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멘탈의 개복치 탈출기 3-3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부모와의 갈등에 고통받는 모든 이들에게 그런 치유의 순간이 찾아오면 얼마나 좋을까.
심한 우울증과 무기력증으로 8개월간 일을 쉬다가 모아둔 돈이 똑 떨어져서 일자리를 구하고 있을 때였다. 엄마가 잠시 집에 들러도 되냐고 해서 오라고 했다. 그런데 그날 그녀가 내게 해준 말이 일평생 쌓여왔던 분노와 미움을 눈 녹듯 녹여주었다.
“니가 좀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는 회사가 나타나면 좋을 텐데”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편했으면” 한다고…? 이해가 안 갈 수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해줄 법한, 지극히 평범한 말이 아닌가 싶을 수 있다. 그런데 나의 엄마는 소위 말하는 ‘호랑이 엄마’였다. 그녀는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성적, 진로 외에는 별다른 얘기도 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서처럼 의대 가라고 보채는 헬리콥터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시험에서 한 문제 틀리면 “그건 왜 틀리냐, 실수도 실력이다”라는 말만 하던 사람이었다. 7남매의 장녀인 그녀에게서 장녀로 태어난 나는 대학 입학 후 친구들이 자기네 엄마들에게 그날 학교에서 있었던 시답잖은 일들을 얘기하는 걸 보고 “엄마랑 어떻게 그런 대화를 해…?”라고 했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약간 울컥하는 것을 보면, 어떤 상처는 마음이 아니라 거의 몸에 새겨지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 멘탈 illness의 많은 부분은 주양육자의 양육방식에서 왔다. 뭐 아주 대단히 문제가 되는 양육방식은 아니었지만, 내가 타고난 기질과는 영 맞지 않는 방식이었다. 실수하면 안 된다는 강박, 지독한 자기 비난, 채워지지 않는 인정 욕구, 애정결핍, 자괴감,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 내 인생은 망했다는 생각. 아주 많은 내면의 문제들이 성장 환경에서 발생됐고, 그 모든 자잘한 상처들이 밀푀유처럼 켜켜이 쌓여 결국은 바사삭 부서지며 나를 우울증과 불안장애의 길로 이끌었다.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문제들이 부모의 양육방식에서 발생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그들 나름의 최선을 다 했을 것이고, 다 지난 일을 이제 와서 탓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의 근원을 파악하는 일은 중요하다. 원인을 알아야 실마리를 찾고, 해결 방법을 찾는 노력이라도 할 수 있다.
지금도 엄마와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다. 얼마 전에도 머리를 쥐어뜯으며 사자후 샤우팅을 했다. 하지만 내가 가장 바닥이었던 시절, 언제나처럼 회사의 네임벨류를 주장하기보단 내 마음을 먼저 생각해 준 그 말 한마디 덕분에 천년의 분노가 사그라들었고, 그 순간이 엄마와 나의 관계에서 첫 번째 돌파구가 되었다. 그녀와 나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너무나 다른 성향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라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버겁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관계를 포기하기엔 이르다. 많은 발전이 있기도 했고, 포기가 쉬운 일도 아니기에.
씻기 힘든 상처를 지닌 누구에게나 그런 치유의 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그냥 찾아오지 않는다. 운도 필요하지만, 그런 순간을 맞이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도 필요하다. 생각보다 아주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