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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경 Feb 20. 2024

카레를 만든 오후 5시

당신 말이 옳습니다.

연휴가 끝난 지도 일주일이 지났거늘..

브런치북 연재일에 연재되지 않았다는 독촉 알람은 하루 이틀 받을 때는 죄책감이 들었다가 일주일이 넘으니 무감각해졌다. 나의 상황들로 타당히 외면했기 때문이다.


연휴. 친정집에 내려갈 때는 남편이 새벽 운전을 했고 올라오는 길에는 내가 운전했다. 경주에서부터 운전시간을 합치자면 당일 하루 10시간을 운전한 것 같다. 중간에 교대해 준다고 했지만 어떤 오기인지.. 내려가는 길에 남편이 했으니 올라오는 길에는 내가 하고야 만다는 생각과, 친정을 다녀오는 긴 시간의 고단함의 짐을 적게 지우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덕분에 다음날 몸살이 났다. 마지막 연휴일은 몸살로 하루를 보냈다.


연휴 끝 퇴근길부터 남편이 몸살기운이 있다더니 감기 몸살을 앓는다. 아이한테 옮을까 걱정돼서 작은방에 격리했다. 밥상도 따로 차려줬다. 3일쯤 앓으며 출퇴근을 하더니 사흘째부터 나은듯한데 여전히 작은방에 살고 싶은 눈치다. 작은방은 잠겨있다. 작은방에 레고, 사격총이 있다. 허허..


남편이 나아갈 때쯤 아이와 내가 감기에 걸렸다. 오한으로 시작해서 목, 기침, 두통, 근육통 한 번에 왔는데 꼼짝 못 하게 아픈 나와 달리 기침, 콧물이 나는 딸아이는 체력이 쌩쌩하게 지치지도 않는다. 나 아픈 것 둘째치고 남들에게 옮길까 봐 외부활동도 못했더니 아이는 좀이 쑤신다. 나는 더 아프다. 더 지치는데 어찌할 도리는 없다. 남편은 아파도 출근했었고 아이는 아파도 이리 잘 노는데 나는 아프다고 겔겔거리고 짜증이 한가득이다. 우리 집에서 내 멘탈이 제일 약하다.


어제는 도저히 밥이 넘어가질 않고 입이 써서 죽을 시켜 먹었다. 전복죽과 호박죽. 호박죽은 내가 먹고 아이는 전복죽을 먹였다. 아프기 전 샤브샤브 전골을 해보려 우둔살 얇게 썬 것을 사뒀는데 생각보다 두꺼워 샤브용으로는 안될 것 같다. 오늘 아침에 소고기 팽이버섯 볶음밥으로 1/3 소진하고, 오늘 저녁에 카레에 1/3 소진했다. 우둔살을 빨리 소비하기 위해, 그리고 다양한 채소를 한방에 섭취하기 위한 메뉴로 적절하여 오늘 저녁은 카레였다. 오후 4시. 아이를 목욕시키고 나도 씻었다. 어제는 도저히 씻을 힘도 없어서 아이랑 나는 씻지도 않은 꾀죄죄 거지꼴이었다. 오후 5시. 약간 고민했다. 낮잠을 건너뛴 아이를 지금 재우면 나도 좀 쉴 수 있을 것 같은데 재워볼까. 카레를 할까. 쉬다가 6시에 밥을 할까? 쉬면 늦을 것 같은데..

결국 5시. 나는 저녁밥을 시작했다.

목구멍은 따갑고 콧물은 나고 머리는 하루종일 찡기는 머리띠 한 거처럼 띵하고 가만히 눕고 싶은 몸을 이끌고 밥을 했다. 아이가 가까이서 보겠다고 양파, 고구마, 당근을 만져본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먹어본다. 안 쉬고 밥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오후 6시. 카레랑 밥을 먹기 시작했다.

아이가 밥을 늦게 먹는다. 두 시간을 먹는다. 8시가 넘어 남편이 왔다. 남편도 카레밥을 준다. 남편이 오늘 문화센터를 갔냐고 묻는다. 아파서 못 갔다고 했다. 남편이 밥 먹는 시간에도 아이는 아직도 먹고 있다. 두 시간이 넘게 먹고 있다. 울화통이 치미는 것을 참고 먹이는데 남편이 말한다.

8시에 밥 먹는 아기가 어디 있어

"6시부터 먹였어!!" 남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답한다. 화가 난다. 아이에게 화가 난 건지 남편에게 화가 난 건지 분명치 않다. 아이한테 화를 냈다. 마지막 한 숟갈을 두고 버럭 화를 내고는 치워버렸다. 결국 이렇게 치울 거. 육아서적, 영상에서는 30분 이내 안 먹으면 그냥 치우라는데 내 자식이니 쉽지가 않다.


오후 9시.

설거지를 마치고 나니 아이는 아빠랑 놀이방에서 놀고 있다. 혼자 조용히 잠들고 싶어서 침대로 왔는데 아이가 아빠랑 침대로 온다. 공룡영상을 보고 자겠단다. 아이 엉덩이가 축 늘어졌다. 기저귀에 똥이 있는 것 같다. 기저귀를 안 갈겠다고 난리다. 둘러메고 거실로 간다. 오늘 똥을 4번 쌌다. 설마 또 똥인가 했는데 똥이다. 넘쳤다. 똥이랑 오줌이 범벅이 돼서 바지에 넘쳤다. 그런데도 기저귀를 안 갈겠다고 난리를 쳐서 허벅지를 손으로 철썩 때렸다. 아이 허벅지에 손자국이 나니 죄책감이 들었다. 아이는 더 크게 울었다.


하, 똥이 이렇게 샐 때까지
대체 기저귀도 안 보고 뭐 했노..

이건 말하지 못한 내 속마음이다. 괜히 아이에게 또 화를 내버렸다. 내 새끼가 아닌 듯 또는 남편처럼 그냥 설렁설렁 애를 보면 육아가 좀 편할까 싶다. 기저귀에 똥이 넘쳐도, 밥을 먹다 질질 여기저기 흘려도, 같이 어지르고 치우지 않으니 편할까.


저녁에 카레를 하면서 오늘은 브런치에 글을 쓰겠다 다짐하며 카레 사진을 찍었다. 정말 두서없는 하루.


3월 4일이면 29개월 아이가 어린이 집을 간다. 남편은 언제부터 가냐고 몇 번을 묻는다. "이제 얼마 안 남았네."라고 말한다. 나도 안다. 얼마 안 남아서 안쓰러웠다가도 당장 맞닥뜨리는 일상에서 힘이 든다. 내 체력이 바닥인 시기라 그럴까. 주변이 모두 귀찮고 예민해지는 시기다. 잠들기 전 아이가 엄마한테 안겨서 자고 싶다고 말한다. 미안하다. 아이에게 사과했다.

엄마가 화내서 미안해. 밥 늦게 먹는다고 화내고, 기저귀 안 간다고 화내서 미안해.

아이가 먼저 화해를 시도했고 아이는 잠들었다. 남편은 본인의 아지트 작은방으로 갔다. 나는 침대 머리 맡에서 글을 쓴다.


카톡을 보다가 누군가의 프사를 봤는데 이게 있다.

오늘의 명언. 살다가 킹 받는 순간이 오면 써먹어야겠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열내지 말고, 이 글을 떠올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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