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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먼 May 26. 2018

#05 세상이 X같을 땐, 메릴을 보자

페미니스트 박효선과 그녀의 오랜 친구 메릴 스트립 이야기


가장 좋아하는 메릴 스트립 영화?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배우지만, 그녀에 대해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들. 적어도 나는 지금껏 메릴 스트립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트위터의 한 봇 계정을 팔로우한 다음에 말이다.

 

‘메릴스트립 정보봇 한국본부’(이하 ‘메릴봇’)라는 재밌는 이름의 트위터 계정에는 메릴 스트립과 관련된 다양한 트윗들이 올라온다. 그녀의 훌륭한 연기 영상들뿐만 아니라 많은 인터뷰와 수상 소감 클립들이 게재되어 있다. 팔로워 수는 1만 5천 명. '메릴봇' 계정이 계기가 되어 <마빈의 방>, <더 포스트> 등 영화 상영회를 개최하고 메릴 스트립의 배우 인생에 대한 장문의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한국본부'라고 부를만 하다.


웹 매거진 '아이즈'에 기고된 <메릴 스트립, 위대한 배우의 40년> : http://ize.co.kr/articleView.html?no=2018031222277269805


이토록 사랑스럽고 우아한 사람이었다니! 단숨에 계정에 올라온 모든 클립을 다 보았다. 무엇보다 메릴 스트립은 작품 바깥에서도 여성의 권리 강화와 소수자의 인권 보장을 위해 앞장 서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었다.


메릴스트립 정보봇 한국본부 : https://www.youtube.com/watch?v=Naa0OX8hxqc

메릴 스트립의 Cecil B. DeMille 상 수상 소감 (Kor Sub)


내가 좋아하는 메릴 스트립 영화는?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철의 여인>이나 <어바웃 리키>처럼 메릴 스트립이 단독 주연을 맡은 영화들이 곧바로 뇌리를 스쳤다. 반면 <다우트>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와 같은 걸작들은 한참 뒤에야 생각이 났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같은 남성들의 이름으로만 영화들을 기억하고 있던 게 아닐까? 그 많은 영화들이 다 ‘메릴 스트립 영화’라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큰 미덕이라던 ‘메릴봇’의 전언이 문득 이해가 갔다.

 

“메릴 스트립은 남성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서 여성에게 마치 허락된 상찬처럼 붙던 여성 배우의 기준을 세운 배우가 아니라, 여성 배우의 앞을 가로막던 기준들을 무너뜨려준 사람이다.” – <메릴스트립, 위대한 배우의 40년> 中  


‘메릴봇’ 운영자를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 메릴 스트립의 진면모를 알게 해준 것이 고맙기도 했고,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배우고 싶었다. 여성으로서 영화를 본다는 것, 여성으로서 영화를 한다는 것에 대하여. ‘메릴봇’ 계정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은 그 자신도 페미니스트이자 영화 감독으로 활발하게 활동 중인 박효선 감독이다.


박효선 님과의 인터뷰 ⓒ 헤아리는 사진기


때마침 유투브를 통해 메릴 스트립에게 푹 빠진 진영이가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하였다. 영화와 메릴 스트립에 대한 두 사람의 대화를 함께 듣고 정리해 보았다.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한 비판과 분노도 터져 나왔지만, 시종일관 유쾌하고 에너지 넘치는 인터뷰였다. 이 글을 읽기 전에 트위터나 유투브의 ‘메릴스트립 정보봇 한국본부’ 계정을 먼저 들어가보시길 권한다.


# 함께 봐요, 메릴 스트립


팔로워 수가 1만명이 훌쩍 넘는데, 언제부터 트위터를 시작하셨나요? 


트위터를 뒤늦게 시작한 편이에요. 2016년 8월쯤이었어요. 9월경에 성폭력(을 고발하는) 해시태그가 트위터에 올라오기 시작했고, 제가 ‘#영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를 처음 올리고 페미니스트 영화인 모임 ‘찍는 페미’를 만든 게 10월이었으니까요. 메릴봇 계정은 2016년 12월 31일, 그해 마지막 날에 만들었어요.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였네요. 메릴봇은 어떻게 만들게 되신 거예요? 


