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아> (2011)
어느 날 지구에 충돌하려는 소행성. 그것을 마주하며 깊은 불안과 절망에 빠질지언정 지구를 탓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소행성을 피하기 위해 지구가 더 노력했어야 한다.'라든지, '그 정도 충돌에 붕괴되다니. 이건 다 지구가 약해서 그렇다'라는 식의 말은 다가오는 파멸 앞에 얼마나 어리석은 말들인가.
마음도 이와 같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내 마음의 파멸은 내 우주만의 일이고, 그래서 당신의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저런 어리석은 말들이 너무나 쉽게 오고 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영화 <멜랑콜리아>는 무너진 마음을 묘사하는 1부와 거대한 전지구적 종말을 다루는 2부를 통해 그 둘이 사실은 같은 종류의 사건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다.
1부에서는 결혼식을 올리는 저스틴(커스틴 던스트)을 통해 무너진 내면을 묘사한다. 저스틴의 무표정한 얼굴 너머에 있는 그녀의 분투가 보이는 관객이라면, 저스틴에게 결혼식은 행복한 이벤트가 아니라 행복한 모습을 연기해야 하는 무대일 수 밖에 없다는 것 또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저스틴을 언니 클레어(샤를로뜨 갱스부르)는 옆에서 보살피는데, 그녀가 (그리고 일상에서 우리 대부분이) 간과하는 것은 저스틴이 무표정하다 해서 무책임한 것이 아니며, 감정의 폭발이 없는 것은 그만큼은 힘들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폭발할 감정이 소진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파멸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다가오는 2부가 되어서야 클레어는 저스틴의 마음을 공유하고, 저스틴은 모종의 위로 혹은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지구의 종말이라는 일회적인 사건. 그 앞에서 저스틴 혼자 의연할 수 있는 것은 저스틴이 이미 종말의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만 일어난, 그래서 너무나 쉽게 '탓'의 표적이 되었던 무너진 마음 앞에 우울이라는 이름(멜랑콜리아)의 소행성이 전 인류를 무너뜨리러 온다 한들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렇다고 이 영화가 2부에 와서 갑작스럽게 SF 영화로 장르를 바꾸는 것은 아니다. 2부 역시 현실적인 감정의 묘사를 통해 이제 관객이 느낄 수 있는 그 불안과 절망이 1부에서의 저스틴에게는 이미 있었던 일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만 같다.
내 탓이 아닌 사건 앞에 무너진 마음을 안고 살아간 기간들이 있었기에 저스틴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심연에서 진행되는 우울증을 겪어보진 않았기에 저스틴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한다고 여기는 것도 스스로를 기만하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확실한 것은 그 때 내 마음에서 일어난 일들이 나의 탓이 아니었듯이 지금 누군가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그 사람의 탓은 아니라는 것이다. 관심과 응원을 가장한 '탓'으로 누군가의 마음에 충돌하는 두 번째 소행성이 될 바에야는 그저 주위를 천천히 공전하는 것이 낫다.