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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둥새 Nov 10. 2019

이 마틴이 그 마틴이 아녀?

비슷한 듯 다른, 종교계의 마틴 두명

독일 생활을 시작한 지 겨우 100일 남짓 지난 시점인 2017년 10월.


새로운 문물에 적응하느라 하루하루 긴장하며 살고 있던 나를 갸륵하게 여겨서였을까, 10월 31일이 되자 빨간 날도 아닌데 하루 쉬란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특별하게 제정된 임시 공휴일이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 조 반박문'을 내걸며 종교개혁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 


루터는 반박문을 통해 교황 중심의 정치, 교회의 면죄부 판매 등 가톨릭의 부패와 부조리를 비판했고, 교황 및 신성로마제국 황제로부터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지만 거부한 죄로 파문까지 당한다. 


The Posting of Luther’s 95 Theses by Julius Hübner, 1878


당시 파문은 사형 선고나 같은 것. 루터는 오랜 기간 은둔 생활을 하며 독일어 성경 번역에 몰두한다. 이때 탄생한 독일어 성경은 신학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이 전까지 라틴어나 히브리어로만 쓰여 있었던 성경은 귀족이나 성직자 등 소수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대중을 혹세무민 하는데 악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때마침 등장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함께 루터의 독일어 성경은 빠르게 보급됐고, 이후 누구나 쉽게 성경을 접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됐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은 현대 독일어의 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히브리어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문자 하나하나에 구속되지 않고 실제 동시대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를 사용해 번역하는데 힘썼다. 이를 위해 매일 동네 골목이나 시장통에 나가 일반인들이 실제 어떤 말들을 쓰고 있는지 가만히 듣고 오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Martin Luther Translating The Bible, Wartburg Castle, 1521 By Eugene Siberdt Wall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의 바람은 독일 내는 물론, 이웃나라인 스위스, 프랑스, 영국(조금은 다른 이유였지만), 북유럽 등으로까지 번진다. 성경에 대한 각자의 해석을 바탕으로 수많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개신교) 파가 생기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기 전까지 유럽 일대는 기사 전쟁, 위그노 전쟁, 30년 전쟁 등 종교를 둘러싼 피와 혼돈의 역사를 갖게 된다. 




학교 다닐 적 역사시간에 '종교개혁'이니, '마틴 루터'니 한 번씩 들어본 기억은 나는데, 개인적으로 종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역사에 깊은 조예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500주년 기념일을 별 감흥 없이 지나간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며칠 후, 둘째가 유치원에서 또 '마틴' 기념 이벤트를 한다며 참가 안내문을 받아온 게 아닌가?


오호라, 독일에서는 마틴이 정말 중요하긴 한 사람인가 보네, 이번에는 뭘 축하하는 거지? 탄생일인가?


그런데 안내문에 있는 마틴 사진이 내가 알던 마틴과는 좀 다르게 생겼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누구냐, 넌


이번에 기념한다는 인물은 '성 마틴(Sankt Martin 또는 Saint Martin)'. 이 마틴은 그 마틴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생김새도, 활동 시기도, 업적도, 심지어 국적도 다르다.


성 마틴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활동했던 가톨릭 성인이다. 316년 지금의 헝가리 지역에서 태어나 투르즈(Tours, 현 프랑스)의 주교를 지냈다. 


마틴의 부친은 로마제국의 고위 장교였고, 마틴도 자연스럽게 군인으로 자란다('마틴'이라는 이름도 '마르스(Mars)', 즉 전쟁의 신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러나 마틴은 군 생활 내내 자신의 기독교적인 믿음과 직업 사이에서 딜레마를 겪고, 전투에서 싸우길 거부하기도 한다(때문에 최초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라고도 일컬어진다). 


결국 마틴은 나이 마흔에 25년간의 군인 생활을 청산하고 수도자(hermit)로서 경건한 신앙의 삶을 이어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던 추종자들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자신을 주교로 추대하려는 사람들을 피해 마틴은 한동안 거위 우리에 숨어 지냈지만 결국 들키게 되고, 억지로(?) 주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후 30년 동안 마틴은 교구 체제 마련, 사목구 개편 및 지역 주민들의 보호 등 수많은 업적과 명망을 쌓으며 충실히 성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397년, 81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곁으로 떠난다. 