4학년 2학기였는데, 정말 정신 없이 바빴어요. 학교도 바쁜데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다 보니까 사람이 소진이 되더라고요. 처음 시작할 때는 지치지 않고 달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문득 나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올해까지만 페미니즘하고 그만둘 거 아니니까, 지속성을 가져가려면 에너지를 분배해야겠다는 고민을 하던 차였어요.


메릴스트립정보봇 한국본부 트위터 계정


‘메릴봇’은 처음에 장난처럼 만든 거예요. 계정 이름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웃음) 메릴 스트립은 오랫동안 안식처가 되어준 존재에요. 계정 바이오(소개글)에 쓴 것처럼, 정말 세상이 X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메릴을 봤거든요. 영화를 만드는 페미니스트 동료들에게도 이게 힘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서 깜짝 놀랬죠.


우리나라에 (가시적인) 메릴 스트립 팬이 많은 건 아니잖아요. 한편으로는 혼자서 메릴을 좋아할 때 느끼는 외로움도 컸을 거 같아요. 


‘메릴봇’ 계정을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메시지를 많이 받았어요. 자신도 메릴 스트립의 팬이었는데, 이런 계정을 만들어줘서 너무 고맙고, 메릴 스트립에 대해 더 알게 되어 좋다는 얘기를 많이 해주시더라고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런 걸 원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런 외로움이 많이 해소가 되었죠.  


저도 처음 ‘메릴봇’ 계정을 접했을 때 그런 마음이었어요. 반가움! 


새로운 영상을 공유해주시는 분들도 있어요. 이런 자료도 있으니 올려달라며.


아, 너무 아름답다! (웃음) 


메릴 스트립 영화 상영회를 몇 번 해보니까 반응이 정말 열렬하더라고요. 순식간에 매진이 되기도 하고, 행사 때마다 오셔서 응원해주시는 분도 많고요. 한 번은 어떤 분이 자신이 여자라서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 때가 있었는데, 제가 올린 영상을 보면서 힘을 얻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감회가 새롭고 감사하죠.


'메릴봇' 박효선 감독 ⓒ 헤아리는 사진기


보통 어떤 분들이 상영회에 많이 오시나요? 


대부분 20, 30대 여성분들이긴 한데, 트위터 사용자는 연령대가 다양하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메릴 스트립을 봐왔던 사람들부터 최근 작품들로만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까지.  


왜 하필 메릴 스트립이야?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아요. 보통 어린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인데 왜 메릴 스트립을 팬질하냐고요. 생각해보면 메릴 스트립은 한국이나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좋아하는 그 어떤 여성상에도 속해있지 않잖아요. 나이가 많은 여성이 욕망의 대상, 덕질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잘 못하는 것 같아요. 저한테는 메릴 스트립이 여성상의 디폴트 값이나 다름 없는데 말이죠.


연기 잘하는 나이든 배우인 줄만 알았던 메릴 스트립이, 페미니스트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고 다양한 매력을 가진 사람이란 걸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알게 하고 싶어요.


# 누구나 저마다 다채로운 결들


언제부터 메릴 스트립을 좋아하시게 되었나요? 


처음 본 메릴 스트립 영화가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요. 17살 즈음이었는데, 제 인생의 굉장한 터닝 포인트였다고 생각해요. 영화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어요. 메릴 스트립의 충격적인 연기에 완전히 코가 꿰어 버렸죠. 원래 공연 예술을 좋아하던 아이였는데, 그때부터 밥 안 먹고 잠 안 자고 영화만 봤어요.

