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가 어디 붙어있는 나라야?

나의 NZ 일기 1

by 씬디북클럽

(저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의 이름은

가명을 사용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소영아, 뉴질랜드 한 번 와 볼래"

"뉴질랜드요? 그게 어디 있는 나라인데요?"




아이엠 그라운드

네 글자로 시작되는

나라 이름 대기!



88 서울 올림픽 추석 때 덕수궁에서 만난 외국인 커플은, 한복을 입은 10살의 내게 사진을 함께 찍자고 권했었다. 외국인과의 첫 기억이었다. 키가 크고 머리가 노랗고 눈이 파랗던 그들의 모습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사진 속 그들이 들고 있던 국기를 보고 그들의 나라와 위치를 찾았다. 북유럽의 (이름도 어려운)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나라'노르웨이'였다.


네로와 아로하가 커다란 개 파트라슈와 함께 뛰어놀던 튤립 가득한 풍차의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어린이 소설을 읽고 눈물을 흘린 첫 기억이었다. 나막신 모양 신발도 이상했고 여자애들이 앞치마를 한 모습도 신기했다. 해수면 높이가 육지보다 높아 바닷가 댐의 구멍을 손으로 막아낸 믿을 수 없는 소년 이야기도 같은 나라였다.


뉴질랜드. 아줌마가 얘기를 꺼내기까지 내게는 생소한 네 글자 나라 이름이었다. 유럽에 있나? 아메리카 대륙 어디인가? 비행기를 12시간이나 타야 한다고? 사립대학 등록금 수천 만원을 쏟아부은 중국어 전공 4학년 대학생은 중국 이외의 지리에 한없이 무지했다.






고3 때 만난 첫 남자친구는 홍콩 배우 원영의의 찐 팬이었다. 샘나는 마음을 자제시키려 나도 좋아하는 홍콩 배우를 찾았고, 중학교 때 감명 깊게 본 영화 '패왕별희'를 떠올렸다. 그리하여 내가 좋아하는 홍콩 배우는 장국영이 되었다. 우리가 처음 함께 본 영화는 두 배우가 나오는 '금옥만당'이었다. 첫 남자친구와는 곧 헤어졌지만 나는 장국영의 찐팬이 되었다. 장국영은 좋았지만 홍콩도 중국도 대만도 내게는 전혀 관심사가 아니었다.




"인서울 영교과나 지방 교대는 간당간당하겠다. 이 대학교 중문과 어때? 문과 중에 가장 점수 높고 중국은 대륙이라 전망이 좋을 거야."


고3 담임은 자기의 모교를 모교가 아닌 척 내게 추천했다. 우리가 자기의 모교를 모를 줄 아는 걸까. 인천의 하버드라는 별명을 다들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러면서 왜 내 모교이니 후배가 되라고 자랑스레 말하지 않는 걸까.


자립형 사립 고등학교 S 고교는 인천시에서 서울대 많이 보내는 학교로 유명했다. 중3까지의 난다 긴다 하는 인천의 아이들이 죄다 모였다. 누구는 계속해서 날고 기었지만, 누구는 땅을 파고 끝없이 들어가야 했다. 그 학교의 나는 날고 기지 못했고, 고3의 나는 수능을 망쳤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면 망치지 않았다. 모의고사 때보다 훨씬 점수가 좋았다. 하지만, 나 말고 전국의 모든 수험생들 점수도 모의고사 때보다 훨씬 좋았다는 게 문제였다.


인천에서 나고 자라 유초중고를 나온 나는, 대학만큼은 서울로 가고 싶었다. 왕복 3시간이 걸리든 4시간이 걸리든 1호선을 타고 저 끝까지든 서울 소재 대학에 가고 싶었다. 하숙이든 자취든 혼자 사는 경험도 해 보고 싶었다. 중1 때부터 가져온 '영어 선생님' 꿈을 이루고 싶었다. 하지만 남들 다 잘 본 수능을, 남들보다 훨씬 더 잘 보지 못 한 나였다. 재수는 욕심도 자신도 없었다. 내신까지 더해 승부하는 일반전형에는 더욱 가망이 없는 11월 말의 고3 수험생에게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중문과'가 아니었다. '중국어 중국학과'였다. 중국어뿐만 아니라 문학 역사 경제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두루 배웠다. 빵모자를 삐딱하게 쓴 노교수의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칠판에 쓴 글씨를 손걸레로 박박 지우며 100번 200번 수 차례 읽고 쓰고 외우고 또 외웠다. 같은 한자권이니 배우기 쉬울 거라 하는 말은 맞기도 틀리기도 했다. 나의 중국어 발음은 나쁘지 않았다. 중국에 관한 다른 부분 공부도 싫진 않았다. 공자 맹자 노자 장자 중국 사상을 이해하려 했다. 중국 공산당 모택동 등소평 강택민등 중국 정치도 배웠다. 시험 기간이면 나의 필기노트 복사본을 도서관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었다. 필기노트 원본자로서의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 열심히 공부했다.