마틴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는 군인 시절, 헐벗은 걸인을 만나 행했던 선행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군장 차림으로 말을 타고 가던 마틴은 마을 어귀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걸인을 발견한다. 마틴은 곧장 칼을 빼서 자신이 입은 망토를 반으로 잘라 걸인에게 나누어준다. 

그 날 꿈에 나타난 걸인은 마틴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그 걸인은 예수님이었다. 


마틴과 걸인




성 마틴의 날(Martintag 또는 St. Martin's Day)은 마틴이 선종(善終)한 11월 11일이다. 


당일 또는 인접한 주말 저녁, 땅거미가 진 동네 광장에서는 랜턴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성 마틴과 걸인의 일화를 담은 연극이 끝나면(규모에 따라 진짜 말이 등장하기도 하고 모닥불을 피워놓기도 한다), 어린이들은 랜턴에 불을 밝히고 대여섯 개의 '마틴 노래'를 반복해 부르며 행진한다. 


이 랜턴 퍼레이드는 당시 성 마틴의 선행을 목격한 아이들이 랜턴을 들고 마을로 달려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했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랜턴은 유치원이나 집에서 직접 만들어온다. 즐거운 연례행사!

 사진출처 : Süddeutsche Zeitung 


둘째가 다니던 유치원에서는 인근에 위치한 노인 요양원에서 랜턴 퍼레이드를 진행하곤 했다.


알츠하이머 등 노인성 질환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이 생활하는 곳인데,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지나갈 때면 표정 없던 얼굴이 환해지며 미소를 보인다. 아이들을 붙잡고 수줍게 사탕을 하나씩 손에 쥐어주기도 하신다. 


행진이 종료되면 한 곳에 모여 따뜻한 과일차와 코코아를 마신다. 성인을 상징하는 사람 모양의 빵(Weckmann)을 나누어 먹는 건 필수다(Weckmann은 지역에 따라 Stutenkerl, Hefekeri, Stutenmann, Männele 이라고도 불린다). 


소박하지만 따뜻한 이벤트다.




성 마틴 날의 전통 음식으로는 '거위 구이'도 있다. 


마틴 거위(Martinsgans) / Pixabay


거위를 먹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썰'이 있다. 


마틴이 자신을 주교로 추대하려는 추종자들을 피해 거위 우리에 숨었을 때, 그곳에 살던 거위가 밖으로 뛰쳐나와 마틴의 행방을 고자질한 죄로 먹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마틴 주교가 설교를 하고 있는데 거위가 난입해 기도를 방해했기 때문에 응징하는 차원에서 잡아먹었다고도 한다. 봉건주의였던 당시, 거위와 같은 현물로도 세금을 대신했는데 매월 11일이 마감일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거위는 희소성 때문인지 꽤 비싼 편이다. 그러나 특별하게 기억될 만한 맛은 아니다. 식당에서 파는 거위 구이 한 마리가 약 100~150유로 정도 하는데, 두 가족 정도가 함께 와서 먹으면 딱 적당한 양이다. 




종교개혁 바람을 일으켰던 독일의 현재 개신교인 비율은 29.8%이다. 가톨릭은 29.9%로 비슷한 수준이고, 1.3%는 그리스 정교회다. 이슬람은 6.1%로 단일 종교 중 두 번째로 많은 신도를 자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건 무교(34%)다(Pew Research Survey, 2017).


개신교가 다수인 지역에서는 같은 날 성 마틴 대신에 마틴 루터를 기리기도 한다. 마틴 루터의 생일이 1483년 11월 10일이고, 세례를 받은 날짜가 이튿날인 11월 11일이기 때문이다. 




마틴 두 명. 

한 사람은 개신교의, 다른 한 사람은 가톨릭의 대표 인물이다.


성 마틴 같은 종교인만 있었다면 마틴 루터는 세상에 나올 일이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참고 글>

[종교개혁 500주년]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전문 / 기독일보

종교개혁 통해 정립된 5대 강령 / 복음기도신문

종교 개혁 / 위키백과

마르틴 루터 / 위키백과

개신교의 역사 / 여주시사

[종교개혁 500주년] 교회는 분열했으나 가톨릭 쇄신에 전환점 마련 / 가톨릭평화신문

종교개혁 500주년의 의미 / Redian

세상을 뒤흔든 성경 번역 / Christianity Today

생명을 살리는 칼 – 성 마틴 축일 / via media

St. Martin Songs / Mama Lisa's World

Warum feiern wir Sankt Martin? / ND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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