  

하나에 꽂히면 깊게 파는 버릇이 있어서 메릴 스트립이 나온 작품들을 보다가 맘에 드는 영화를 발견하면 그 감독의 영화들을 찾아보고, 음악이 좋으면 음악 감독의 작품들을 찾아보는 식으로 영화를 많이 보게 되었어요. 메릴 스트립의 필모그래피가 보통 훌륭한 게 아니잖아요? 덕분에 좋은 작품을 많이 볼 수 있었고, 세상을 보는 눈도 더 넓어졌어요. 만약 다른 남자 배우에게 빠졌다면 완전히 다르게 살고 있지 않을까? (웃음) 고마운 일이죠.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속 메릴 스트립 (사진 출처 : IMDB)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을 보면서 ‘저런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를 고민하면서 연기를 시작했다는 게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메릴 스트립이 연기를 잘 할 수 있는 건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인간에 대해 깊게 탐구하고, 무엇보다 사람을 하나의 모습만 가지고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배우에요. 메릴은 누군가 “어떻게 당신과 완전히 다른 사람을 그렇게 잘 연기하세요?”라고 물으면 화가 난다고 해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작품 속 캐릭터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감히 함부로 재단하냐는 거죠. 비록 서로 다른 외모와 악센트를 가지고 있지만 공통점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거예요.


지구에서 가장 연기를 잘한다는 얘기를 듣는 사람이잖아요. 이 사람의 연기에 몰입하게 되는 건 테크닉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태도에 더 큰 감동을 받는 게 아닐까 싶어요.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를 얼마나 소중하게 대하는지, 어떻게든 얄팍하고 단면적인 인간으로 그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지 보이니까요.  


메릴스트립정보봇 한국본부 : https://www.youtube.com/watch?v=UVyiqnkk9H4

메릴 스트립 - 오해받기 쉬운 여성들에 대하여


자신이 믿는 가치를 지속적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것도 연기자라서 가능한 게 아닌가 싶어요. 


메릴 스트립은 자신이 어떻게 소비될지 기민하게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멋있는 역할, 인기 있는 역할을 하려고 마음 먹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 텐데, 사실 메릴이 맡은 배역 중에 사랑스러운 캐릭터가 별로 없잖아요. 마가렛 대처처럼 권력을 쥔 인물을 연기할 때도, 멋있는 모습보다는 인간적인 고뇌에 빠져 불안하고 초조해 하는 캐릭터로 그려내죠.  


이런 인물들을 관객에게 설득하려는 태도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영향력을 끼치는 거라 생각해요.


한 사람에게 다양한 결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표현해주는 배우라는 생각이 드네요. 사실 한국 사회에서 그런 부분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하잖아요. 


한국에서 메릴 스트립이 소비되는 방식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인데, 유럽이나 영미권에서 메릴 스트립은 최고의 게이 아이콘이에요. 게이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존재죠. 남자 퀴어들만 나와서 메릴 스트립이 배역을 맡았던 캐릭터를 연기하는 드랙 쇼도 있어요. 메릴 스트립도 알 정도로 유명한 공연이에요. <죽어야 사는 여자>는 드랙 퀸들에게 교과서 같은 영화이기도 하고요. 한국에서는 그런 맥락이 싹 지워진 채로 그저 <맘마미아>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주연 배우로만 읽히는 거죠.


메릴 스트립 드랙 쇼 포스터 (사진 출처 : Streep Tease)


특히 어린 여성 퀴어들에게는 메릴 스트립이 최고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도 해요. 한국에서는 여성이 여성을 덕질하는 것, 특히 나이 든 여성을 욕망하는 걸 잘 상상하지 못하잖아요. 한국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미디어가 만들어 낸 여성상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 같아요.  


# 여성으로서 영화를 본다는 것


혹시 한국 영화도 많이 보세요? 


한국 상업 영화는 점점 안보게 돼요. 감정 이입이 가능한 캐릭터가 없기 때문이에요. 같은 이유로 슈퍼 히어로 영화도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SF 영화면 상상력을 많이 펼칠 수 있는 장르잖아요? 예컨대 문학에서는 페미니즘적인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많거든요. 그런데 영화에서 영웅으로 나오는 캐릭터는 맨몸으로 싸워도 강해 보이는 백인 남자들뿐이잖아요. 여성 캐릭터의 역할은 늘 한정적이고요.  