축제때면 잔디를 뜯어 파전을 만들어 팔던 시절이었다. 낮에는 등록금 인하 단결 투쟁을 외치던 중앙 광장에서, 밤이면 술을 마시며 택시 할증이 풀리길 기다리던 시절이었다. 교내 식당의 500원짜리 라면을 먹으러 줄을 섰고, 안주 가성비가 유명한 학교 후문가에는 안 가본 술집과 노래방이 없던 시절이었다. 한 번 빠지면 피부병이 생긴다는 소문이 있던 교내 연못에 생일자를 빠뜨리던 시절이었다. 그 모든 시절을 즐겼다. 그 와중에 장학금도 탔다. 원어노래 학회 활동도 열심히 했다. 같은 과 네 학번 위의 복학생과 CC 활동은 더 열심히 했다.


선배나 동기들은 거의 모두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갔다. 짧게는 1년 길게는 몇 년씩 당연한 코스처럼 정말 거의 모두였다. 북경 상해 대만 등 지역을 가리지 않았다. 중국을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중국과 관련 없는 취업을 계획했거나 아무 계획이 없는 사람들뿐이었다. 2학년 마치고 가느냐 3학년 마치고 가느냐만 결정 사항이었다. 나도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도 미루고 미루던 4학년 1학기였다.




아줌마가 자매를 데리고 뉴질랜드에 간 지 1년이 되지 않았다. 공무원인 남편은 한국에서 계속 직장을 다니고, 전직 간호사 출신 아내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비행기를 탔다. '기러기 아빠'라는 단어가 막 생겨나던 시절이었다.


이여사는 제나 유나 자매의 육아돌보미였다. 출생 한 달부터 아이들을 돌보았다. 아이들은 나의 엄마를 '엄마'라고 불렀지만 전혀 샘나지 않았다. 남동생만 있던 내게 제나 유나는 나의 여동생들이었다. 우리가 이사 가면 제나 유나네도 같은 아파트로 같은 동으로 이사를 왔다. 우리 넷은 오랜 기간 동안 함께 먹고 놀고 자랐다.



중국 어학연수를 미루고 있었다. 초중생 과외로 내 용돈을 벌고 있었다. 남자 친구와도 싸웠다 화해했다 하며 잘 지내고 있었다. 제나 유나 엄마의 제안은 절묘한 타이밍에 이루어졌다. 치아 교정을 하는 친구를 따라 상담을 받고 온 즈음이었다. 수년에 걸친 덧니 트라우마를 벗어날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 비용이면 중국 어학 연수를 더 미루거나 포기해야 하나 하고 있었다. 남자 친구가 한번씩 장난처럼 부르던 '이빨 괴물'이란 말도 듣기 싫었다. 안부 전화 끝에 제나 유나 엄마는 나의 이런 고민들에 이렇게 이야기했다.

"교정 안 해도 예쁘기만 한데 뭘! 교정은 나중에라도 돈 벌어 할 수 있고. 여기 한 번 와 보면 어때. 눈도 넓히고 영어 공부도 하고. 아줌마 집에서 싼 값으로 지낼 수 있게 해 줄게, 잘 생각해 봐, "


나의 귀가 팔랑거리기도 전에 이여사의 귀가 세차게 흔들렸다. 아빠가 뇌종양으로 돌아가신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었다. 다행히 수술비며 병원비는 보험으로 다 해결이 되었고, 살고 있던 33평 아파트의 융자금도 마쳐서 빚이 없는 찰나의 시기였다. IMF를 통과하면서도 학자금 대출 한 번 받지 않은 찬란한 시기였다. 아빠의 용달차 운전 새벽 깡시장 20여 년과 이여사의 알뜰살뜰 생활력과 부동산 재테크의 절정에 이른 가정경제 꽃이 피던 시기였다. 그 꽃을 함께 누려 마땅한 단 한 사람만이 사라진 시기였다.


"네 아빠 있었으면 안 보내줬을 거야. 네 아빠 너 혼자 살게 안 하려고 지방으로 대학 보내는 거 반대했었어. 네 아빠 있었으면 허락 안 했을 거야."


출국을 준비하며 이여사는 여러 차례 같은 말을 재생반복했다. 아빠가 있었으면 갈 수 있었을까 못 갔을까. 아빠가 있었으면 나는 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을까. 아빠가 있었으면 중국이든 뉴질랜드든 아무데도 못 가고 한국에서만 있었을까. 머릿속으로는 온통 '아빠가 있었으면'이 가득 찼다.


수하물용 기내용 트렁크 두 개를 세트로 샀다. 옷가지 생활용품 등 이것저것 챙겨 넣었다. 제나 유나 엄마가 부탁한 짐도 꾸려 넣었다. 제나 유나 엄마의 남동생 가족도 사업 구상 차 함께 하기로 했다. 제나 유나 아빠의 형님의 딸도 같이 살기로 해 함께 하기로 했다. 제가 유나 엄마의 현지 교회 목사님의 조카딸도 뉴질랜드에 들어오기로 해서 함께 하기로 했다. 성인 3 유아 2 영아 1 총 6명이 함께 하는 비행이었다. 나 혼자서 12시간 비행기를 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 혼자서 12시간 동안 오롯이 혼자 있지 못해 아쉬웠다.




인천 공항의 비행기가 떠올랐다.

대한항공 직항이었다.


Flight to Auckland, NZ

Departing time.


출발.



(사진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