인다.

특히 내가 공부와, 업을 위해 해외로 떠날때마다 지혜와 총명과 건강을 달라고 적어놓으셨다. 장담컨대 내게 지혜와 총명과 건강이 좀 더 있다면 이미 할머니께서 충분히 물려주신 덕분이라 생각한다.


외할머니가 남겨놓으신 기록들의 내용과 양과 보관상태에 많이 놀랐다. 땅에 묻고 피난을 다녀와 다시 구해내셨다는 80년도 더 된 사진들, 단기(檀紀)로 쓰여진 각종 서류, 이산가족을 찾기 위해 적어내린 어린 시절 기억들, 몇번이고 되내이셨을 가족들의 전화번호, 생일 챙기고자 옮겨놓은 계좌번호. 기록에 묻은 역사와 굳건한 마음이 느껴졌다.


할머니는 최근까지도 기록을 남겼을 정도로 끝까지 건강하셨다. 꽤 늦게까지도 살림을 손수 하셨고 봄철이면 산을 다니며 쑥을 캐셨고(할머니가 주신 향이 진한 쑥도 좋아했다) 미용실에도 직접 방문하셔서 예쁘게 단장하셨었다. 한국에 돌아와 오랜만에 맞잡은 손의 악력도 여전히 70살 더 어린 나보다 더 강했다. 단단한 힘의 근원은 할머니의 강인한 정신에서 비롯됐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아무리 피곤하다 힘들다 해봤자 감히 비교할수도 없는 시절을 다 이겨내신 내공에서 오는 힘이었다.


하늘도 청명하고 낙엽도 다채로운 가을날. 할머니는 수십년전부터 준비하시고 각오하셨던 세상에서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셨다. 이젠 불법이라 구할수도 없다는 100% 마로 만든 수의를 손수 맞춰놓으시더니 끝내 그 옷을 곱게 입으셨다.


할머니를 닮은 계절에 맞이하신 마지막이 아름다웠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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