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퍼의 편지

기묘한 이야기

by TWOG

그러니까 지난 기말고사가 끝나고 한창 넷플릭스의 밀린 것들을 보기 시작했을 때, 마침내 마무리를 지은 시리즈 중 하나가 바로 기묘한 이야기였다. 한창 코로나였을 때로 추정되는 때 한창 보다가 지쳐서 하차하고 차마 다시 시작하기 어려워서 그냥 방치하고 있었던 드라마인데, 결국 마지막 시즌이 나왔다고 해서 재도전 해보았다. 기말고사가 끝난 대학원생은 뭔가 엄청난 보상심리를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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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이야기 드라마 자체는 완전 내 취향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그 감수성이라던가 배경이라던가 에피소드가 흘러가는 패턴이라던가 좀처럼 내가 막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끝을 보려고 시작한 드라마 계속 보기도 했고, 넷플릭스는 언제든 필요하다면 막 뛰어넘을 수 있었기 때문에 부담 갖지 않고 내맘대로 조작하며 편하게 보았다.


어쨌든 그렇게 시즌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좀 감동 받은 포인트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호퍼의 편지였다. 호퍼가 한창 사춘기 시절 일레븐과 갈등을 겪던 중 남긴 이 편지는 평소 거칠고 무뚝뚝하던 호퍼만의 그 표현 방식과 감정이 담겨 있어서 더 감동적인데, 사실 그 내용도 내게는 꽤 와닿는 부분이 있었다. 호퍼는 일레븐을 양녀로 들이고 지내다가 일레븐이 남자친구와 더 많은 시간이 비밀스럽게 보내기 시작하며 거기서 생기는 거리감, 고독, 소외 같은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커가는 딸과 그 변화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마음을 얘기한다.


"하지만 너도 커가고 변화한다는 걸 알아. 근데, 내 생각엔 정말 솔직히 말해서 그게 바로 내가 무서워하는 건가봐. 난 변하는 것들이 싫어. 그래서 내가 자꾸 끼어들고 변하려는 것을 멈추게 하려는 것 같아. 시계를 다시 돌리듯이, 과거 그러했던 대로 되돌리기 위하여... 하지만 이건 멍청한 짓이지. 삶이라는 게 그렇게 돌아가진 않으니까. 삶은 항상 내가 원하든 원치않든 움직이고, 가끔 그 변화는 고통스럽기까지 하고 심지어 슬프기도 하지. 그리고 가끔은, 놀랍게도, 행복해.


그거 아니? 계속 자라거라. 내가 널 멈추게 하지 말거라. 실수를 하고 그것들로부터 배우거라. 삶이 너를 다치게 할때 (왜냐면 분명 그럴테니까), 그 상처는 좋은거란다. 그건 너가 동굴 밖으로 나왔다는 뜻이거든. (후략)" (1985년 6월 29일, 호퍼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편지 중)


이 편지는 묘하게 다양한 것을 떠올리게 했다.


하나는, 중학교 3학년일 때 미국에 홀로 유학을 떠나 받았던 아빠의 이메일을 생각나게 했고,

다른 하나는, 그냥 미래의 내가 나에게 해주고 싶을 이야기들이 그려지게 했고,

마지막으로, 오히려 내가 부모님을 보며 드는 생각들을 모이게 했다.


나는 18년 전,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통해 일찍 유학길에 올랐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도 부모님도 겁도 없이 취했던 선택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최악이었고, 사춘기 여학생의 감수성도 한창 아마 예민했을 시절을 낯선 땅에서 버티듯 보냈던 시절이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많이 단련이 된 시간이었다고 자평하기도 하고, 그 뒤의 어떤 일도 아직 그때만 비하다고 여긴적이 없을 정도로 정신적 버티기에 몰입했던 때기도 하다. 그런 때에 부모님께로부터 받는 편지는 꽤 촉촉하게 느껴진다. 특히 당시 아빠가 아버지 학교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유서를 써보는 시간을 가지셨을 때 썼던 편지라서 유독 기억에 남는다. 어두운 밤 가끔 거실에서 쓰던 컴퓨터로 그나마 한국과의 끈을 간신히 붙잡던 때 컴퓨터 장의 문으로 내몸을 숨기듯 가려놓고 펑펑 눈물을 쏟았었다. 그 메일은 행방불명이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빠가 할아버지를 생각했을 때 느껴지는 것들 아내인 엄마와 자녀인 우리들을 돌이켜 보았을 때 드는 감정들을 굉장히 솔직하게 적어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그 내용이, 너무 나를 벅차게 만들어서, 그 땅에서 왠지 초라하게 느껴지던 나의 존재라 갑자기 귀하게 다가와서 눈물이 차올랐었다.


지금의 내가 저 시절에 있는 과거의 내게, 그리고 아마 또 다시 지금보다 미래에 있을 내가 지금의 나에게 해줄 얘기는 결국 마지막 한마디일 것 같다. 너는, 동굴 밖에서 열심히 삶을 탐험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아플거고 상처입겠지만 그게 결국 좋게 흐를 거라는 말. 실제로 18년전 미국에서 지냈던 나는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그 경험이 나의 특성, 내 장점, 내 강점, 내 가치관 등등 수많은 나의 모습에 영향을 미쳤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보내고 있는 이 시간들과 그 시간안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이 결국 또 미래의 나를 만들 것이라는 거. 그니까 그냥 이 파도를 타는 서퍼처럼 오히려 그 너울을 기대해보고 잘 넘어보고 혹시나 빠져도 웃으며 나와보자고.


호퍼에 일레븐에게 해줬듯 부모님이 내게 해준 말을 결국 언제가 내가 부모님께 그대로 돌려드릴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한해가 흐르고, 연령대가 바뀌고, 주변 환경이 지나가다 보면 그런걸 느낀다. 왠지 엄마 아빠가 나와 놀아줄 때 했던 여러가지 모션이나 말들을 내가 되돌려주고 있을 때, 내가 듣던 잔소리가 다시 엄마 아빠에게 향하고 있을 때, 사춘기 소녀가 겪던 너울들이 갱년이 중년들에게 나타날 때, 마치 윤회와 같은 삶을 생에서도 느끼며 이 메시지는 결국 내가 듣고 있지만 말하게 될거라고, 그래서 뱉어진 말들이 결국 내게로 올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호퍼의 편지는 극에서 어떤 의도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내게 여운을 남기며 해당 시즌의 마침표를 찍었었다.




ps. 기묘한 이야기는 나름 킬링타임용으로 빠르게 몰입하고 끝내기 좋은 편이다. 드라마보다는 확실히 음향이나 어두운 환경을 잘 조성해놓고 보면 좀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래픽이나 배경이 중요해서...), 사실 난 출퇴근하면서 지하철에서 주로 본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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