처음에는 그냥 그런 장르를 싫어하는 건 줄 알았어요. 같이 페미니즘 하는 친구들 중에도 히어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제가 이상한 건가 싶었죠. 그런데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위 ‘사이다’ 영화들을 보니까 느끼게 되는 쾌감이 대단하더라고요. 장르의 문제가 아니라, 이입할 수 있는 캐릭터가 없었을 뿐인 거예요.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회사를 다니는 것도 아니고, 업계에 편입된 것도 아니고. 남들이 정석처럼 밟는 코스에서 비껴난 삶을 살다 보니 제 자신에게 관대하고 편한 사람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남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여성으로 살면서 자꾸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신경 쓰는 부분들이 있더라고요. 외모나 행동 같은 것들이요.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 헤아리는 사진기


그 무게감을 덜어낼 수 있게 된 건 메릴 스트립의 영향이 컸어요. 몇십 년 전부터 메릴 스트립은 새 옷도 거의 사지 않고, 메이크 업 없이 공식 석상에 등장하곤 해요. 그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했다고 하더라고요. 자신의 외모에 대해 편해진 사람. 입은 옷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빛이 나는 사람. 그런 그녀가 사이즈 이슈 등에 대해 강하게 목소리를 내줄 때, 큰 위안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가끔 한국 언론에서 메릴 스트립을 ‘예쁘지는 않지만 연기력으로 유명해진 배우’라고 소개할 때면 짜증이 나죠. 연기력으로 스타가 된 건 맞지만, 지금도 굉장히 아름다운 사람이잖아요.


그래도 최근 들어서 페미니즘 영화, 혹은 여성 중심의 영화가 많아진 것 같아요.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면서 변화를 체감했어요. <더 포스트>나 <셰이프 오브 워터> 뿐만 아니라 여성배우들이 다양하고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많았고, 그 영화들이 다 잘돼서 좋았어요. 또 <레이디버드>로 그레타 거윅이 감독상 후보에 올랐죠. 여성감독으로서는 이번이 다섯 번째에요. <블랙 팬서>의 촬영감독 레이첼 모리슨이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촬영감독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서로를 끌어안은 메릴 스트립과 여우주연상 후보들 (사진 출처 : Holywood Reporter)


한국에서도 여성 중심의 서사를 그린 영화, 특히 여성 다큐멘터리를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음지에 있던 페미니즘 영화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걸 느껴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이런 움직임들을 보면서 희망을, 변화를 계속 꿈꿔야한다고 생각해요.


다만 ‘사이다’ 영화, 그러니까 여성이 통쾌한 승리를 거두는 영화만 페미니즘 영화라는 생각은 다소 편협한 시각이라고 생각해요. 예컨대 <더 포스트> 같은 영화가 액션 영화와 같은 쾌감을 주는 영화는 아니지만, 여성의 임파워먼트(Empowerment)를 주제로 다룬다는 점에서 명백한 페미니즘 영화인 것처럼요.


한국의 시네필 문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페미니즘적인 관점에서 영화를 보는 것을 폄하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예컨대 여성주의적인 시각에서 영화를 비판하면 영화는 작품으로만 봐야 한다는 의견들이 있는데 저는 동의하지 않아요. 영화도 결국 사회 안에서 만들어지는 예술이잖아요. 이 영화가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왜 이제서야 이런 영화가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모든 맥락을 제거하고 영화를 이야기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이렇게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요.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스틸컷 (사진 출처 : 국민일보)


영화를 잘 몰라도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영화 비평에 대해 잘 몰라도, 저마다 어떤 영화를 통해 힘을 얻을 수는 있는 거잖아요. <여배우는 오늘도> 같은 영화들이 나오면 응원하는 마음으로, 한 명이라도 더 보길 바라며 리트윗하고 홍보를 해요. 그러면 꼭 영화 쥐뿔도 모르면서 이런 영화 좋아한다고 비꼬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여자들은 배우 얼굴 보고 영화를 고른다는 식으로 매도하는 경우도 있는데, 영화 시장에서 간과해선 안되는 게 사실 20, 30대 여성의 구매력이에요. 우리 여자들은 월급도 더 적게 받는데 표 사서 영화 보고, 굿즈 사고, 내한 오면 다 가고. 심지어 요즘엔 텀블벅에서 후원도 해야 된다고요! (웃음) 이런 거 하려고 돈 버는 거지.


