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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m Lee May 05. 2018

나와 당신의 이야기

오늘 메일을 열다 온통 영어로 가득한 내 메일함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한글로 가득했던 메일함이었는데 이제 내가 받는 대부분의 이메일은 그것이 사적인 것이든 공적인 것이든 하다못해 스팸까지 영어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나는 아직도 한국어로 대화하고 쓰고 읽는 활동을 많이 하고 있다. 그런데도 내가 사는 곳이 바뀌자 어떤 영역에서는 내 언어의 비중이 현저히 줄어든 사실이 놀랍다.


김영하 작가의 <오직 두 사람>에는 소수민족의 언어를 사용하는 최후의 2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언어를 아는 오직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생기거나 둘 중 하나가 죽으면 그 언어도 함께 죽는다. 누군가에게 그 불화에 대해 하소연을 할 수도 상대방의 죽음에 대해서 슬픔을 표현할 수도 없는 절대 고독의 상태가 오는 것이다.

언어는 결국 누군가와 이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누군가와 대화하기 위해 언어를 배웠고 그 언어로 말한다. 나는 누군가의 생각이나 이야기가 궁금하고 알고 싶어 책을 읽거나 기사를 본다. 누군가에게 내 의사나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말하고 쓴다.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나 혼자만 존재한다 상상해보면 언어는 굳이 필요 없지 않은가.  


미국에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모국어보다 영어의 사용빈도가 더 늘어나고 있다. 나는 이제 내 언어를 쓰는 사람보다 영어를 쓰는 사람과 더 많이 교류하고 이어져야 하는 환경에 산다. 세계 공통어인 영어를 쓰면 분명 많은 사람과 이어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가장 많은 다수의 사람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언어이기 때문에 영어는 힘이 있다.


이제 본격적인 AI시대가 온다고 한다. 미국을 포함한 몇 개의 선진국이 주도하는 AI시대가 되면 그들이 입력한 언어만 인지하는 인공지능과 이어지기 위해 우리는 또 그들 편의에 맞는 몇 개의 언어만을 쓰고 습관화할 것이다. 우리가 글로벌 시대에 맞춰 어렸을 때부터 영어를 죽어라 배웠던 것처럼 말이다. 내 주위에는 이미 구글의 구글 어시스턴트와 아마존에서 출시한 알렉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이 인공지능에게 모르는 것을 묻고 각종 심부름을 시킨다. 사람에게 묻고 부탁하던 일을 우리는 인공지능에게 명령하여 실행한다. 이 추세대로라면 어떤 소수민족의 언어는 지금보다 더 빨리 사라질지 모른다. 결국은 힘 있는 사람들의 힘 있는 언어만 살아남지 않을까.


이 곳에서 터를 잡고 자식을 낳고 살다 보면 주위의 2세들처럼 내 아이가 한국말 하나 하지 못하는 아이로 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면 나는 내 언어로만 전달될 수 있는 이야기와 정서를 내 자식에게 전달할 수 없을지 모른다. 심지어 내 이름인 순 한글, '보람'이라는 단어는 영어에는 없는 단어이다. 우리의 언어가 달라 내 이름조차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수 있다니 덜컥 겁이 난다. 엄마인 내가 내 이름을 포함하여 모국어에 담았던 모든 것들이 내 존재의 소멸과 함께 사라질 수 있으니 말이다.


내 언어를 잃는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너무 고독한 일처럼 느껴진다. 내 언어를 통한 내 생각과 말과 글이 가 닿을 사람들을 찾지 못하고 길을 잃는다면 나는 얼마나 외로워질까.


영어 하나 배우자고 이 나라에 사는 것도 아닌데 내 언어로 생각하고 읽고 말하고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사랑의 이야기 담뿍 담은 편지'라고 했던가. 내일은 그리운 이에게 한국어로 메일 하나 써 보낼 참이다.


나는 아직도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당신께 말을 걸고 당신의 이야기를 읽고 함께 써내려 가고픈 이야기가 아직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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