# 여성으로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


영화는 언제부터 만들기 시작하셨나요? 


원래 춤추고 공연하는 걸 좋아했는데, 열여덟 살 때 문득 무대에 서는 것보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 대학은 뮤지컬과에 갔어요. 예체능 분야가 상명하복식 위계질서가 강한 경우가 많잖아요. 군대 같은 답답한 분위기를 못 견디겠더라고요. 스물한두 살 때부터 학교 밖에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2014년도에 영상미디어과로 대학을 다시 들어갔는데,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었던 건 영상 이론이었고 여전히 영화는 밖에서 만들었어요. 예를 들면 그 해에는 제가 살던 지역에서 예술 협동조합 활동을 했어요. 사람들에게 영화를 가르치기도 하고, 함께 영화를 만들기도 했죠.  


'메릴봇' 박효선 감독(왼쪽)과 인터뷰 중인 진영(오른쪽) ⓒ 헤아리는 사진기


시스템 밖에서 영화를 만드는 게 진짜 힘든 일이잖아요. 


주변에 영화 잘 만드는 여성 동료들이 많은데, 그들을 보면서 얼마나 영화 판이 기울어진 운동장인지 알게 되었어요. 중요한 건 실패할 기회가 평등하게 부여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남자 감독들은 독립 영화도 만들고, 상업영화도 만들고, 그러다 망해도 금새 다음 영화를 찍잖아요. 그런데 여성 영화 감독들은 아무리 성공적인 상업영화를 찍었어도 한 번 실패하면 그걸로 끝이에요. 최근에는 여성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두 번째 영화, 찍을 수 있을까?>라는 이름의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죠.  


메릴 스트립만 봐도 그래요. 미국도 여성 감독의 영화나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는 투자를 받기가 어려워요. <맘마미아>가 그 해에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가장 흥행한 영화였는데, 메릴 스트립의 말을 빌리자면 ‘슈퍼맨, 배트맨, 어쩌고 맨’ 같은 영화의 리허설 비용밖에 안 되는 예산으로 찍은 영화라고 해요. 여성 영화가 흥행해서 대단한 게 아니라, 말도 안되게 열악한 제작비로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 낸 게 대단한 거죠.


영화 <맘마미아>의 메릴 스트립과 여성들 (사진 출처 : Independent)


앞으로도 계속 영화를 하실 건가요? 


어렸을 때 펑펑 운 기억이 나요. 어느 영화 모임에서 영화과 다니는 사람들과 얘기를 하다 눈물이 나는 거예요. 형님, 아우 하는 문화, 권위주의적인 문화를 못 견디는 내가 영화 감독이 될 수 있을까? 이 업계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정말 막막한 심정이었죠.


지금도 같은 고민을 해요. 한국인으로서 계속 영화를 만들고 있지만, 한국 영화계에 편입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잃지 않으면서 창작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중이에요. 서로의 정체성을 존중하면서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동료들을 만나면 더욱 좋겠죠. 영화계 밖에서,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설령 영화를 더 이상 만들지 않게 되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여성 영화인들을 응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얼마나 힘들게 싸우고 있는지 잘 아니까.


대화와 공감 ⓒ 헤아리는 사진기


# 동시대의 페미니스트


최근에는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신가요? 


일단 메릴 스트립에 대한 책을 출판사와 함께 쓰고 있고, 페미니스트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있어요.


어떤 다큐멘터리인가요? 


2년 전에 ‘#영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 그때의 기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저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사건이었거든요. 특히 영화, 영상 작업처럼 여성이 소외되기 쉬운 구조를 가진 업계에서는 자기 탓을 많이 하게 되요. 내가 예민한 건가? 나만 이상한 사람인 건가? 스스로 자책하게 되는 경우가 많죠.


해시태그를 계기로 같은 업계의 여성들이 모였고, 나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을 때 가슴이 많이 떨렸죠. 당장 가시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그 순간의 기억만으로도 용기 있게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힘이 나죠.


지금 동시대의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온라인에서 활동하고 있는 페미니스트들을 만나 인터뷰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통해 메릴 스트립에 대한 이야기도 하게 될 것 같은데… 자세한 내용은 비밀입니다!


'메릴봇' 박효선 감독 ⓒ 헤아리는 사진기


만약에, 정말 만약에 메릴 스트립을 만나게 된다면 무엇을 물어보고 싶으신가요?


여전히 팬이긴 하지만, 페미니스트 대 페미니스트로 만나서 물어보고 싶어요. 여성으로, 페미니스트로 살아간다는 게 너무 힘들고 지칠 때가 많은데 어떻게 버텼는지요.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인간에 대한 사랑과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메릴 스트립이잖아요. 어떻게 지치지 않고 계속 앞으로 갈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하고, 존경스러워요.

 

결국 사랑의 힘이 아닐까 싶어요. ‘메릴봇’이 메릴 스트립에 대한 사랑으로 계속 버틸 수 있었던 것처럼요. 덕질의 에너지가 세상을 바꾸는 법이죠! 


고마워요. 앞으로도 함께 다양한 작업을 할 수 있는 친구나 커뮤니티를 많이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개인 작업을 이어나가는 다큐멘터리스트나 비디오 아티스트들이 외롭지 않게. 진영씨 같은 친구들이요! (웃음)


“최근 1년간 좋았던 여성감독의 영화나 TV 시리즈들. 어딘가 모났거나, 누군가에게 잘 보일 맘이 없는 여자가 주인공인 아주 훌륭한 작품들."
추신 : 여성서사에 목 마르신 분들 한국 다큐멘터리의 여성감독들을 꼭 주목해주시길!”


'메릴봇' 박효선 감독이 추천한 여섯 편의 영화 ⓒ 헤아리는 사진기


# 인터뷰를 마치며


메릴 스트립은 사랑 받는 만큼 욕도 많이 먹는 사람이다. 독보적인 여성, 선두에 선 여성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기 의견을 당당하게 발언하는 여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수지에게 쏟아진 비난 여론 역시 대표적인 예. 미국도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릴 스트립이 계속해서 용기 내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친구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녀의 발언에 지지와 박수를 보내는 동료들, 함께 행동하고 연대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기에 60살이 넘은 나이에도 힘껏 달릴 수 있는 것이다.


메릴 스트립과의 오랜 우정은 페미니스트 박효선을 버티게 한 가장 큰 버팀목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메릴 스트립과 그녀의 영화들이 감독 박효선에게 힘을 실어줄 더 튼튼한 우정의 울타리를 만들어주고 있다. 같은 것을 보는 행위를 통해 생성되는 감정의 연대가 곧 영화의 본질이라고 하지 않는가. 더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통해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 전 어느 영화 감독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좋은 영화를 위해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


“가혹한 사육과 도축현장을 보고 난 뒤로 고기에 입을 못 대겠다며 채식하시는 분들이 많잖아요. 영화도 마찬가지에요. 현장에서 폭력과 불신, 갈등이 불거졌던 영화들은 아무리 작품성이 있다 해도 못 보겠어요. 영화가 사람보다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갈 길이 아직 머니, 다 함께 메릴을 보며 힘을 내자. 그리고 빠른 시일 내에 페미니스트 메릴 스트립과 페미니스트 박효선의 만남도 꼭 성사되길.


시네필의 초상은 영화를 전공하거나 영화업계에 종사하지 않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글은 자유롭게 공유하셔도 좋지만, 사진 사용에 대해서는 아래 인스타그램 계정이나 이메일로 문의 주세요.


인터뷰  진영 길중 동규(헤아리는 사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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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리는 사진기

인스타그램 @hae.p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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